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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4년10월13일 22시47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3시46분

작성자

  • 김상조
  • 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연대 소장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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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재벌,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현대차그룹이 한전 부지 인수의 후폭풍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감정가의 3배가 넘는 10조 5,500억원의 낙찰가, 입이 딱 벌어지는 금액이다. 달러로 환산하면, 100억불…. 내 나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1977년 수출 100억불 달성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엄청난 돈을 일개 그룹이 사옥 짓는 땅 사는데 쓰다니…. 그 결과 현대차⋅기아차⋅모비스 등 현대차그룹 컨소시엄에 참여한 3사의 주가는 폭락했다.

물론 기업의 경영판단은 존중되어야 한다. 장하성 교수 이래 18년 동안의 경제개혁연대 활동 역사에서 기업의 투자 결정에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다. 다만, 상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입찰 금액 결정이 3사의 이사회에서 합리적 논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지는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주의 자격으로 이사회 의사록 열람을 청구했다. 주식이 얼마나 많기에 이사회 의사록을 보자고 하느냐고? 오해하지 마시라. 이건 단독주주권이다. 즉, 한 주만 있어도 행사할 수 있는 소수주주권이다. 정당한 법적 권리 행사를 통해 한전 부지 입찰을 결정한 9월 17일, 최종 계약을 결정한 9월 26일의 이사회 의사록을 각각 열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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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그룹과의 합의에 따라 이사회 의사록의 전모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실망스러웠다는 것으로 소감을 요약할 수 있겠다. 다음 두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9월 17일 및 26일 이사회에 정몽구 회장은 물론이고 정의선 부회장도 모두 불참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와 모비스의 대표이사이고, 정의선 부회장은 3개사의 이사로 모두 등재되어 있다. 이번 한전 부지 인수는 정몽구 회장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총수일가가 모두 이사회에 불참했다는 사실은 주주로부터 경영권을 위임받은 이사로서 책임 있는 모습이 아니다.

이건 트집 잡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현행법 및 법원판례에 따르면, 회사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사(absent director)에 대하여 책임추궁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심지어는 이사회에 참석은 했으나 표결에만 빠진 이사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례도 있다. 결국 정몽구 회장은 9월 17일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한전 부지 입찰과 관련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향후 발생할지도 모를 책임추궁으로부터는 사실상 빠져나간 것이다. 아마도 외국인들은 이런 한국 실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이사회 불참 이사에 대해서는 더 큰 책임을 묻는다. 이사회 참석이 이사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이기 때문이다. 법원의 잘못된 판례가 한국 기업의 이사회를 형해화하고 있다.

둘째, 한전 부지 입찰을 결정한 9월 17일 이사회 논의가 과연 이사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 상태에서 충실하게 이루어졌는지 여부도 의문이다. 단적인 예로, 9월 17일 개최된 3사의 이사회는 각기 30분에서 42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이사들의 신중한 검토는커녕 실무진이 준비한 참고자료를 설명하기에도 빠듯했을 것이다. 물론 이사회에서 장시간 논의를 거친다고 해서 최선의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9월 17일 이사회는 실질적인 토론은 없이 모양새만 갖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입찰 참여 여부와 입찰 금액 결정에 필요한 중요 정보인 회사의 투자 여력 및 투자 효과 등에 대해서는 9월 17일이 아니라 낙찰 후인 26일 이사회에서 논의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사회의 형식과 실질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 시점에서 현대차그룹의 총수일가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기가 쉽지 않다. 앞서 언급한 이사회 불참 이사에 대한 책임추궁의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이번 사건을 총수일가가 부당한 사익을 추구한 ‘충실 의무’(duty of loyalty) 위반 사안으로 보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단지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 의무’(duty of care)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법률적 수단을 동원하기에는 제약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거나 또는 손해발생의 현실적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현 상황에서 이를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 그래서 고심 끝에 경제개혁연대는 형사적 배임 고발이나 민사적 손해배상 소송제기(주주대표소송) 등의 법적 책임추궁을 위한 행동은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하였다. 시민운동, 특히 기업을 상대로 하는 시민운동은 뜨거운 가슴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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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론 개선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비하면 크게 발전했다고 할 수도 있고, 2012년 경제민주화 열풍을 지나면서 기업들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진 부분도 있다.

이번에 현대차그룹의 3사가 이사회 의사록 열람 청구에 적극 협조한 것도 그 대표적인 증거 중의 하나다. 이번만이 아니다. 올 6월에 경제개혁연대는 총수일가가 받은 고액연봉의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서 9개 재벌의 9개 계열사를 상대로 의사회 의사록 열람을 청구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9개 재벌기업이 모두(!) 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이 가장 먼저(!!!) 응했다. 옛날 같으면, 주주의 정당한 권리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불응하고 경제개혁연대는 소송으로 다투어야 하는 소모적인 과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제개혁연대는 기업들에게 많은 비공개 질의서를 보낸다. 자칫 잘못된 문제제기로 인해 기업의 평판이 훼손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미리 기업의 설명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2012년 경제민주화 열풍 이후에는 거의 모든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서고 있다. 비록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 이행은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하다. 시작에 불과하지만, 긍정적인 변화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 부랴부랴 대응하는 단계에는 이르렀으나, 미리미리 리스크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지배구조 개선의 핵심 영역이며, CEO의 역량과 이사회의 역할에 좌우되는 부분이다. 이번에 한전 부지의 고액 낙찰 논란이 벌어지자 정몽구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느니 또는 정부 땅을 사서 마음이 편하다느니 등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쏟아냄으로써 오히려 배임 논란을 자초한 현대차그룹의 문제, 그리고 이건희 회장의 건강 문제와 스마트폰의 실적 부진이 겹친 위기 상황에서도 긴 침묵을 이어감으로써 오히려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는 삼성그룹의 문제는 리스크 관리의 컨트롤타워가 무너진 한국 재벌의 현주소를 상징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그룹의 실상이 이럴진대, 다른 그룹들은 오죽하겠는가.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은 혁명(revolution)이 아니라 진화(evolution)다. 기나긴 진화 과정의 초입에서 자칫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끊임없는 자극이 필요하다. 정부와 시장, 그리고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업의 진화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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