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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서른 번째 이야기 인생의 비밀은 ‘12개의 고리’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1월13일 17시04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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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회의 이유

  도올 선생이 달라이라마를 만나고 와서 대중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달라이라마에게, ‘당신은 부처의 화신입니까?’, 이렇게 물었지.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어. ‘I'm incarnation of my previous life.' ... 그래서 내가 그를 존경하게 되었어”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스로를 깨달은 자라고 내세우지 않고, 다만 전생의 화신이라고 말한 달라이라마의 정신세계를 존중한다는 그런 뜻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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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불교도들은 윤회를 믿는다. 미심쩍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윤회를 믿지 않고 삶이 이번뿐이라거나, 윤회의 주체가 없으니 윤회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쉽게 말해버리거나, 물질의 모여 삶이 되고 흩어져 죽음이 일어난다고 믿는 유물론자라면 엄격하게는 불교도라고 할 수 없다. (물론 현생의 행복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그런 불교도들도 적지 않다.)

  사람은 왜 나고 죽음을 되풀이 하는가? 12연기설은 그것을 12개의 고리로 설명하고 있다. 붓다의 깨달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붓다 당시 이렇게 정교한 이론이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본다. 붓다의 열반 5백년쯤 뒤, 붓다고사라는 뛰어난 학승이 출현해 당시 정통의 불교교리를 종합하고 정리했다. 그가 정리한 논서가 바로 비슈디마가(청정도론)인데, 12연기는 여기에서 비로소 정교하고 세련된 이론으로 출현한다.

  첫 번째 고리는 무명이며, 마지막 고리는 늙고 죽음이다. 그 중간에 10개의 고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12개의 고리들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자전거의 체인처럼 처음과 끝이 맞물려 돌기 때문이다. 

  윤회는 존재의 바퀴이다. 붓다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건 바로 이 인생의 비밀이었다. 고통의 바다가 존재하는 양상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이 비밀을 먼저 이해해야 비로소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 수 있다. 12개의 고리 중 한 곳만 집중 공략해서 무너뜨리면 바퀴 자체가 무너진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수행법은 바로 이것이다.

 

 

  생사의 고리 12개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12개의 고리를 좀 더 상세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다. 12연기는 사찰의 학생 불자들에게 기초교리로 가르칠 만큼 기본적인 것이다. 기초적이기는 하지만 이해가 쉽지는 않다. 마음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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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고리의 개념 자체가 매우 철학적이고 정교해서 혼란도 불가피하다. 더구나 그 개념들이, (불교의 다른 대부분의 개념들이 그렇듯) 인도 말인 본래 개념이 한자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어로 된 개념 번역이 이해하기 쉬운 건 이 때문이다.)

 

  ❶ 첫 번 째 고리는 무명이다. 하지만 ‘존재’의 시작으로 이해하지 않는 게 좋다. 따라서 “그럼 무명의 원인은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기독교의 원죄처럼 인간 존재의 바탕이다. ‘하느님은 왜 인간이 죄를 짓도록 창조하셨냐?’고 질문하는 크리스찬은 입문자임에 틀림없을 테니까. 무명은 계속해서 물려내려 온 습관적 힘이다. 이 힘이 윤회의 바퀴를 돌리는 동력이다. 없을 ‘無’ 밝을 ‘明’이다. 밝지 못함이고, 지혜 없음이다. 지혜 닦는 일을 불교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까닭이다.

  ❷ 무명이 조건이 되어 行이 된다. 행은 습관적 힘들, 성향, 성품이다. 모든 정신적 현상의 바탕이다. 그래서 행의 바탕에는 지혜 없음, 무명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중 습관적으로 일으키는 마음은 그래서 대부분 어리석기 짝이 없다.

  ❸ 행이 조건이 되어 識이 성립한다. 12연기에서 말하는 식은 인간의 마음을 뜻하는 (knowing mind) 식과는 구별되는 인간존재의 발생식을 의미한다. 한 삶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식이 다음 삶의 첫 마음이 된다고 논서들은 쓰고 있다. 그 마음이 앞서의 삶과 새 삶을 연결 지운다. 새 삶의 쪽에서 보면 ‘발생식’이지만, 앞뒤의 두 삶을 더불어 보면 ‘연결식’이 된다. 이 마음은 ‘再生連結識’으로 개념화 되어있다.  

  ❹ 식이 조건이 되어 名色이 생겨난다. ‘명’은 정신, ‘색’은 물질로 ‘명색’은 물질과 정신의 혼합체인 구체적 인간의 성립을 말한다.

  ❺ 6개의 감각기관(眼, 耳, 鼻, 舌, 身, 意)이 명색으로부터 성립한다. 六入이라고 부른다.

  ❻ 감각기관이 있으므로 외부 대상과의 접촉(觸)이 성립한다. 

  ❼ 촉으로부터 느낌(受)이 성립한다.

  ❽ 느낌이 생기면 좋아함(愛)이 생긴다. 좋은 느낌은 즐기고 싶고, 싫은 느낌은 피하고 싶다. 이 고리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업을 짓게 된다.

  ❾ 좋아하면 집착하게 된다.(取)

  ❿ 좋아하고 집착하는데서 업의 힘이 생긴다.(有) 유는 행과 비슷한 업의 힘으로, 다음 생의 조건이 된다.

  ⓫ 유의 업력으로 다음 생이 시작된다.(生)

  ⓬ 태어났으니 늙고 죽을 수 밖에.(老死)

 

  이렇게 12개의 고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자전거 체인의 고리 하나만 빠지면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12개의 고리 중 하나만 부수면 바퀴 전체는 무너진다. 붓다는 첫 번째 무명의 고리와, 8번째 애착의 고리가 가장 부수기 쉽다고 가르쳤다.

 

  무명과 애착을 어찌 끊을까? 

  누군가가 그랬다. “미얀마까지 가서 명상은 왜 하느냐. 차라리 그 시간에 아프리카 봉사나 가지. 인간의 집착이 끊겠다고 끊어지느냐? 누리는 데까지 다 누려봐야 끊을 수 있는 게 집착 아니더냐? 싯달다가 왕자의 신분으로 다 누려봤기 땜에 집착을 끊고 붓다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니더냐?” 극단적 견해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해 반문했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집착을 끊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고. 좋은 대상에 대한 욕망과 애착과 싫은 것에 대한 혐오는 그대로 두면 커질 대로 한 없이 커진다. 욕구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충족하면 또 다른 욕구가 생긴다. 부자나 권력자가 만족하기란 참 어렵다.

  12연기를 이해한다면 ‘욕구를 충족시켜서 집착을 끊는다’는 견해를 가질 수는 없다. 집착을 끊으려면 삶의 실상을 이해해야 한다. 삶의 실상을 알면 하찮은 대상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된다. 삶은 12개의 고리가 이어져서 한 없이 돈다. 그 실상을 모르면 무명이라고 하고, 실상을 알면 지혜라고 한다.

  무명을 거두려면 지혜를 닦아야 한다. 무명은 어둠에, 지혜는 빛에 비유된다. 지혜를 강조하는 대승의 경전들을 반야부라고 일컫는데, ‘般若’는 산스크릿의 prajna(지혜)를 음사한 한자어이다. 반야부 경전의 꽃인 금강경은 지혜를 다이어몬드에 비유해 지어진 제목으로 영어로는 ‘Diamond Sutra’라고 번역되었다. 

  지혜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아는 것이다. ‘나’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알고, ‘마음’에 대해서 알고, 마음에 나타나는 대상에 대해서 아는 일이다. ‘나’는 이름뿐이고 실체는 없다. 이름뿐인 것을 빤냣띠(관념)라고 하고 실제의 모습인 빠라맛따(법)와 구분한다.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집착할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불교의 수행은 지혜를 얻어 법을 보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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