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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출연연 과학자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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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5년11월09일 21시46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8시28분

작성자

  • 이덕환
  •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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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출연연 과학자들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소(출연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렇지 않아도 극심한 개혁·혁신 피로증후군을 앓고 있었는데 아무 예고도 없이 메가톤급 폭탄이 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정부가 출연연의 과학자들에게 도매금으로 ‘기타 근로자’라는 황당한 낙인을 찍어버렸다. 출연연의 과학자는 교수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종’으로 인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 기재부와 미래부의 입장이다.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전문가’라는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있는 출연연 과학자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정부가 청년 실업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하는 임금 피크제가 발단이었다. 기재부의 권고를 수용하는 대신 IMF 외환위기 때 어쩔 수 없이 단축했던 정년을 환원시켜 달라는 것이 출연연 과학자들의 요구였다. 출연연의 과학자에게도 교수나 의사와 같은 정도로 긴 전문 교육과 훈련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다. 많은 사회적 비용과 노력을 투입해서 양성한 과학자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고 정년퇴직시켜버리는 사회적 낭비를 줄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KAIST와 같은 과학기술특성화 대학, 고등과학원, 과학영재학교,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자력의학원 등에 근무하는 교수·교사·의사·연구원과 같은 전문직과의 형평성도 고려해줘야 한다는 것이 출연연 과학자들의 입장이다.

  그런데 정부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기타공공기관으로 분류되는 출연연에 근무하는 과학자의 비교 대상이 과기특성화 대학의 교수와 같은 전문직종이라는 인식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타공공기관의 과학자들이 그동안 일반 공공기관의 사무직보다 부당한 특혜를 누려왔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일반 공공기관에게 정년을 2년 연장해주겠다는 것도 잘못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결국 스스로의 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출연연 과학자들을 위해 기재부가 직접 나섰다. 정부의 권고를 즉시 수용하지 않으면 내년 임금 인상에서 기관별로 불이익을 주겠다는 최후통첩을 확실하게 전달한 모양이다.

  사실 이런 일이 낯선 것은 아니다. 강력한 과학기술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겠다던 전임 미래부 장관은 멀쩡한 출연연을 ‘정상화’시키겠다고 법석을 떨면서 과학자들을 위협했다.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한 혁신 방안에서는 출연연에게 중소·중견기업의 연구소 역할을 수행할 것을 강요했다. 연구과제중심제도(PBS)를 개선하겠다는 방법도 황당했다. 중소·중견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스스로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는 독일의 프라운호퍼를 배우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부도 부담하기 싫어하는 출연연의 운영비를 중소·중견기업에게 떠넘겨버리겠다는 것이다. 국정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나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출연연의 과학자들이 절망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연구비 부정사용에 대한 어설픈 지적과 부실한 대응도 과학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 실제로 2008년부터 5년 동안 감사원에 적발된 연구비 부정사용 금액이 무려 652억 원에 이른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그래서 연구비 집행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고, ‘3진 아웃’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런데 2008년부터 5년 동안 집행된 국가연구개발 사업비의 총 예산은 60조를 넘는다. 감사원의 지적을 받은 금액은 총 사업비의 0.1퍼센트 수준이다. 더욱이 감사원의 지적을 받은 연구비 부정사용의 대부분은 연구관리 규정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한 연구비는 관리규정에 따라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연구비의 불법 횡령이나 유용은 당연히 법에 따라 엄중하게 징계하고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이유가 없다. 3진 아웃 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과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아량이 아니다. 연구비 관리 규정을 교통법규 수준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문제는 경직되고 불합리한 연구관리 규정이다. 과학자의 자율성·정직성·다양성을 철저하게 무시한 연구비관리 규정의 경직성과 불합리성은 정부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문제는 관료들의 입장이 충실히 반영된 규정을 정부가 나서서 개선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연구비 부정사용의 사례를 적발하고, 관련자를 징계하는 절차의 문제도 심각하다. 징계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지도 못하고, 관련 연구원의 인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경우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연구소 기업의 겸직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중징계를 받은 출연연 과학자가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우수 연구자로 선정되어 정년 연장의 특혜까지 받은 중진 과학자가 성과급 사용에 대한 문제로 징계를 받아 애써 쌓아놓은 명예를 한 순간에 날려버린 경우도 있었다. 출연연 과학자의 명예와 운명이 경직된 관리규정을 앞세운 권위적인 관료의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출연연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대덕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던 세계과학정상회의에서 우리 과학자들이 스스로 채택했다는 ‘과학기술혁신과 미래창조를 위한 우리의 다짐’도 먼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광복 70년 동안 우리가 이루어낸 과학적 성취를 돌이켜볼’ 여유도 없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과학기술에 달려있다’고 당당하게 밝힐 형편도 아니다. 과학기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현실에서 ‘과학적·합리적 국정운영이 되도록 협조하고 노력하겠다’고 나설 입장도 아니다. 통일준비위원회에서조차 철저하게 소외된 과학기술계가 ‘통일을 위한 과학기술 외교와 남북교류를 들먹이는 것’도 어쭙잖은 일이다. ‘국민행복을 증진시키고, 국민과 함께하고, 사회와 소통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는 일마저 조심스럽다. 그동안 국정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었던 출연연 과학자의 입장이 그렇다는 뜻이다.

  역설적이지만 선진 기술을 흉내 낸 모방형 과학기술로 이룩한 경제 성장이 오히려 과학기술계의 위상을 추락시켜버린 독약이 돼버렸다. 경제 성장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틀어쥐게 된 관료와 기업이 과학기술계에 등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기술계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 주역이었다는 주장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과학기술계는 여전히 남의 것을 베끼는 추격형의 낡은 패러다임에 사로잡혀서 미래를 위한 혁신을 거부하고, 최소한의 연구 윤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무능하고, 부패하고, 이기적이고, 타락한 집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일본의 노벨 과학상 잔치에 놀란 관료들이 성급하게 마련한 ‘넥스트 디케이드-100’ 프로젝트나 ‘한 우물 파기 연구지원’도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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