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서른한 번째 이야기 누가 윤회하는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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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소중하잖은가?
“거꾸로 매달려도 살아있는 이승이 좋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생사를 거듭하며 12개의 고리로 된 윤회의 바퀴를 돌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소중하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붓다도 결코 이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붓다의 신도 가운데 빠세나디 왕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왕비 말리까와 나눈 대화의 결론을 갖고 붓다를 찾아왔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이었다. 이 말을 듣고 붓다는 이런 게송을 읊었다.
“마음으로 사방을 찾아보건만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자 볼 수 없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신이 사랑스러운 법.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
남을 해치지 말아야 하네.”
(말리까 경)
내가 고통의 바다를 헤매고 있다고 해서 내가 하찮은 존재인 건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을 한 번 돌아보라. 불과 수십 년 지탱하는 몸이지만 그 자체로 멋지고 훌륭하다. 인간이 온갖 지력을 동원해 만들어낸 그 어떤 기계보다 정교하고 섬세하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가? 비록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바둑을 지긴 했지만, 알파고를 만들어낸 건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이 점은 사람 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에 해당하는 원리이다. 우리가 하찮다고 여기는 개미 한 마리, 심지어 혐오하는 바퀴벌레 한 마리에까지도 이 원리는 적용된다.
불교가 가장 강조하는 덕목인 자비는 바로 이 원리에서 출발한다. 비록 중생이 가없는 윤회의 바다를 표류하는 존재들이지만,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훌륭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몸을 가진 모든 것들은 성스럽다. 그것들은 살기를 원하고, 세상의 어떤 존재도 그것들의 삶을 망가뜨릴 권리는 없다.
‘나’는 다섯 가지 무더기
‘나’가 소중한 이유는 내가 영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한 없이 덧없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나는 소중한 존재다. 그렇다. ‘나’는 덧없는 존재이다. 붓다가 그렇게 보았다. 영원한 ‘나’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붓다는 초기경전 곳곳에서 ‘나는 오온(五蘊)’이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했다.
오온은 ‘다섯 가지 무더기’라는 뜻이다. 다섯 가지가 합하여 ‘나’가 이루어지고 흩어져 ‘나’가 사라진다.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덧없는 존재이다. 몸은 물질이며 세상으로 통하는 감각기관을 갖는다. 마음은 느낌, 지각, 의도, 의식... 등 심리적 기능과 현상을 통틀어 그렇게 일컫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부품들을 조립해서
‘마차’라는 이름이 생기는 것처럼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다.”
(와지라 경)
뼈대와 바퀴와 말을 매는 끈과 마부가 앉는 의자... 이런 것들이 모여 마차가 되지만 마차를 해체해보면 부품만이 남을 뿐 어디에도 ‘마차’는 없다. 그렇게 ‘마차’는 이름뿐이다.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변하지 않는 ‘나’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름뿐이다.
붓다가 그렇게 ‘나’를 다섯 가지 무더기로 보라고 가르친 데에는 모종의 전략이 있다. ‘어디에도 내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전략이었다. ‘나’를 다섯 무더기로 해체해서 보면 다섯 무더기 하나하나가 모두 끊임없이 변화하며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즉 무상하다는 사실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섯 무더기에는 무상한 것만 존재할 뿐 ‘나’라고 할 만한 그 무엇도 없다. 이렇게 ‘내가 없다’는 ‘無我’의 원리는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의 하나가 되었다.
‘자아’가 윤회하지 않는다.
무속을 평생 연구했던 서정범 교수는 윤회에 대한 믿음이 무속인들에게 매우 일반적이라고 쓰고 있다. 사람에게 전생이 있고, 전생의 삶이 현생과, 현세의 삶이 내생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는 무속인들의 생각은 어쩌면 불교의 영향일 수 있다. 무속인말고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 설령 과거에 ‘나’가 살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나’가 나라는 근거 또한 없잖은가? 윤회가 ‘한 번 뿐인’ 인생의 연속이라면 구태어 ‘윤회’라고 부를 것도 없잖은가?
그렇다. 윤회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참 설명하기 어렵다. 초기경전 ‘미란다 팡하’의 비유를 참고해보자. 하나의 등불이 다른 등불에 불을 옮겨주고 기름이 다하여 꺼졌다. 이런 경우 불이 계속됐다고 볼 수 있는가? 등불은 꺼졌지만 불은 지속되는 것 아닌가? ‘나’는 조건이 되어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사라지는 다섯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하나의 등불이었다가 인연이 다하여 꺼지지만 불은 다른 등불에 옮겨 붙어 계속 타오르듯 윤회의 삶은 지속된다.
삶은 이어지지만, 그렇게 이어지는 삶의 주체는?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삶을 이해한다면, 이 원리는 우리의 일상의 삶에도 적용된다. 10년 전 ‘나’는 어디에 있는가? 10년 전 ‘내가 지니고 있던’ 몸은 ‘내 몸’인가?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모두 새 것으로 교체된다. 그렇다면 현재 내 몸은 과거 내 몸이 아니다.
마음 역시 격류처럼 끊임없이 흐른다. (데카르트주의자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강물은 흘러갔지만 어제의 강이 오늘의 강인 것은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다. 그처럼 어제의 나는 ‘편의상’ 오늘의 나라고 불리지만, 기름이 다하면 꺼지고 끊임없이 새로 켜지는 등불처럼, 삶이란 순간순간 꺼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 붙는 불과 같다.
윤회란 삶과 죽음을 이어가는 것을 일컫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찰라 찰라가 모두 윤회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없다고?”
영화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남의 꿈속에 들어가 꿈을 조작하고, 조작한 꿈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하려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꿈속에서는 시간이 더디 간다. 꿈속에서 흐른 며칠이 현실에서는 몇 분이다. 몇 겹 꿈속에 들어가 현실의 잠깐 동안 꿈속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현실로 돌아오기도 한다.
꿈, 꿈속의 꿈, 또 그 꿈속의 꿈... 꿈의 세계는 이렇게 다중적이지만 현실은 하나뿐이다. 주인공은 현실과 꿈을 구별하기 위해 팽이를 돌린다. 팽이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면 여전히 꿈속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이 돌린 팽이가 계속 돌아가는 장면을 클로즈업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실과 꿈의 구분 문제만이 아니라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나’ 가운데 누가 진짜 나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매일 밤 우리는 꿈을 꾸고 꿈속의 나는 현실의 나와 다른 삶을 산다.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장자 제물론의 ‘나비의 꿈’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장주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둘 다 ‘나’가 아니라는 대답을 내놓으면 문제가 깔끔하게 해소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불교의 입장을 그렇게 해석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없다’는 붓다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주의자처럼 ‘나’라는 정신적 실체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시대의 상식인들 대부분은 지금 여기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며 세계를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주체인 ‘나’가 어떻게 없겠느냐고 항변한다. 불교는 시간과 공간 안의 체험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체험의 주체인 ‘나’를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체험은 있어도 체험의 주체는 없다. 나는 없고 마음과 대상이 있을 뿐이다. 마음과 대상의 만남이 체험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일시적으로 조건이 맞아서 성립했다가 조건이 다하면 흩어지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내가 없어서 슬프다?
한 비구니 스님이 서럽게 울면서 사야도를 찾아왔다. “스님... (엉엉...) 내가 없어요... (엉엉...)” 수행처에서는 이런 일들이 이따금 일어난다고 한다. ‘무아’의 이치를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사건들이다. 그런데 ‘무아의 이치’를 체험하게 되면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서럽게 울어야할 일이 아니잖은가?
‘무아’를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우는 일은 없다. 하지만 체험으로 알게 되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사야도는 눈물이 나오는 것은 모하(무명 ;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무아를 체험했어도 모하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남은 모하가 사라지면 ‘무아’의 체험은 마음을 평온으로 이끈다.
사사나 스님의 법문에서 비슷한 체험을 들었다. 스님이 무아의 법을 체험하고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하릴 없이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다음날 사야도와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사야도가 먼저 말씀하셨다. “너, 어제 하루 종일 울었다며...?” 누군가 이 사건을 미리 사야도에게 귀뜸했던가 보다. 사야도는 어떤 처방을 내렸을까?..... “그건 ‘나’가 있어서 그런 거다.”
사야도의 답변이 그랬다고 한다.
무아의 법을 체험으로 안다고 해도 마음에 모하(어리석음)가 남아있기 마련이다. 철썩 같이 믿었던 ‘나’에게 배신을 당한 서러움이라고나 할까? 시작도 끝도 없이 ‘나’를 믿고, 섬기고, 의지하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 ‘나’가 없음을 체험으로 알게 되면 얼마나 황당할까!
무아를 체험했다고 해서 그동안 ‘나’를 섬기던 습성에서 곧바로 벗어나게 되지는 않은가 보다. ‘나’가 있다고 믿는 것은 모하 때문이어서 이 모하에서 벗어나면 무아를 체험하게 되겠지만, ‘나’에 집착해 온 습성을 단박 버리기란 쉽지 않겠구나, 하는 선에서 내 나름대로 이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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