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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캣츠(Cats)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2월16일 17시15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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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수행처의 주인 누구?

  철학적 개념으로 꽉 들어찬 문장들을 읽는 건 고역이다. 그래서 좀 쉬었다 간다. 이 이야기는 뮤지컬 캣츠 만큼은 아니지만 제 나름대로 스토리를 갖춘 이야기이다. 쉐우민에는 고양이와 개가 많다. 이유는 모르지만 개는 결코 사람만의 공간을 침범하는 일이 없다. 마루로 깔린 경행로나 법당 앞 카펫이 그들 영역의 한계선이다. 누가 그렇게 가르친 것도 아닐 텐데 사람만의 공간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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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고양이들은 다르다. 요사채 복도든 계단의 낭하든 가리지 않고 침범한다. 지난해에는 담마홀(선방)에 새끼를 낳은 녀석도 있었다. 하기야 이 녀석들의 입장에서 보면 쉐우민의 주인은 수행자들이 아닌 자신들이다. 수행자는 객일 뿐이다. 제기랄... 뜨내기들이 쥔장 행세를 하다니. 웃기는 일이고,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객들은 자신을 잘 대해 주고 이따금 먹을 것도 준다. 그런데 어떤 녀석들은 고약하기 짝이 없다. 잠자리를 위협하고, 거처로 삼은 건물 밖으로 자신들을 몰아낸다. “부처가 자비를 가르쳤다는데, 너희는 왜 이리 매몰차냐?” 고양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수행처는 그렇게 수행자들과 고양이, 개들이 섞여 사는 곳이다. 고양이 녀석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방안에도 거침없이 들어온다. 고양이 가운데서도 사람이 사는 공간을 특히 좋아하는 녀석들이 있다. 이 녀석들은 복도 한 구석에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 누군가 와서 문을 여는 순간 사람보다 먼저 쏜살같이 방에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침대 밑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에 이 녀석들을 내보내는 일은 귀찮은 사역이 된다.

 

  우리가 살았던 B동에도 그런 녀석이 하나 있었다. 노란색에 하얀 줄무늬의 녀석이었다. 누군가 길을 잘못 들였는지, 해가 지면 B동 2층을 떠나지 않았고 방에 들어오는 것을 무척 즐겼다. 새벽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방 앞 카페트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새벽 참선을 마치면 복도청소를 해야 하는데 ‘그건 네 사정이고...’하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캣츠 권리장전

  청소를 하기 위해 이 녀석을 깨워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하지만 흰줄무늬 노랑 고양이,  녀석의 권리장전은 난감하기 짝이 없다. 잠을 깨우는 나를 향해 오만한 표정으로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나를 깨우는가!’ 말하듯, 가늘게 눈을 뜨고 그저 ‘냐옹~’ 한 마디 뿐, 다시 눈을 감고 카펫에 얼굴을 묻는다. 빗자루를 쥔 내 마음에 도사(분노)가 올라온다. 빗자루로 이 녀석 얼굴을 쓸어내 잠을 깨우고, 발을 굴러 위협한다. 마지못해 이 녀석은 어슬렁거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며칠 동안 똑같은 청소 전 세리모니를 반복하자, 빗자루를 쥔 내 모습을 보면 눈치를 슬슬 보며 건물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동물은 자신을 향한 호감과 적대감을 사람보다 훨씬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미움에 대해 제 나름의 방식대로 반응을 남긴다. 어느 날 아침 화장실 바닥을 청소하던 법진거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앞에 누군가 ‘큰 거’를 한 무더기 남겨놓았다. 그 ‘물체’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억측이 많았다. 흰줄무늬 노랑이 그 놈의 소행으로 추정됐지만, 고양이 배설물이라고 하기에는 색깔이 너무 사람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렇다고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분량이 적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고양이는 자기의 약점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잠깐의 논란이 있었고, 계단 올라와 첫 방에 사는 심리학 교수가 솔선해서 배설물을 치웠다. 왼 종일 기분이 찜찜했다. 

 

  흰줄무늬 노랑이 녀석은 그날도 B동 2층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방 앞 카펫에 코를 박고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평소와 다른 낌새는 전혀 없었다. 혐의를 받고 있는 당사자는 그 날 너무도 당당했다. 만약 그 녀석이 범인이라면 그 당당함은 뻔뻔스러움일 터였다.

 

  뉴 켓

  혐의자가 범행당사자임이 드러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같은 장소에 똑같은 색깔과 똑같은 크기의 ‘큰 거’가 한 무더기 놓여있었다. 이 녀석 신분이 참고인에서 피의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만일 범인이 사람이라면 엽기 중 엽기일 터였다. 흰줄무늬 노랑이 녀석이 범인임에 틀림없었다. 또 한 번의 작은 소동이 일었고 이번에는 내가 그 물체를 치웠다. 한 편으로는 괘씸한 마음에 화가 치밀었고 또 한 편으로는 나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녀석의 항의방식이 무척 경이로웠다.

 

  녀석은 그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너무도 당당했다. “그래, 해 볼 테면 해봐! 날 때려쥑일 거야?” 그렇게 대드는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새벽에 일어나 방문을 여니, 아니, 이런 일이!!! 방 앞 카페트에서 고양이 두 마리가 자고 있었다. 쌍둥이처럼 몸의 무늬가 같았다. 흰줄무늬 노랑... 다만 뉴켓의 몸집이 좀 더 작았다. 도대체 어디 있다가 나타난 녀석일까? 의문과 함께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예감은 어김없이 맞았다. 예의 화장실 앞에 ‘큰 거’ 두 무더기. 법진거사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한 채, 무더기들을 치웠다. 이제는 녀석들을 달랠 수 있다면 달래고 싶었다. “제발... 우리 좀 봐주라...” 내일도, 모래도, 집에 갈 때까지 이 일이 계속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마음속에서 미움과 분노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래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체념이 있었다. “그래... 치우지 뭐... 니들 맘대로 해봐라...” 그렇게 비로소 캣들과 무심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날 이후 더 이상 배설물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치정에 얽힌 살묘사건

  희한한 경험이었지만, 캣들과의 인연은 악연이었던 셈이다. 악연의 인연도 시간이 가면 궁금해진다. 미얀마에서 돌아와 몇 달 뒤 한국의 수행처에서 S거사를 만났다. S거사는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수행하는 중학교 선생님이다. 쉐우민의 추억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캣들의 얘기가 나왔다. 우리의 주인공 흰줄무늬 노랑이 녀석이 화제로 등장했다.

 

  S거사가 묵었던 A동 2층도 녀석의 활동무대였다고 한다. 그리고 S거사가 그 녀석의 부음을 전한다. 내가 쉐우민을 떠나온 지 며칠 뒤 밤새 고양이들의 괴성이 쉐우민의 밤을 뒤흔들었다고. 이를테면 고양이들의 전쟁이었다. 암컷 한 마리를 둘러싸고 벌이는 수컷들의 전쟁. 다음날 수행자들은 이 전쟁의 승패를 알 수 있었다. 승자는 블랫캣, 패자는 흰줄무늬 노랑이. 그날 이후 흰줄무늬 노랑이 녀석은 비실비실, 시들시들, 시름시름... 결국 며칠 후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치정에 얽힌 살묘사건이었다.

 

  소름끼치게 영악했던 녀석의 짧은 삶에서 고성제를 생각한다. 무상, 고, 무아는 존재 자체의 속성이다. 흰줄무늬 노랑캣이 존재하고 소멸했던 사건 자체가 무상했고, 고통스러웠고, 한 건의 우연이었다. 우리 사람들이라고 다를 게 뭐 있던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꿈꾸고 부대끼고 그렇게 살다 간다. 모든 존재가 노랑캣의 이런 삶으로 치환될 수 있다. 일본의 승려 잇싸의 하이쿠가 불현 떠오른다.

 

  “참, 이상하다.

  번개불을 보고도

  삶이 순간인 걸 모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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