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0>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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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정해진 날짜 이전에 군대를 해산해야 한다. 만약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반역을 꾀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로마 근처에 있는 모든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전직 집정관은 공화국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기원전 49년 1월 7일에 발동된 ‘원로원 최종 결의’의 내용이다. 원로원 최종 결의는 국가가 긴급한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할 경우 공포되는 비상사태 선언이다. 비상사태는 오늘날 계엄령과 같은 것으로, 원로원의 최종 결의에 따르지 않는 자는 국가의 적인 반역자로 규정되어 재판도 받지 못하고 사형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당시 갈리아 총독인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반대파들이 칼을 빼든 것이다. 이미 카이사르의 후임도 결정되었다.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로마로 돌아와 직접 집정관 후보로 등록할 것을 명령했다. 카이사르가 명령에 복종하여 귀국하면 사실상 그에게는 사형선고였고, 귀국하지 않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반역자가 되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이사르는 병사들을 집합시켜 자신의 반대파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부당한 행위에 대해 낱낱이 설명했다. 카이사르가 『내전기』에서 원로원의 최종 결의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발동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카이사르의 명성을 지켜달라”고 호소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본인은 9년 동안 그대들의 총사령관이었다. 로마를 위한 그대들의 노고는 본인의 지휘와 하늘의 도움으로 빛나는 전과를 만들어냈다. 그대들은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전 지역을 평정했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카이사르의 명성을 지켜주고 적들의 공격을 물리쳐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연설을 마친 후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국경선인 루비콘 강을 건넜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루비콘 강을 건너는 순간, 카이사르의 운명과 함께 로마의 운명도 바뀌었다. 그가 결단을 내리기까지에는 많은 고뇌의 시간들이 있었다. 8년 동안 치른 갈리아전쟁은 이민족과의 싸움이었기에 명분이 있고 실리도 있었다.
그러나 루비콘 강을 건너는 순간 싸움의 대상은 동족이었고, 이는 내전을 의미한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어도 원로원의 허가가 없으면 국경인 북쪽의 루비콘 강과 남쪽의 브린디시에서 군대를 이끌고 국내에 들어올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카이사르가 칼을 겨누는 대상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의원들, 로마 병사들이었다. 폼페이우스는 3두정치를 이끌었던 정치적 파트너였고, 자신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사별하긴 했지만 한때 사위이기도 했다. 원로원 의원은 카이사르의 동료이며, 로마 병사들은 얼마 전까지 갈리아전쟁에서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부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공화정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국경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파는 로마를 빠져나가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그들을 추적하여 남쪽의 국경선인 브린디시까지 내려갔다. 원로원 의원들은 폼페이우스를 믿고 원로원 최종 결의를 내렸지만, 폼페이우스는 우왕좌왕하면서 카이사르에게 기선을 제압당했다. 이때 공화정의 신봉자인 카토는 시칠리아에서 군대를 모집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 군대가 시칠리아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폼페이우스에게 배신당했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폼페이우스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때에 불필요한 전쟁을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원로원의 여러 의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데도 전쟁 준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카이사르는 그리스의 디라키움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교묘한 철수 작전과 기발한 전략으로 기원전 48년 8월 9일,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의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폼페이우스군은 5만 4,000명인 반면 카이사르군은 2만 3,000명에 불과했다. 절반도 안 되는 전력으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내전은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쳤다. 이집트 왕의 고문들은 상륙 허가를 해주었으나, 한 로마인 변절자가 그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사흘 후 카이사르가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선물로 제시하자,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리면서 정중히 매장하도록 지시하고 살해 가담자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기원전 48년 가을,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머루를 때 이집트의 권좌는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이 쥐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매혹적인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 그녀에게 독단적으로 권좌를 돌려주었다. 남동생의 고문들은 국왕 군대를 동원하여 카이사르에게 도전했지만, 카이사르는 도착한 원군과 합류하여 이집트 군대를 격파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숱한 염문을 남긴 채 기원전 47년 봄,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떠났다.
카이사르는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지나 폰투스로 갔다. 그는 젤라(터키의 질레)에서 폰투스 왕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전투가 끝난 뒤 로마 원로원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고 간단히 보고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아프리카로 건너가 탑수스(오늘날의 튀니지)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류병들을 섬멸했다. 아프리카 탑수스에서 승리를 거둔 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로마에 도착한 후 오랫동안 기다려온 개선식을 거행했다.
개선식은 치렀으나 또 한 차례의 원정이 남아 있었다. 에스파냐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도피한 라비에누스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문다에서 폼페이우스파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했다. 문다 회전은 카이사르가 치렀던 가장 힘겨운 전투이자 마지막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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