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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서른두 번째 이야기 무엇이 삶을 망치는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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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0001년11월30일 00시00분
  • 최종수정 2018년02월07일 16시16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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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웨다나와 산야

  윤회의 바퀴를 돌리는 12개의 고리, 그 고리를 부수면 윤회는 끝난다. 붓다는 12개의 고리 가운데 첫 번째 고리 무명(아비자)과 다섯 번째 고리 느낌(웨다나)이 가장 공략하기 쉽다고 가르쳤다. 첫 번째 고리는 어리석음이고 다섯 번째 고리는 애착, 탐욕과 연관된다. 어리석음과 탐욕, 그리고 화는 삶을 망치는 세 가지 독소, 三毒이라고 불린다. ‘번뇌’라고 불리기도 한다.

  왜 붓다는 번뇌를 얘기하는가? 붓다는 왜 중생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고통의 질곡에서 헤매게 하는 주범으로 번뇌를 지목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마음’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살필 필요가 있겠다. 앞서 마음부수는 52가지라고 설명했다. 오온 가운데 몸과 관계된 색을 제외하고 마음에 속하는 受, 想, 行, 識 가운데 심왕인 식을 제외한 수, 상, 행이 52가지라는 뜻이다. 이들 52가지를 모두 행, 상카라(sankara)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두 가지가 매우 특별한 것이라서 별도로 떼어낸 것이 수와 상, 즉 웨다나 (vedana)와 산야(sann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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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다나와 산야는 마음이 일어날 때 반드시 함께 따라오는 7가지 마음부수에 속한다. 기억하시리라. 일곱 명의 대신에 둘러싸여 출현하는 왕의 비유를. 논서는 웨다나를 ‘몸으로 생생하게 체험하는 느낌’이라고 설명한다. 즉 온 몸으로 경험한다는 의미인데, 정서적인 의도가 반응이나 반작용으로 발전하면 상카라, 즉 行이 되는데, 그렇게 되는 단초가 되는 경험이 바로 웨다나이다. 

  웨다나, 즉 느낌을 좋은 느낌, 나쁜 느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로 논서는 구분한다. sukkha(樂)와 dukkha(苦), 그리고 adukkham-asukkha(不苦不樂)이 그것이다. 아비담마에서는 5가지로 분류하는데, 육체적으로 sukkha와 dukkha, 정신적으로 sommanasa(기쁨)과 domanasa(불만족), 그리고 upekkha(육체와 정신적 평온)이다. 아비담마는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괴로움이 서로 다른 것이어서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카에는 보통 집착이 따라오고 두카에는 분노가 일어나기 십상이다. 그렇게 웨다나는 쉽사리 상카라로 발전한다. 우뻬까는 평온하고 무관심한 느낌이다. 사마타로 선정을 닦거나 위빠사나로 지혜를 닦으면 우뻬까의 느낌이 따라온다. 웨다나에 대해서는 일단 이 정도만 얘기해두자. 

  다음은 산야, 즉 想이라는 마음부수를 이해해 보자. 산야는 보통 우리가 생각이라고 알고 있는 마음의 작용이다. 서양철학에서 중시하는 ‘理性’도 이에 속한다. 산야는 a1, a2, a3.... 의 경우를 보고 A라고 뭉뚱그려서 아는 작용을 한다. 마음이 알아차리면 산야가 따라와 판단을 한다. 마음이 소리를 알아차리면 산야가 분별하여 종소리, 새소리, 천둥소리 등을 판단한다. 선정을 닦아 궁극에 가면 산야와 웨다나가 사라진다고 한다. 무색계 4선정까지 닦아 비상비비상처정의 단계를 넘어서면 상과 수가 멸하는, 想受滅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데, 여러 스님들의 법문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지만, 나는 논서에서 그 근거를 찾지 못했다. 아마도 유식이나 대승의 논서들 가운데 이런 경지를 주장하는 논서들이 있지 않나 싶다.

  아무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의 경지’를 궁극의 경지로 여기는 법문들도 있는데, 근거가 퍽 모호하다. 어쨌든 무색계 4선정도 경험하지 못한 본인이 어찌 웨다나와 산야가 함께 사라지는

상수멸의 경지를 짐작이나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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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약한 심리적 성향들

  무엇이 삶을 불행하게 하는가? 무엇이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싯달타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원인으로 심리적 성향 몇 가지를 지목했다. 논서는 52가지 마음부수 가운데 웨다나(受)와 산야(想)를 뺀 상카라(行) 50가지 중 해로운 것들이 이에 속한다.

  이런 심리적 성향들 가운데 대표적 악질들을 번뇌(asava, 아사와)라고 부른다. 불교의 상식에서 번뇌는 세 가지 심리적 성향을 지칭한다. 탐, 진, 치... 욕심, 분노, 어리석음이 그것인데, 이것 때문에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 초기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에 사견을 더해서 4가지를 번뇌라고 한다. 

  논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네 가지 번뇌(asava)가 있으니, 감각적 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사견의 번뇌, 무명의 번뇌가 그것이다.” 앞에서부터 욕심, 분노, 사견, 어리석음을 그렇게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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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을 ‘지혜 없음’으로 해석한다면, 지혜가 없어서 사견을 갖게 되는 만큼 사견을 무명의 번뇌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그렇다면 번뇌는 탐, 진, 치 세 가지가 된다. 탐이 감각적 욕망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嗔이 존재의 번뇌인 까닭은 무엇인가? 嗔心에 대해 다시 살필 기회가 있겠지만, 짜증, 분노, 싫음... 등의 진심의 범주에 속하는 심리적 성향들은 모두 자신의 존립에 대한 위험에서 비롯된다는 통찰이 놀랍다.

  당연히 이것들도 마음부수에 속한다. 번뇌라는 심리적 성향들은 왜 악질적인가? 어원으로 따지면, 아사와는 ‘흐르는 것’에서 온 말로 종기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이나 오랫동안 발효된 술 등을 뜻했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번뇌라는 심리적 성향이 감각기관에서 형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논서는 “눈으로부터 형상으로 흐른다, 흘러간다, 굴러간다. 그렇게 흐른다는 뜻에서 번뇌이다... 귀로부터 소리로... 등등”이라고 설명한다.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알아차리는 마음의 대상이다. 그것에 반응하는 마음은 알아차림 뿐 아니라 일단 웨다나와 산야 등 일곱 가지 반드시 따라오는 마음부수 외에 일반적으로 악질적 마음부수, 즉 번뇌가 악착같이 들러붙는다.

  물의 흐름을 되돌리기 쉽지 않듯 번뇌의 흐름을 되돌리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표정관리를 잘 해도 번뇌는 포장 밖으로 삐질삐질 스며 나오기 마련이다. 새어나온다고 해서 한자로는 ‘漏’로 번역하기도 했다.

  마음을 속박하는 마음부수이지만 보통사람의 경우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번뇌의 흐름은 폭포와 같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길은 번뇌와의 싸움이 된다. 그래서 열반을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가 된다.

 

  “눈이 밥통보다 크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의지가 표상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못생기고 괴팍한 독일 철학자의 대표저서는 그래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그의 촌철살인의 문체와 표현에 매료된 젊은 니체는 잘 나가던 삶을 송두리째 던져버리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의 사상적 노선을 따라 걸었다. 이른바 ‘삶의 철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배고픈 야생의 육식동물들은 보통 자신의 식사량보다 훨씬 큰 먹잇감을 사냥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런 자연의 현상을 “눈이 밥통보다 크다”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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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lobha)’이란 ‘밥통보다 큰 눈’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의 탐욕은 여느 동물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일단 마음이 탐욕에 뿌리박으면 마음은 탐욕을 일으킨 대상 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는다.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을 ‘慾心’이라고 한다. 십 수 년 전 지인의 전원주택에서 뱀 한 마리가 작은 개구리 한 마리를 탐하여 공중을 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뱀이 그토록 동작이 빠르다는 걸 그 때 알았다. 개구리는 삼켰지만 지인의 회초리에 뱀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인간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탐욕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목숨을 잃는 사례를 살아가면서 너무 많이 접한다. 

  탐욕은 번뇌의 대표주자다. 논서는 이를 ‘감각적 욕망의 번뇌’라고 설명한다. 청정도론의 설명을 잠깐 인용해보자.

 

“마치 끈끈이처럼 대상을 거머쥐는 특징을 가진다.

달구어진 냄비에 놓인 고깃덩이처럼 

달라붙는 역할을 한다.

염색하는 안료처럼 버리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족쇄에 묶이게 될 법들에서 

달콤함을 봄이 가까운 원인이다.

탐욕은 갈애의 강물로 늘어나면서 

마치 강물의 거센 물살이 큰 바다로 인도하듯 

중생을 잡아 악처로 인도한다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탐욕을 채우면 삶이 행복해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채울수록 커지는 탐욕의 속성 때문이다. 결코 탐욕을 채워서 없앨 수는 없다.

  논서의 스승들은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이 일어날 때 항상 두 가지 마음부수가 함께 일어난다고 통찰한다. 邪見(ditthi)과 我慢(mana)이 그것이다. 이것이 내 것이다(貪). 이것이 나다(邪見).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慢). 모든 종류의 탐심에는 항상 이런 세 가지 측면이 함께 한다.

  아만에는 거만, 교만 등도 포함된다. 그것은 남들보다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 하는 식의 모든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열등감도 여기에 포함된다. ‘나’라는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남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자만의 특징은 오만함이다.

건방진 역할을 한다.

허영심으로 나타난다.

사견으로부터 분리된 탐욕이 가까운 원인이다.

광기와 같다.”(청정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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