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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32> 시를 향한 몰입, 그리고 진정성의 시 -이건청 시인이 밝히는 시와 인간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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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2월10일 1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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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대’* 편집부와의 대담 :  이건청 시인


-가족사를 포함한 유·소년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1942년에 태어났습니다. 일제 식민치하, 가장 엄혹하고 가난했던 시대였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심한 폐렴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상황에 직면했었다고 합니다. 겨우, 병마를 벗어나자 내 아버님은 건강하고 맑은 사람으로 살라고 ‘굳셀 건’(健) ‘맑을 청’(淸)자 이름을 제게 주셨습니다. 이 이름은 형제들의 항렬자를 따르지 않은 이름입니다.

나는 7남 1녀의 형제들 중 차남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엄청 많은 형제들로 보이지만 그 무렵엔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중학교 졸업 때(1958년) 앞으로 자녀를 몇 명이나 둘 것인가를 묻는 앙케이트를 돌리곤 했었는데 대부분 3남 2녀라고 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내성적인 소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경기도 이천군 설성면 앞으로 복하천이란 냇물이 흐릅니다. 은모래 밭이 펼쳐져 있고 구비 구비 냇물이 흐릅니다. 유년기의 많은 시간을 모래사장과 시냇물, 갈대밭을 헤매 다니며 보냈습니다. 그때 형성된 자연친화적 정서는 노년기의 지금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감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 선생님께 정서적으로 가장 영향을 끼친 사건이나 사람이 있다면?

 

1950년 6. 25 사변이 터지자 안온한 자연 풍광에 묻혀 살던 나는 끔직한 파멸의 현장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공직에 계시던 아버지, 서울 유학중이던 형,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은 생사를 모른 채 전쟁의 회오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적 치하 산골에 숨어살면서 실로 끔직한 일들을 겪게 되었고(이 때의 체험을 시로 쓴 「이순에 쓴 6.25 담시」 (시집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2005. 세계사)』 참조), 1950년 7월 어느 날 나는 실제로 유엔군 폭격기의 공습을 당하기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 살던 마을에 폭탄이 여러 발 투하되었으며 터지는 기관 포탄 속을 달리기도 했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였었던 것이지요. 그날 나는 폭격으로 죽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내 나이 9살 때였지요. 들판 도처에 포탄이나 수류탄이 뒹굴고 있었지요. 

  

-문학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내 위에 6년 연상의 형님이 계셨습니다. 부산에 임시 피난학교를 연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쯤, 경기도 이천에 살았고요. 언젠가 집에 온 형이 노래를 한 곡 일러주었습니다.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저 하늘 높이 뜬 저 하늘 높이 뜬 흰 구름까지//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저 건너 보이는 저 건너 보이는 작은 섬까지” 아주 짧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이런 노래를 일러주고 또 훌쩍 부산으로 떠나고 나면 나는 내가 한 마리 새가 되는 상상을 해보곤 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 그리운 곳을 대입해 부르거나, 내가 ‘새’가 아니라 ‘산’이거나 ‘바위’거나 ‘느티나무’로 바꿔 생각하면 얼마든지 노래를 바꿔 부를 수 있었지요. 말하자면 이런 노래들을 만들어 부를 수 있게 되면서 나는 그리움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리운 대상들을 맘대로 상상할 수 있는 아이로 커갈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소년 시절의 습작과 일상생활은 어떠했나요

 

1955년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한국 사회는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을 때였습니다. 6.25 전쟁이 휴전되고, 심적 물적 자원은 태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읽을 만한 책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이따금 가슴에서 솟아나는 표현 욕구를 원고지에 옮겨 적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학교의 문예반에서 활동을 하게 되고, 교내 신문을 취재 편집하는 책임을 맡게 되면서 시 창작에 대한 열의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 했지요.

1959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문예작품 낭독회’를 하게 되고, 그 모임의 초청 연사로 박목월, 조지훈 선생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분들을 모시는 섭외 책임을 내가 맡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박목월 선생을 댁으로 찾아뵙게 되면서 선생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박목월 선생 문하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현재도 나는 박목월 선생 문하생 모임인 ‘목월문학 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박목월 선생과의 평생 인연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들을 통해 몇 번 소상히 밝힌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글 쓰는 일에 빠져 살게 되었습니다. 서울 시내 내로라하는 문학 소년들과 교유하게 되면서 글 쓰는 일이 신바람 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부지 시절이었던 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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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고등학교 시절 서울 시내 고등학교 문학 친구들과(1960)

 

-문학적 영향을 받은 선배 문인 혹은 작품에 관해 들려주십시오.

 

고등학교 재학시절, 내 문학일생에 영향을 받게 될 국어 교사를 만났습니다. 1958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김상억 선생이 그 분인데요 나는 이 분을 통해 시인이 지녀야 할 엄격한 정신을 배웠습니다. 문인은 문학을 지고의 정신적 가치로 삼아야 하는 것이고, 비문학적 삿된 것들을 단호히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문학 지망생이 읽어야할 독서 목록을 전해 받기도 했습니다. R.M.릴케의 『로뎅』,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 『말테의 수기』같은 책들과 구라다하쿠조(倉田百三)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 니이체의 『처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카프카의 『성』같은 책들이 그때 내가 읽고 또 읽던 책들이었습니다.

내가 박목월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9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이 때 박목월 선생을 뵙게 되면서 내가 도달해야할 삶의 목표가 ‘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선생을 따라 한양대학엘 갔고, 시인이 되었고, 선생께서 창간하신 월간시지 『심상』의 편집자가 되었으며, 선생께서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하시는 동안 시인협회 일을 맡아하게 되었습니다. 선생 작고 후 한양대학교 교수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959년 선생을 처음 뵙고 1978년 작고하실 때까지 늘 선생의 지근거리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문청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제 시인등단 50년을 맞고 있습니다만, 아마 시를 쓰는 일이 기쁘기만 했던 때가 고등학생 시절로부터 나이 20세 전후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벅차오르는 표현 욕구를 잠재울 수 없었지요. 그러나, 본격적 시세계에 들어서게 되고, 박목월 선생의 본격적인 시 지도를 받게 되면서 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내 나이 26,7세 때 나는 시로 인해 죽음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고, 심한 이명과 심장 부정맥에 시달렸습니다. 꿈에서도 시를 썼었지요. 이때의 공황장애 체험은 내 시 「손금」, 「구시가의 밤」등에 반영되어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선생님 결혼 무렵과 가정생활과 관련된 이야기?

 

이제 나이도 들고, 오래 전 이야기이기도 하니, 공개를 해보기로 하지요.  .  . 내가 중학교 국어선생 때, 한양대 졸업반 학생들이 교생 실습을 나왔었습니다.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통과의례로 시행하는 실습과정이지요. 영어과 교생 중에 문학적 취향이 두드러져 보이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내가, 프란츠 카프카의 『성』과 윌리암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를 빌려준 적이 있었는데 불과 닷새 만에 책을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곁들이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이 학생의 독서 범위가 깊고 넓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독서력이 탁월한 이 학생을 유심히 대하게 되었고요. 실습이 끝나고 나서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1970년 3월, 한양대학교를 전교 수석으로 졸업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학생 이름이 서대선이고, 지금 나와, 48년을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결혼식 주례를 박목월 선생께서 맡아주셨고요, 결혼식은 드라마센터였습니다. 한 때 서울예술대학이었던 그곳입니다. 3달치 급여를 가불해 얻은 셋방에서 살림을 차렸었지요. 내가 1979년 한양대 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아내에게 영어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학원 공부를 하도록 권했습니다. 아내는 1986년부터 신구대학 교수로 부임했고, 몇 년 전 거기서 정년을 맞이했습니다. 아내 서대선은 1996년 『시와 시학』에 김남조 선생 특별추천을 거쳐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아들, 딸을 모두를 대학 교수로 길러내기도 했습니다. 힘든 길을 용케 헤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지요.

 

-등단 무렵의 한국 문단의 현실, 혹은 문학적 환경(여건)에 관해 들려주십시오.

 

1958년 『현대문학』에서 문단인 주소록을 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거기 실린 문인 수가 120 여명 쯤 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현대문학』, 『사상계』, 『자유문학』같은 지면이 문학 작품 발표의 전부였습니다. 매달 발표되는 작품들이 7, 80여 편에 불과 했으니 작품이 발표되고 나면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누구의 어떤 작품이 좋았다든가 누구의 작품은 수준이하라든가 하는, 말하자면 독자들의 엄정한 난도질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지요.

60년 대 말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많은 시인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어느새 육신의 나이 70대 중후반을 거쳐 가고 있습니다. 누구는 이승을 떠났고, 누구는 시단 복판에서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며 고적감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등단 이후, 작품 활동에 관해 개괄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등단 직 후 나는 인간 내면의 심상 풍경을 표출해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지와 이미지의 병치, 상호 이질적인 돌발 이미지의 결합 등을 통한 이른바 데뻬이지망 기법이 두드러지게 시도 되었지요. ‘현대시 동인’ 그룹에 참여 활동하던 시기의 시편들이지요. 『이건청 시집』 (월간문학사, 1970), 『목마른 자는 잠들고』 (문학세계사, 1975) 등의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이 이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1980년대를 거쳐 가며 쓴 시편들입니다. 이 시기의 내 시는 사회의식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아는바와 같이 한국 사화의 1980년대는 민주화의 열기가 뜨겁게 분출되던 시기였습니다. 대학 사회는 그런 민주화의 열망이 뜨겁게 분출되던 시기였고요. 연구실로 최루탄 가스가 밀려들고, 때로는 대학 캠퍼스 전체가 시위 학생들에게 접수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나는 지성인의 책무에 충실하고자 다짐하곤 하였습니다. 『망초꽃 하나』 (문학세계사, 1983) , 『하이에나』 (문학세계사, 1989), 『코뿔소를 찾아서』(고려원,1995), 『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시와시학사, 2000)등의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이 이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내 시는 시적 대상과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시적 현실이나 사물과의 소통의 방식을 새로이 정립하게 된 것이지요. 보다 깊게 시적 대상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그것들과 같은 체위에 놓고서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시적대상과의 오랜 불화의 상태를 지양하고, 시적 대상과 시적 자아와의 관계를 같은 위계에 놓고 소통하게 된 셈이었습니다. 나 개인 적으로는 이 시기에 창작된 시편들에 애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세계사, 2002),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서정시학. 2007),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동학사, 2010), 『굴참나무숲에서』 (서정시학, 2012), 『곡마단 뒷 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서정시학. 2017) 등의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이 이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첫 시집과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여러 시집 중 가장 아끼시는 선생님의 시집 한 권만 들라면?

 

내 첫 시집은 『李健淸 詩集(이건청 시집)』 (월간문학사, 1970. 4)입니다. 시집 표제기 이리 된 것은 박목월 선생께 시집 표제 정하기가 어렵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리 어려우면 이건청 시집이리하면 어떻겠나”하셔서 그냥 저자명을 책 제목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박목월 선생께서 책 표제를 자필로 써주셨고, 김영태 시인이 표지 디자인을, 전봉건 선생이 책 제작을 맡아주셨습니다. 첫 시집을 내면서 시단에서 과분한 덕담의 평들을 듣게도 되었습니다.

11권의 개인 창작 시집 중에서 특히 애정이 가는 시집을 꼽으라면 나는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을 들고 싶습니다. 이 시집이 간행되었을 때 주목해주는 평자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자 개인으로서는 가장 공들여 쓴 시편들이고, 나름대로 이 시집의 시편들을 쓰게 된 대의명분도 타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 시집은 사북, 고한 장성 탄광 등을 3년 동안 발로 밟고 다니며 직접 보고 체험하면서 얻어진 이미저리들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사북사태는 1980년 사북일대애서 일어난 광산 노동자들의 저항 사태입니다. 탄광회사와 어용 노조의 만행에 대한 저항사태였지요. 탄광엔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인력으로 석탄을 캐야 하는 곳입니다. 수시로 낙반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정부의 에너지 공급 정책이 주유종탄(主油從炭)으로 바뀌면서 광부들이 힘들게 삶을 이어가던 탄광들이 문을 닫게 되고, 탄광촌 사람들도 차츰 다른 삶을 찾아 떠나게 되었지요. 나는 광부들도, 탄광지대에서 저항 이념을 전파하던 운동권 사람들도 다 떠나버린 황량한 현장을 찾아다니며 피폐하고, 불공정한 노동현장을 차가운 앵글로 담아내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장 열악한 현장이었던 막장엘 들어가 보기로 했었습니다. 막장 체험 없이 탄광을 참으로 알았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태백시 장성 광업소 소장에게 특청을 넣었고 그쪽의 안내를 받아 막장엘 갔었습니다. 1998년 3월 16일 이었습니다. 내가 찾아갔던 장성탄광의 막장은 입구로부터 500m쯤 걸어들어 가서 수직으로 850m를 하강, 거기서 인차로 갈아타고 수평으로 3200m를 걸어 들어간 곳이었습니다. 석탄 비산 먼지가 자욱한 곳, 후끈한 지열이 들끓는 곳, 거기가 막장이었습니다. 3억 년 전 매몰되어 탄소덩이로 묻혀 있던 울창한 밀림, 거대 한 짐승들이 현생 인류와 다시 만나는 현장이 막장이었습니다.

이 시집에는 1980년 사북사태 이후, 폐광된 사북, 고한, 장성 탄광 마을의 엄혹한 현실을 카메라 앵글에 담듯 공을 들인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3년여의 세월동안 탄광촌을 헤매 다녔으며 지하 3200m 막장을 찾아 들어가 석탄 앞에서 무릎을 꿇기도 했었습니다. 노동 운동권 사람들도 다 떠나버린 탄광 마을을 혼자 헤매 다니며 엄혹한 탄광 현실을 오직 시인의 오감으로 담아내려한 시집이었습니다. 시단에서 이 시집에 주목한 논자는 별로 없었지만 내가 엄혹하고 스산하며 소름끼치는 1980년대 탄광 현장에서 얻어낸 시편들이어서 애정이 갑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탄광들이 폐광되어 광부들도 운동권 사람들도 떠나버린 폐허 속을 헤매며 시를 탐색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시 정신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으로 많이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선생님께서 가지신 생각은? 

 

시를 쉽게 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최근에 작고한 어느 시인은 ‘시의 부재’를 강하게 주장했었습니다. 모든 언어, 심지어 지금까지 써진 많은 작품들이 이제까지 누군가가 쓴 작품들의 차용이거나 변용일 뿐 독창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었지요. 독창적인 시를 쓴다고 고뇌하는 시인들을 한심하다고 비판하기까지도 했었지요.

그러나, 그런 문학 이론을 주창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 게 사실이지만 나는 시의 개별성이나 독창성, 시만이 지니는 영원성까지를 철석같이 믿는 입장입니다. 나는, 문학청소년기 10여 년을 박목월 선생 댁을 드나들며 시 공부를 했습니다. 한 때는 시 때문에 먹지도 잠자지도 못해서 사경을 헤매기도 했었습니다. 나이 80을 바라보며 살지만 시의 독창적 가치나, 영원성을 회의해보지 않았습니다. 요즘 한국 시단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고들 말하지만, 우리시에 깃든 가장 큰 결핍이 시에 대한 진지한 존경의 마음이 옅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강단에서 많은 후학을 직접 가르치셨습니다. 젊은 시인들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은?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10년, 대학에서 30년, 도합 40년을 강단에 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선생 때는 수업 시작 전 5분쯤 내 나름의 특별 시간을 가지곤 했습니다. 상상력 훈련 같은 걸 해 보곤 했었지요. 가령, 눈에 띠는 대로 도토리 한 알, 깡통 하나라도 들어 보이고 그것들의 10년 후를 상상해 이야기 해보도록 시키곤 했습니다. 기발한 상상을 이야기 한 학생에겐 칭찬의 말을 해주었지요. 칭찬은 동기 계발의 동인이 되거든요. 대학 강단에선 시론이나 시창작론 같은 강좌를 주로 맡게 되어 있어서, 이론 보다는 실제로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시를 읽을 땐 반드시 소리를 내어 읽어라, 시를 정말로 이해하려면 우선 좋은 시를 고르고, 그 시 한 편을 최소한 10분 이상은 되짚어 읽으라고 권하곤 했습니다. 그리곤, 상상력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곤 했습니다. 지극히 초보적인 식견처럼 보이는 이런 습관들이 좋은 시를, 시인을 만들어내는 기틀이 되는 것이지요. 시론이나 시창작론을 수강하는 학생들 중에도 이런 기본 소양이 태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좋은 시를 옳게 이해할 수 없겠지요. 물론 좋은 시인이 될 수도 없을 것이고요.

 

-선생님의 시 세계를 개괄적으로나마 직접 독자들에게 말하신다면?

 

진정성의 시를 쓰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말하는 진정성이란 현장, 현실을 그대로 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시인의 체험에 토대를 둔 것이고, 체험 속에서 깊게 뿌리내린 상상이 좋은 시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내가 말하는 시의 진정성이란 깊고 비옥한 체험에 토대를 둔 상상입니다. 나는 이 ‘비옥한 체험’을 토대로 무한 상상을 좇아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를 만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곤 했습니다. 소외와 변방을 찾아다니며 닫힌 공명의 공간을 만나려 노력해 왔습니다. 내 시의 상당수가 변방의 여숙(旅宿), 깊은 산골 겨울 산사(山寺), 폐사지(廢寺址), 폐광촌(廢鑛村)같은 곳에 머물며 얻은 체험 속에서 불러낸 상상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어진 질문일 수 있겠습니다. 최근 신인들의 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런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시인’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한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은 시가 지녀온 유구한 전통이나 가치, 권위 자체가 해체, 보편화 되면서 밀려들어온 현상에서 연유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시의 독자적 가치를 부정하는 시 이론과 그런 이론에 토대를 둔 글들도 시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으며, 그런 풍조에 맹종하는 시들도 발표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한국시에 끼친 악영향은 심대한 것입니다.

이런 주의 · 주장은 본격적인 시의 궤도에 닿기 위해 거쳐야 될 어렵고도 힘든 용맹정진의 단계를 거치지 못한 시인 지망생들, 얼치기 시인들에게 쉽게 호응되기도 하면서 시는 어떻게 써도 된다는, 시인이 별것도 아니라는 풍조를 이뤄내고 있는 것이지요. 시의 애호가로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명패까지를 달게 되면서 시도, 시인도 보편적 가치로 하락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의 위의를 정립해가는 일이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당시의 경험과 한국시단에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국시인협회는 1957년 창립된 시인 단체입니다. 이 단체에 회원으로 참여해온 시인들의 면면이 한국 시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단체의 37대 회장을 맡으면서 좋은 시를 널리 알리는 일을 수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좋은 시를 접하기 어려운 곳을 직접 찾아가 시를 전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트위터를 통해 매일 2편의 시를 전하는 일도 벌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업들은 모두 풍진 속에 방치된 시, 시인 속에서 ‘좋은 시’, ‘좋은 시인’을 찾아 바르게 알리려는 의도에서 시행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시인협회 회장을 하면서 또 하나,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던 일이 ‘시 낭송’사업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낭송’ 될 수 있는 시를 선양하려는 것이었지요. 요즘 도처에서 시 낭송회가 열리고 있고, ‘시 콘서트’라는 그럴듯한 자리에서 시인과 독자가 만나고 있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현장에 가 보면 대부분이 ‘낭송’이 아닌 ‘낭독’들을 하고 있는 것 볼 수 있습니다. 시는 말로 쓰는 것이고 ‘말’은 소리와 의미를 지닌 기호입니다. 당연히 좋은 시는 의미나 정서가 좋은 소릿결과 결합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요. 한국 시사를 일별해보아도 대부분 낭송될 수 있는 시편들이 명편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시인들이 낭송 가능한 작품들을 써내게 되면 자연히 한국시의 수준도 향상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낭송 가능한 시가 좋은 시라고 나는 믿습니다

 

-문화예술계에 일고 있는 이른 바 <미투운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회가 다변화 되고 있고 사회 구성원들의 역할 분담 내역들도 대폭 바뀌고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도 마찬가지이지요. ‘미투 운동’이란 것도 여성의 자기 정체성 확인 이란 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언젠가 그런 이름의 ‘운동’이 불필요한 시대가 도래되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다만, 그런 ‘운동’이 봇물 터지듯, 인민재판식으로 벌어져 옥석이 뒤섞이는 일은 지양되어야 하겠지요. 여성과 남성은 대립하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협동 관계라는 점, 늘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요.

 

-선생님께서 한 때 문예지에 직접 관계하신 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문단의 문예지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1973년 박목월 선생께서 창간한 월간 시지 『心象(심상)』의 편집에 참여한 적이 있었지요. 1978년 3월 선생께서 타계하기기까지 5년간입니다. 이 잡지는 문학지가 지녀야 할 소명과 책무를 투철하게 지키려 노력한 잡지였습니다. 한국 시의 향방을 쉼 없이 점검하고, 실천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대학 강단의 문학 연구자들을 대거 필진으로 영입함으로써 현장 문학에 이론을 접목 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서울대 차주환 교수, 고려대 김우창 교수, 연세대 이상섭 교수, 김현 평론가 같은 분들이 필진으로 참여해주었습니다. 매호, 기획 특집을 마련했다는 점, 일회 심사로 신인을 발굴하기 시작 했다는 점, 원고와 원고료의 맞교환을 시도했다는 점 등을 이 잡지의 선구적 업적으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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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심상' 창간무렵 박목월 선생댁에서 (1973)

 

자료를 보니 2016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간행되는 문예지가 280종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1960년 대 말 『현대문학』, 『현대시학』, 『사상계』, 『자유문학』 등 몇 종류에 한정되었던 사실과 견주면 그야말로 문예지의 전성기라 할 만하지요. 잡지가 많아진 데는 잡지 간행이 쉽고 편리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원고가 워드 파일로 제작되어 수집되고, 제책 과정도 쉽게 이루어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문단은 문예지의 소명과 책무에 투철하기가 어려운 시대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시가 대중화 되어가면서 시인이라는 호칭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문예지들이 상업적 타산에 오염되기도 쉬운 환경에 처해 있기도 할 것입니다. 문예지 운영자들의 엄격한 자기 절제와 통제가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시대 청년들과 문인을 꿈꾸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은?

 

문학은 인간 정신이 높게 고양된 언어 양식입니다. 살아가면서 타성에 갇히고, 오욕에 오염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좋은 시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생명력을 지닙니다. 시인은 일상 속에서 궁핍을 감내하기도 하지만 드높은 가치를 창출해내는 위업을 구현해내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내 생애가 지니는 수많은 가치들이 있었지만 늘, 시를 최우선 순위에 놓고 살아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물론, 아직도 내 시가 도달해야 할 높이에는 부족하고, 힘이 부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를 내 생애의 차선의 자리로 비켜놓고자 했던 적은 없습니다.

내가 시단에 이름을 올린 1960년대 말, 휘황한 광휘 속에 등단하면서 시단의 기대를 받았던 시인들이 퍽 많았습니다. 이 시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한글세대 시인들이 다수 시단에 등장한 시기입니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나 우리 감각을 우리말로 구현할 수 있었던 세대가 1960년대에 신인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 여 년이 지난 지금 상당수의 시인들이 시단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시 보다 효용 가치가 높아 보이는 현실 가치를 따라갔거나, 나태와 태만에 빠져 시를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이 시적 천품을 지니고 태어났더라도 생애를 통틀어 시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문학사가 기억할만한 시의 높이에 닿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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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현대시 동인>멤버들. 인사동에서 1994. 좌로부터 마종하, 이유경, 주문돈, 김종해, 정진규, 이건청, 박의상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고 있고 우리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 전망입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종이책의 위기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우리 문학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문제 그리고 극복 방안에 대한 견해?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인간 생활 양태도 달라져 가리라는 점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학의 존재양식 자체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컴퓨터가 쓴 시라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Alan M.Turing은 루크 라이트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게」를 모본으로 컴퓨터로 하여금 시를 만들어 보게 했다고 합니다. 이재구 기자(jkdee@ittoday.co.kr)의 자료는 그 실상을 보여줍니다.

“진실에게, ???지음/ 진실에게 나는 감사를 바친다/ 현실같은 무언가가 필요할 때/ 내가 쓰고 괄호를 그릴 때/ 나는 거의 실제성을 사용해 마무리 한다/ 나는 그 이상을 추구한다/ 당신의 파라다이스를 노래하면서/ 내가 매우 존중하는 것은 당신이다/ 많은 방법을 잃어가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게,???지음/ 행복이여 내 사랑이여, 내 고마움이여/ 당신이 나에게 보내준 수표는 대단했소/ 나는 내일 은행으로 갈 것이오/ 내 방세는 이미 너무 늦어졌소/ 내 시가 운율이 잘 맞지 않는 것을 용서하시오/나는 지쳤고 신경 쓰지 않겠소/ 다음번에 당신이 더 많이 보내준다면 아마도/ 나는 당신에게 사랑의 소네트를 써 보내리다”

두 개의 버전 중에서 앞의 것이 컴퓨터가 쓴 시입니다. 뒤의 작품의 알고리즘을 적용해서 컴퓨터로 만든 시입니다. 특별히 시적 교양을 지니지 않은 독자도 난감함을 느낄 것입니다. 투박하고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지요. 무엇보다도 세세한 감각의 파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소통 불가능한 낱말들이 구문을 이루고 있습니다.

종이 책을 대신해서 ‘전자 책’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시집의 경우 전자책이 종이책을 전적으로 대신하는 날은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는 깊은 사유와 상상의 과정을 거쳐서야 전달이 가능해지는 자율적 존재이고, 종이 시집은 자율적 존재물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작품 활동에 관한 설계와 문단 활동에 대한 말씀도 부탁드립니다.

 

박목월 선생께서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어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제게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네가 시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이쯤 했으면 되었지 싶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 네가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 하신 말씀입니다. 늘, 제 등짝을 내리치시는 각성의 말씀입니다. 세속의 유혹 앞에 설 때마다 그 말씀이 채찍처럼 와 닿습니다.

이제, 내 육신의 쇄락과도 힘든 응전을 해나가야 할 때가 오고 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노추에 빠지지 말자, 시 앞에 부끄럽지 말자 다짐해보곤 합니다.  <끝>

 

* 이 대담은 지난 2018년 ‘시인시대’ 겨울호에 실린 것을 간추린 것으로, 시인시대는 문학동인 ‘시인시대’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출판사 예솔이 발간하는 계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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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2월10일 1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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