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총수도 퇴직금을 받아야 하는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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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회계연도는 1년이다. 그러니 기업의 활동도 1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일이 많고, 기업을 감시하는 일을 하는 경제개혁연대도 1년마다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작년부터 그런 종류의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상장기업은 회계연도 마감 후 3개월 이내에 지난 1년간의 사업활동을 총 정리한 사업보고서를 공시해야 하는데, 연봉이 5억 원을 넘는 등기임원이 있는 경우에는 ‘임원 개인별로’ 그리고 ‘보수의 구성항목별로’ 그 세부 내역을 사업보고서에 기재하도록 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작년부터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다. 전체 등기임원의 보수총액만을 기재했기 때문에 ‘평균’은 알 수 있어도, 누가 얼마를 받았는지, 급여⋅상여⋅기타⋅스톡옵션⋅퇴직금 등 각 항목별로 얼마를 받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그 상세 내역이 공개된 것이다.
대부분의 상장기업이 시한인 3월 31일에 몰아서 사업보고서를 공시하기 때문에, 그 날부터 경제개혁연대의 상근 연구원들은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 작년에도 올해도 1,700개가 넘는 모든 상장기업 사업보고서의 관련 자료를 긁어모아 정리 분석한 보고서를 1주일 만에 발표했다.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이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그나마 우리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조금씩은 개선되고 있다고 감히 자부한다. 하나 더 자화자찬한다면, 개별보수 공시 제도 자체가 경제개혁연대의 10년에 걸친 끈질긴 입법운동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처음 문제제기했을 때는 ‘위화감 조성’, ‘프라이버시 침해’ 등의 논리로 반대하는 재계 측의 목소리가 높았는데, 법 시행 후 2년째인 지금은 기업들도 으레 치러야할 연례행사 중의 하나로 생각하게 된 듯하다. 과거로 돌아가는 거는 어차피 불가능하니까. 세상의 변화는 이처럼 더디게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누가 어떤 명목으로 얼마를 받는지를 왜 알아야 하는가.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 절대 아니다. 기업을 괴롭히기 위해 이 법을 만든 게 아니다. 개별보수 공개는 임원들의 인센티브 구조를 바로 잡기 위한 핵심적인 제도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보상을 주는 자에게 충성을 하기 마련이다.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총수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연봉이 결정된다면, 누구나 총수에게 절대 충성할 수밖에 없다. 총수가 배임⋅횡령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참고인으로 불려간 임원들이 버젓이 위증을 하고 심지어 증거를 인멸하기도 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렇게 해야 살아남고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된 인센티브 구조 하에서는 임원들이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총수의 사익을 위해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임원의 연봉을 개인별로 항목별로 공개함으로써 성과와 보상이 합리적으로 연동되어 있는지 평가를 받게 하자는 것이다. 강조하지만, 개별보수 공개 제도의 핵심 포인트는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과 절차의 합리성 여부다. 선진국들이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작년에 처음으로 공개된 개별보수 내역을 분석해보니 가관이었다. 전문경영인의 경우에도 많은 문제가 발견되었지만, 특히 총수의 연봉에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아무리 총수라지만 대표이사인 전문경영인보다 몇 배에 달하는 고액연봉을 받은 경우, 회사가 적자임에도 고액연봉을 받은 경우, 심지어 총수가 형사재판 중이거나 유죄판결로 수감되어 있음에도 고액연봉을 받은 경우가 있었다.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표 사례로 9개 그룹에서 각각 1개의 회사를 골라 이사회 의사록 열람을 청구하였다. 어떤 기준과 절차로 총수의 연봉이 결정되었는지를 확인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옛날 같으면 열람을 거부당하고 소송으로 갔을 텐데, 그래도 세상이 조금은 변했는지 9개 회사 모두가 이사회 의사록을 보여주었다. 이건 긍정적이다. 그런데 내용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사회 의사록에 “임원보수규정에 따름”이라는 문구 이외에는 아무 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 임원보수규정은 어떻게 정하냐고 물어보았더니, 대표이사에게 위임한단다. 한 마디로, 총수 연봉을 총수 자신이 결정한 셈이다.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진 근본 원인은 재벌의 후진적 지배구조 탓이지만, 금융감독당국이 제시한 공시 서식의 허술함도 한몫 거들었다. 재차 강조하지만, 핵심 포인트는 임원 보수 결정의 기준과 절차인데, 공시 서식에 그걸 기재하는 항목이 빠진 것이다. 모르고 그런 건지, 알고도 그런 건지…. 당연히 거센 비판 여론이 일었고, 올해 초에 기준과 절차 항목을 추가한 새로운 공시 서식이 제시되었다.
개정된 서식에 따라 올 3월에 공시된 개별임원 보수 내역을 분석해보니, 작년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러 문제점이 포착되었다. 기준과 절차를 쓰라고 하니 쓰기는 했으나, 안 쓴 것과 진배없는 회사들이 많았다. 세부적으로 보면, 회사 실적이 악화되었음에도 임원 보수가 큰 폭으로 상승한 경우, 총수가 비상근 임원임에도 고액연봉을 받은 경우, 그리고 총수가 임원직을 사퇴하면서 상식을 넘는 거액의 퇴직금을 받은 경우 등이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그래서 또다시 대표 사례로 10개 그룹의 10개 회사를 골라 이사회 의사록 열람을 청구하였다. 법제도적 틀과 현실의 관행이 상식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개선될 때까지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이어갈 생각이다. 이게 세상을 바꾸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더디다고 답답해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게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내 생각은 그렇다.
마지막으로, 개별임원 보수 공시 제도의 개선 대책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기로 한다. 먼저, 임원의 성과를 측정하고 보수로 연동시키는 ‘기준’, 그리고 그 기준을 만들고 집행하는 ‘절차’를 보다 구체화해야 한다. 외부 주주가 그 합리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수준으로까지 구체화해야 한다. 재삼 강조하지만, 이게 핵심이다.
또한, 현행 제도는 ‘등기’임원만을 공시대상으로 하는데, 그러니까 총수가 등기이사직을 사퇴함으로써 빠져나가는 경우도 나타났다. 책임경영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모든 ‘미등기’임원을 공시대상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보수를 가장 많이 받는 3~5인의 미등기임원은 공시대상에 포함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공시 기준선도 현 5억 원 이상에서 3억 원 이상으로 낮출 필요가 있다.
한편, 올해 분석 보고서를 내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점으로 느꼈던 것 중의 하나가 총수의 퇴직금이다. 총수가 확정 유죄판결을 받거나 또는 합병으로 회사가 소멸했거나 또는 그 어떤 사유로든 임원직을 사퇴하면서 수십억 원의, 심지어는 1백억 원을 넘는 퇴직금을 챙기는 경우가 있었다. 법정 퇴직금 제도가 적용되는 일반 직원들은 근속연수 1년당 1개월치 월급의 퇴직금을 받는데, 임원은 그 3배인 1년당 3개월치 월급의 자체 임원퇴직금 규정을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리 목숨인 임원의 운명을 감안하면 크게 문제 삼을 건 아니다.
그런데 총수도 그런가?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총수는 절대 잘리지 않는다. 그런 총수가 유죄판결을 받거나 회사를 합병해서 어쩔 수 없이 임원직을 사퇴했는데, 근속연수 1년당 3개월치의 퇴직금을 챙기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3개월치도 아닌 그 몇 배에 달하는 특혜 규정을 적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 아니다.
총수는 퇴직 후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일반 직원이나 전문경영인 임원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을 ‘오너’라고 부르지 않는가. 주주, 특히 최대주주는 여타의 이해관계자들이 자기 몫을 다 가져간 다음에 남는 것을 가지는 ‘잔여청구권자’(residual claimant)다. 총수가 아무리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총수에게 퇴직금을 지급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임원퇴직금 규정을 개정해서 총수는 지급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내 생각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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