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38> 멸종하지 않는 푸른 정신의 무게-이건청 시집 [실라캔스를 읽고]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 이병철 시인. 문학평론가
책은 가볍다. 보통 200~500그램 내외다. 두꺼운 철학서나 양장본 장편소설의 경우 1킬로그램이 넘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부채처럼 흔들 수 있을 만큼 가볍다. 하지만 그램이나 온스, 근 등 무게 단위로는 계량되지 않는 장중한 책도 있다. 이건청 시인의 근작 시집 『실라캔스를 찾아서』가 그렇다. 이 시집은 240그램의 무게를 지녔지만, 손 위에 올려두면 240개의 계절이 만져진다. 시인이 목월 선생의 문하에서 시를 배우기 시작한 1959년 이후 60여년 시력(詩歷)이 함축된 시집이니, 240번 계절이 바뀔 동안 피고 진 매화, 모란, 작약의 무게, 쩡쩡 얼어붙었다가 흐르기를 반복한 강물의 무게, 수많은 탄생과 죽음의 무게, 때론 가라앉고 또 때론 떠오르던 기쁨과 슬픔의 무게들이 행간에 담겨 두 손을 가득 채운다. 3억 6천만 년 전 고생대 물고기인 실라캔스를 다시 헤엄치게 한 이 시집은, 시인 개인 삶의 무게를 넘어 인간의 자연 파괴로 지구 환경체계가 급격히 변화된 인류세(人類世) 죄악의 무게와 38억 년 전 지구 암반지층의 무게와 세상 떠난 시인들이 지상에 남긴 영혼의 무게까지를 담고 있다. 깃털처럼 가벼운 문장들이 부유하는 시대에 이 무거운 시집은 우리를 어떤 심연으로 데려가 줄까?
2020년 12월 13일, 나 오늘
차고 딱딱한 이 바위 틈 비집고 누워
누억 년 풍상에 기대면
인간세의 플라스틱 쓰레기 곁
구겨지고 찌그러진
화석으로 남으리
억 년 후에도 썩지 않은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곁
두 개나 세 개쯤 골편 화석으로 남으리
겨우 남으리.
—「한탄강 지질공원에서」 부분
시집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귀향시편’을 여는 시집의 첫 문장은 “이제 나/ 돌아가고 싶네”(「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란시스」)다. 1부에서 시인은 300만 년 전 초기 영장류와 “5억4천만 년 전,/ 몸의 반쯤이 입이었던,/ 입이 배설구이기도 했던,/ 1밀리 원시 동물”(「시코리투스 코로나리우스」)과 “25억 년, 원생대/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뿜어낸 분비물이 굳은 화석/ 물질 속에서/ 생명의 시작을 풀어내는/ 그리운 점액질”(「스트로마톨라이트」)을 경유해 “제각기 다른 빛깔로 켜켜이 쌓인/ 지층 38억년”(「한탄강 지질공원에서」)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
|
|
시인이 태초의 원시 지구를 고향으로 명명하며 귀향을 시도하는 것은 “세렝게티의 하이에나,/ 보아구렁이,/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한민국 법무부장관 추미애, 그리고, 시인 이건청 모두,/ 한 조상의 자식”(「시코리투스 코로나리우스」)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이 한 조상의 자식인데도 인간은 다른 종들은 물론 인간까지 타자화(他者化・othering)해 동물과 식물을 멸종시키고, 전쟁을 일으켜 인간끼리 죽이고, 조화롭던 자연을 파헤친 폐허에 혐오와 갈등, 전염병과 집단학살, 그리고 “플라스틱 쓰레기”만을 남겨두었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면서 시작된 지구의 여섯 번째 대멸종 ‘인간세’에 대한 책임의식을 시인은 그 자신 “억 년 후에도 썩지 않은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곁/ 두 개나 세 개 쯤 골편 화석으로 남으리”라는 반성적 자기예언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제 나 돌아가고 싶다”는 귀향에의 의지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쓰레기장에서 “생명의 시작을 풀어내는 그리운 점액질”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길어봐야 불과 수천 년에 불과한 인간세가 지구 38억년의 지층을 구기고 찌그러뜨릴 것을 이미 예감한 시인의 쓸쓸한 묵도(默禱)인 셈이다. 그리고 이 묵도는 훗날 우리 모두의 임종게(臨終偈)가 될 것이다.
2부 ‘지하철을 타고 가며’에서 시인은 도시문명의 상징인 지하철에서 바라본 “전멸의 풍경”을 언어로 재현해내며 현대인들에게 무거운 경고를 던진다. “세상 플라스틱 알갱이들이 쌓이고 쌓여” “한반도의 14배나 되는 죽음의 섬이” “번쩍이며/ 다가오고 있는”(「전멸의 풍경」) 자연의 백래시(backlash)를 두려워하고, “멈출 곳에서 멈추지 못한 것들이/ 돌아서야 할 곳에 돌아서지 못한 것들이/ 앞선 것들의 뒤만 쫓아가다가/ 풍덩풍덩 벼랑으로/ 밀려 떨어져 내리”는(「레밍의 날들」) 자본주의시대 현대인들의 맹목적 탐욕을 경고한다. 또 “같은 칸에 실려/ 같은 쪽으로 가고 있지만/ 저들 중 누군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것 같다/ 너는 어느 편이냐/ 소리치며 달려와/ 멱살을 잡을 것 같”(「지하철을 타고 가며」)은 타자 혐오와 편 가르기, 양극화 갈등, 사회에 만연한 분리와 혐오의 감각, 이기주의를 심각하게 우려한다.
굴피집에 가고 싶네.
굴피 껍질 덮고
지붕 낮은 집에 살고 싶네.
저녁 굴뚝 되고 싶네
저문 연기되어 흐르고 싶네
허릴 굽혀 방문 열고
담벼락 한켠
아주까리 등잔불 가물거리는
아랫목에 눕고 싶네
뒷산 두견이
삼경을 흠씬 적시다 가고 난 후
문풍지 혼자 우는
굴피집에 눕고 싶네
나 굴피집에 가고 싶네.
—「먼 집」 전문
전염병 시대는 사람들의 이동과 모임을 제한시켰다. 고향을 떠나온 이들은 명절에도 고향에 갈 수 없게 되었고, 늙은 부모를 요양병원에 모신 자녀들은 불효자가 되어버렸다. 불과 1년여 전만 하더라도 전염병에 의한 격리로 이산가족이 생겨날 거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격리는 사람들을 집에 머물게 했지만,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집에 있으면서 집을 잃었다. 물질적인 집이 아니라 마음이 기대 쉴 수 있는 관계의 집을 상실한 것이다.
“굴피집”은 두꺼운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친환경주택이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등 산간지방 화전민들이 주로 이 집을 지어 살았다. 굴피집은 “낮은 집”이다. 낮은 집을 노래하는 이 시는 타자와의 교류 가능성을 제거한 채 계층과 등급을 나누어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높이’ 집착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공공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거지’라고 부르는 이 사회의 수직적 욕망을 부끄럽게 만든다.
1970년대 산업화시대의 핵심과제는 전근대와의 단절과 분리였다. 농경사회의 공동체 문화는 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구시대의 유산이며, 전통 풍속들은 도시 미관을 해치는 야만적인 문화로 치부되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기치를 내세워 과거와의 단절을 감행한 ‘새마을운동’은 당대와 자식 세대의 풍요를 염원하는 근시안적 미래 지향의 성격을 나타낸다. 가난에서의 탈출과 물질적 번영을 약속하는 가까운 미래만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시간으로 상정되었다. 끊임없이 ‘미래’를 지향한 산업화시대는 한국사회의 욕망 구조를 바벨탑처럼 수직으로 세워놓았다. 이러한 수직적 욕망은 21세기 신자유주의시대에 더욱 심화되어, 계층 간의 간극을 벌리고는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아예 없애버렸다. 한국사회의 극심한 양극화 현상은 낮은 곳에서 더불어 잘 사는 대신 높은 곳에서 혼자 잘 살기만을 추구하는 ‘상승-단절’이 사람들에게 내면화된 결과다.
시인은 팬데믹으로 인한 관계 상실의 시대,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 타자를 차단하는 주거 생활이 표준적 방식이 되어버린 교류 상실의 시대에 굴피집을 우리 삶의 원형적 공간으로 제시한다. 그 집은 “먼 집”이므로 가닿을 수 없는 실낙원이자 현대인들이 회복해야 할 이상공간이 된다. “굴피 껍질 덮고/ 낮은 집에 살고 싶”다고 노래할 줄 아는 이는 “저녁 굴뚝 되고” “저문 연기되어” 집집마다 피워 올린 밥 짓는 연기들과 뒤섞이기도 하고, “허릴 굽혀 방문 여”는 겸손함을 기억해내기도 할 것이며, “문풍지 혼자 우는” 타자의 외로움을 껴안아 달래줄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공동체 문화로의 회귀가 곧 이상공간으로의 귀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부 ‘그레고르 잠자에게’와 4부 ‘선묘’, 5부 ‘말들이 돌아오는 바다’를 통과하면서 시인은 “치매전문 요양병원에서 누질러진” “그레고르 잠자”(「그레고르 잠자에게」)와 “형편없이 작아진 사람들”(「난장이 화가 뚜루즈 로뜨렉 전시장에서」)과 “남루에 가려진 채 버려져 죽은” “안토니오 가우디”(「남루」)를 호명하며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병들고 뒤틀린, 한없이 왜소해진 기형과 불구의 인간을 연민한다. 산업화 도시문명에 길들여져 자연의 리듬으로 호흡하는 심장을 잃어버린, 각자도생을 내면화해 타인의 비극은 물론 세계의 부조리함과 맞서 싸우는 법을 잊어버린 인간의 남루가 위대한 예술가들의 정신마저 우리들 영혼의 지층에서 퇴색시키는 인간세를 슬퍼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목월 선생 연둣빛 목소리”(「박목월 선생」)와 “시인 조정권 필생의 시편들”(「산이 왜 산이고 물이 왜 물인지」)과 “71년을 살고 간, 남향의 시인” 권명옥(「종속도」)과 “무진장 말들을 캐러 멀리 간 시인 신현정”(「말들이 돌아오는 바다」)과 “빙하기 광막한 지평을 걸어오고 있는 이가림 시인”(「시인들의 성산포」)을 그리워한다. 세상 떠난 시인들의 정신이 잊히지 않도록 그들의 이름을 암각화처럼 우리들 기억에 눌러 새긴다. 이생진, 김종해, 오세영, 오탁번, 조창환 등 평생 시를 일군 동료 원로시인들과 손에 손 잡고 “숨어서 자신을 지킨” 실라캔스처럼 현대문명의 이기 앞에 “부정과 저항”으로 “푸른 정신”을 지킬 것을, 몇 억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끝끝내 멸종하지 않고 다시 출현한 저 화석 물고기처럼 먼 훗날 “말 되어 돌아올” 것을 다짐한다.
진화의 대세를 따라
모든 동물들이 떠나갔는데도
육지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물속을 찾아 간
육지척추동물의 조상
진화를 거부하고
지질 속에 화석만 남긴 채 사라진
숨어버린
진화를 거부한,
짐승의 이빨과 네 다리, 폐(肺)의 흔적까지 지닌 채
6천5백만 년을 물속에서 숨어 견딘
살아서 그물 속에서 잡혀 올라온 물고기
숨어서 자신을 지킨
부정과 저항,
푸드기는 푸른 정신…
—「실라캔스를 찾아서」 부분
시인은 “3억 6천만 년에서 6천5백만 년 전, 퇴적암에서 발견되던 화석 물고기 실라캔스는 육지 척추동물의 특징들을 거의 그대로 지닌 채 1938년 어부의 그물에 잡혀 올라왔다. 몇 억 년의 시간을 물속에 살았으면서도 물속 환경을 따라가 동화되기를 거부한 채, 애초의 자신을 지켜온 실라캔스의 자존의지 앞에서 나는,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되뇌어 보는 것이다”(‘시인의 말’)라고 말했다. 덧붙여 “현대사회는 대세에 쉽게 휩쓸리곤 하는 순응사회이다. 이런 때일수록 ‘부정’의 정신으로 현실과 사물을 보고, 대세에 휩쓸리는 대중추수주의에 저항에서 올곧은 자신을 찾는 일이 중요한 것이며, 이것이 시대의 지성들에게 주어진 소명일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의 계기를 나는 실라캔스의 경우에서 찾았다”(산문 「실라캔스를 찾아서」)고 고백했다.
시인이 실라캔스 연작을 쓴 것은 “깊은 수심, 6천5백만 년 어둠을 견디고도/ 진화되지 않은 채/ 애초의 몸으로 살아”(「진화, 반진화」) 돌아온 실라캔스로부터 예술가의 한 이미지를 섬광처럼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일률적 진화를 거부한 채 물질문명, 대중추수주의가 만연한 도시로부터 도망쳐, 깊고 어둡고 고독한 변방으로 “숨어서 자신을 지킨” 시인의 자화상을 실라캔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진화는 언제나 생존을 위해 무용함을 버리고 유용함만을 택해왔다. 그러나 이건청 시인은 실라캔스를 통해 유용함 대신 무용함, 물질 대신 비물질, 육체 대신 정신으로 기울어지는 정반대의 진화론을 제시하고 있다. 아니, 진화를 아예 멈추고 최초의 자기존재성, 그 어떤 부정함과 삿됨도 섞이지 않은 완전한 순수 정신을 지키는 반진화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집단축제가 벌어지는 저 땅으로 다시는 기어 올라가지 않겠다고, 차라리 암흑 같은 심해 속에서 수압과 어둠과 외로움을 견디며 시인으로서의 정체성, 예술가의 정신성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는 청동빛 언어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가. 이 시집과 함께 우리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실라캔스를 찾아서, 아니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예술혼을 찾아서 지상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심연으로 내려간다. 거기 실라캔스가 있으므로. 이건청 시인이 있으므로.<끝>
※ 이 글은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이병철 시인이 시집 [실라캔스를 찾아서]를 읽고 이건청 시인에게 보낸 독후감을 수록한 것이다. [출처] 멸종하지 않는 푸른 정신의 무게/작성자 lgcpoet |
<ifsPOS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