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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4> 역사를 바꾼 카이사르의 유언장 (기원전 44)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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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3월29일 18시14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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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우리가 카이사르를 죽인 것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카이사르를 제외한 모든 로마인은 노예가 될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러뜨렸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다음 날 포로 로마노 광장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암살의 정당성을 알리려 한 것이었지만, 군중의 싸늘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했다. 다른 암살자들이 카이사르를 비난하자 군중의 분노가 폭발했고, 암살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중의 분노는 “당신들은 애국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살인적인 행동을 했다”는 응답이었다. 

 

이 무렵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유족과 집정관 안토니우스와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5권에서 암살되기 6개월 전에 작성된 유언장의 내용을 소개했다. 

1.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4분의 3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긴다. 

2. 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퀸투스 페디우스에게 절반씩 나누어준다. 

3. 제1상속인인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사양할 경우, 상속권은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돌아간다. 

4. 옥타비아누스가 상속할 경우 유언 집행 책임자로 데키우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명한다. 

5. 제1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뒤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는다. 

6.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는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 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의 소유 정원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이 일을 실행할 책임자는 제1상속인으로 한다. 

“도대체 옥타비아누스가 누구인가?”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제일 먼저 터져 나온 질문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사 계급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을 지냈고,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누이동생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누이의 외손자다. 

유언장의 핵심은 무엇인가?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삼아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성을 주어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다. 

반면에 유언장을 보고 실망한 사람이 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으나, 카이사르는 야속하게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합법적인 결혼을 통해 낳은 아들이 없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후계자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당시 로마에 머물던 클레오파트라는 유언장이 공개되자 크게 낙담한 나머지 아들을 데리고 서둘러 로마를 빠져나갔다. 

 

안토니우스 역시 참담한 심정이었다. 카이사르의 최측근이라고 생각한 그는 후계자는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더욱이 그는 현직 집정관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전쟁터에서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물로 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배경은 무엇일까? 유언장을 작성할 당시 카이사르는 암살당하리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18세인 옥타비아누스가 정치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30세가 될 때까지 개혁을 단행하여 로마 세계를 반석 위에 올려 안정된 정치 체제를 만든 후 후계자로서 물려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카이사르는 누이의 외손자인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살았기에 성격과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는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을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그 후 곧 재혼했다. 로마에서는 재혼하면 자녀를 데리고 가지 않는 관례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와 함께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외할머니 율리아는 과부가 되자 친정으로 돌아와 카이사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렇게 해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옥타비아누스의 자질과 능력을 꿰뚫어본 카이사르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가 전쟁 수행 능력은 떨어지지만, 평화 시에 통치할 능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반대로 안토니우스는 전쟁 수행 능력은 있지만, 평화 시의 통치 능력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전쟁 수행 능력이 부족한 부분은 동갑내기인 군사적인 천재 아그리파를 붙여 보완하도록 했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아그리파와 함께 파르티아 원정군이 집결해 있는 그리스 아폴로니아로 보냈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없었다. 

 

한편 카이사르가 미리 유언장을 작성한 선견지명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최고 권력자로서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상황인데도 유언장을 남겨 후계자를 밝혀둔 것이다. 암살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 덕택에 14년간의 권력투쟁을 거쳐 훗날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으니, 카이사르의 안목이 돋보인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역사상 창업과 승계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이다. 창업자의 리더십과 수성자의 리더십은 다르다. 산에 오르는 리더십과 내려오는 리더십은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창업과 승계는 중요한 과제다. 우리가 2,000년 전의 로마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 역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시사점이 많은 까닭이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44년에 암살을 당해 55세로 삶을 마감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14년 동안 권력투쟁을 거쳐 기원전 27년에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어 서기 14년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활동하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기원전 57년,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국가가 세워졌다고 전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전쟁을 시작한 해가 기원전 58년, 루비콘 강을 건넌 해가 기원전 49년, 암살당한 것은 기원전 44년,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된 것은 기원전 27년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를 창건한 박혁거세와 주몽과 온조가 카이사르 및 아우구스투스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또 서로마가 쇠망하는 5세기는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만주벌판을 휘저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처럼 로마와 한반도를 비교해본다면 역사를 공부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더욱 배가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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