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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2> 군인황제시대 50년의 위기(서기 235~284)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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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8월01일 16시30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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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자고 나면 황제가 바뀐다.” 

당시에 숨 가쁠 정도로 자주 바뀌는 황제 자리를 놓고 생겨난 말이다. 카라칼라 황제가 살해된 후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드로스가 서기 235년 살해당함에 따라 군인황제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50년 동안에 26명의 황제가 교체되었고, 대부분의 황제들이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 

로마제국의 3세기는 무정부 상태였다. 군인황제들이 재임하다 암살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흔들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정국 불안정이었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이 기간을 무정부 상태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국경 지대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동시 다발로 이루어졌고, 세력을 회복한 페르시아의 사산왕국과 재앙에 가까운 전쟁을 벌였으며, 무수한 로마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속주들이 이탈한 데다, 20인 이상의 황제들이 폭력에 의해 급사했으며,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다.”

로마제국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위기의 늪에 빠져들었다. 군인황제시대가 지속됨에 따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은 하나뿐이었다. “군대를 호령할 수 있어야 하고, 충성하는 군대에게 물질적으로 보상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황제가 자주 바뀐 이유 역시 물질적 보상에 대한 불만이 쌓였기 때문이다. 

 

정국이 불안하고 민심이 사나워지자, 외적들이 동쪽과 북쪽 국경 지역에 빈번하게 쳐들어왔다. 이때 로마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이 벌어졌다. 페르시아 사산왕조(오늘날의 이란)의 샤푸르 1세 왕이 서기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로로 잡는 기막힌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샤푸르 왕은 과거 페르시아의 전성시대를 복원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4세기에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서기 226년까지 외국 왕조가 페르시아를 다스리다가 사산왕조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샤푸르 왕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꿈을 가졌다. 이 꿈을 실현하려면 로마제국과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었다.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은 모두 과거에 페르시아가 지배했던 땅이었기 때문이다. 

샤푸르 왕은 먼저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하여 시리아의 도시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샤푸르 왕과 전면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본거지를 두고 페르시아군과 맞설 계획을 세웠다. 이곳에는 난공불락의 지역으로 알려진 에데사 요새가 있었다. 이바르 리스너는 『로마 황제의 발견』에서 이때의 상황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샤푸르 왕은 자신의 아들 호르미즈드를 유프라테스 강으로 진군시켰다. 페르시아군은 두라 에우로포스에서 돌파에 성공했다. 이 시기에 발생한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과 흑사병이 로마에 재앙을 몰고 왔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군영에도 흑사병이 퍼졌다. 늙은 황제가 밤낮으로 하늘을 노하게 만든 로마의 실책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동안에 군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의 목을 조르듯 수천 명씩 죽어나갔다. 좌절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신들이 기독교들의 불경에 화가 나서 흑사병과 페르시아인들을 보낸다고 믿었다. 이 줏대 없는 노인은 곳곳에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페르시아인들을 막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푸르 왕이 에데사 앞에 나타났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굶주림과 흑사병으로 전의를 상실한 군대를 이끌고 자신도 없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황제는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스스로 힘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래서 평화협정을 맺으려 했다. 영악한 샤푸르 왕은 협상을 계속해서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협상에 임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황제가 직접 협상장에 나올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회담장에 나온 발레리아누스는 생포되고 말았다. 

샤푸르 왕은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대했다. 황제의 망토를 입히고 쇠사슬을 채운 채 황제를 대중 앞에 끌어내어 창피를 주거나 산책을 시켰다. 왕이 말을 탈 때 황제를 엎드리게 한 다음 그의 등을 밟고 올랐다고도 한다. 심지어 황제가 죽자 박제로 만들어서 붉게 칠하여 로마의 영원한 수치로 전시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 황제가 포로가 된 후 단독 황제가 되어 샤푸르 왕이 소아시아까지 진출하는 것을 저지했다. 샤푸르 왕은 후퇴하는 길에 로마의 피보호인이었던 시리아의 사막에 있는 팔미라의 추장 오데나투스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고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되었다. 

갈리에누스는 죽기 전에 제국이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개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놓았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개혁을 추진한 목적은 중앙정부의 기강을 강화함으로써 군대의 기강을 바로세우고, 제위 찬탈자의 등장을 예방하는 일이었다. 

 

그가 취한 행정 개혁은 원로원 의원을 모든 군 고위 지휘관직에서 배제하고, 역량을 검증받은 기사 신분의 지휘관을 기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권력 찬탈을 노리는 원로원 출신 지휘관들의 반란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직업 장교들을 적절히 공급하여 군대의 기강을 확립하고 군대의 효율성을 높이는 효과도 노렸다. 이처럼 개혁을 추진한 그였지만, 결국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군인황제시대는 서기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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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8월01일 16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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