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41>느끼고 생각하는 언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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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이 늘고 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에게 한글 이름을 지어주는 예는 이제 꽤 많아져서 초등학교 신입생들의 출석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찬솔’이 ‘아람’이 ‘봄비’ ‘여름’이…이런 이름들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갓난애들만이 아니라 이미 성장한 사람들의 이름을 바꾸는 예도 많아졌다고 한다. 본래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은 두 자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두 자 중의 한 글자는 항렬자로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마련이어서 주어진 항렬자에 맞춰 한 자를 짜맞추는 식이었다. 이렇게 되니까 무수한 동명이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동명이인만이 아니라 말의 뉘앙스가 이상하거나 부르기 어려운 것도 많아서 그동안 사용하던 이름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담긴 의미가 좋고 부르기 쉽고 쓰기 쉬운 말로 개명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추세는 앞에서 ‘한글세대’ ‘가로쓰기’ 세대가 성장해 자식의 이름을 작명하게 되면서 보편적 현상이 되어갈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는 혈족간의 유대를 고집하기보다 보편적 시민사회로 핵가족화 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인 것 같다. 이런 핵가족화 현상은 인간의 의식자체를 핵가족화해가고 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의 이 말은 언어가 존재의 의미를 담아두는 그릇으로 기능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었다. 언어가 대상들이 지니는 의미들을 그 속에 담는다기보다 스스로 의미를 구체화하고 확장시킴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언어가 존재의 단순한 지시 기능만을 지니는 게 아니라 언어가 존재를 규정하고 존재의 살아 움직이는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식대로라면 그러니까 말이 있으므로써 존재가 실재하게 된다는 논리가 선다.
이런 하이데거의 언어관은 이성간의 사랑의 양태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을 느끼는 상대방의 구체적 실체를 감지하게 되는 것은 그 상대방의 발가락 손가락, 눈, 코, 귀와 같은 실체를 통해서가 아니다. 진실로 짜릿한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상대방의 이름을 통해서 이다. 그 이름을 통해서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가 계속되고 그리움 자체가 구체화되는 것이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에서 ‘제롬’은 ‘알리사’에게 있어 몽매에도 잊지 못할 별빛같은 이름이었다. 제롬이 떠나간 삼년동안 대문의 빗장이 흔들릴 때마다 알리사는 ‘제롬 너지…네가 왔지…’이렇게 말하며 문 밖에 나서곤 했던 것이다. 이 순정적인 연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애처로운 사랑은 그들의 이름에 담겨져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알리사에게 있어 제롬이란 이름은 이 세상 모든 남성들의 참된 가치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 버린다. 오직 제롬만이 구원의 이름인 것이다. 즉 ‘제롬’이란 언어는 제롬이라는 구체적 실체가 존재하는 집인 셈이다. 알리사가 사랑하는 것은 제롬이란 언어로 지시된 육체가 아니라 제롬이란 말로 사유된 총체적 의미인 것이다.
사람의 이름은 실체로서의 인간에게 붙여진 언어이다. 이 언어가 부르기 좋고 쓰기 좋고 또 좋은 의미를 지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왕에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을 개명하는 이들이 많다는 신문보도를 읽으면서 시대의 변천을 새삼느낀다. 이제는 비단 사람의 이름만이 아니라 모든 언어가 아름답고 곱고 깊은 내포를 지니도록 깨우쳐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어를 우수한 언어로 만들어가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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