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1> 모든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다 (서기 211~217)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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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간에 서로 뭉치고, 군인들을 후대하고, 나머지에게는 매섭게 대하라.”
서기 211년, 아프리카 출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기 직전에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며 간절한 소망이었다. 황제는 두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공동 황위를 공평하게 물려주었다. 카라칼라 공중목욕탕을 지은 것으로 잘 알려진 형 카라칼라는 유럽과 서아프리카를 다스리고, 동생 게타는 아시아와 이집트를 맡기로 했다.
이바르 리서너는 『로마 황제의 발견』에서 동생의 암살 과정과 그 영향에 대해 상세히 묘사했다. 두 황제는 로마에 살면서 황궁도 정확히 둘로 나누어 생활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항상 호위병을 대동하고 다녔다. 두 형제는 어머니가 있을 때나 공식 행사 외에는 한자리에 같이 있는 법이 없었다. 둘이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누군가 한 사람은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었다.
어느 날, 카라칼라는 어머니를 찾아가 “형으로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싶으니 아우를 불러달라”고 간청했다. 게타는 형의 말을 믿고 호위병을 물리치고 혼자서 어머니에게 갔다. 이때 매복해 있던 형의 부하들이 달려들어 살해했다. 동생의 살해 현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게타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훗날 카라칼라라 불린 형 비시아누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게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어머니의 품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다.”
형의 이름은 원래 비시아누스였는데 카라칼라로 불리었다. 카라칼라는 그가 즐겨 입던 긴 갈리아 망토에서 유래되어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동생이 살해된 사건을 놓고 군인들 사이에서 퍼져가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50%나 인상해주었다.
212년 카라칼라는 “모든 속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하여 로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카라칼라는 사람들의 주의를 돌릴 만한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했고, 모든 속주민의 로마 시민화라는 극약 처방을 내놓았다. 대외적으로는 인도주의적이고 카이사르가 생각했던 대로마제국의 실현이었다. 또한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오직 시민만이 상속세와 노예 해방 수수료를 내기 때문이다. 시민 인구의 증가는 세수 확대를 뜻하므로 재정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속주민들은 그렇게 바라던 시민권을 손에 넣었으니 처음에는 환영했다. 하지만 희소성이 없어진 시민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치가 떨어지고 말았다. 속주민이 로마 시민권을 얻으려면 군단의 보조병으로 25년간 근무해야 했다. 그 시민권은 자녀에게 세습이 되기 때문에 보조병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힘들게 취득하던 시민권을 누구나 가질 수 있게 했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 칙령으로 시민권은 노력해서 얻는 ‘취득권’이 아니라 공짜로 주어지는 ‘기득권’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카라칼라 칙령 이전에 로마 시민권은 본토인에겐 기득권이었지만 속주민에겐 취득권이었다. “누구나 갖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기존에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시민들도 시민권에 대한 자긍심이 사라졌다.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로마가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데는 ‘시민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민권을 가지면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투표권, 공직 출마권, 고문받지 않을 권리, 재판 청구권, 소득의 10%인 속주세 면제권 등의 특권이 생겼다. 그래서 로마는 일부 속주민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속주 지도층이나 큰 공적을 세운 자, 장기 복무를 마친 속주 출신 군인·의사·교사, 로마제국 고위층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해방노예 등이 시민권을 어렵게 얻은 사람들이다. 취득권으로 얻게 된 시민권 정책이 가져온 효과는 놀라웠다. 국가의 책무인 인프라, 교육 등을 속주 출신 시민이 분담한 까닭에 로마는 최소의 비용으로 제국을 운영하면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속주의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인재 배출의 통로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속주화에 반발하는 이민족을 무마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카라칼라의 인기 영합주의는 곧바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경제에는 공짜가 없으니, 먼저 재정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속주민은 10%의 속주세를 부담했다. 이 세금을 내지 않으니 재정 압박이 심해졌다. 물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상속세와 노예 해방세를 부담하지만, 재정이 안정적으로 확충되지 못해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반면에 세원이 확실한 속주세를 걷지 못하니 재정이 악화되었고, 막대한 군사비 충당을 위해 특별세가 남발되니 사회 불만이 커졌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로마군은 정규군 15만 명, 보조병 15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민권을 획득한 속주민이 굳이 보조병으로 근무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부터 넓어진 방어선에 징병 자원이 줄어들어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200년 동안 방위 전략으로 정착된 군사 시스템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로마 시민의 사회공헌 활동도 자취를 감추었다. 시민권 취득의 매력이 사라져버린 군인·의사·교사에 대한 지망자는 급격히 감소했다. 로마 사회의 장점인 계급 간 유동성이 사라지고 하층, 노예의 신분 상승 기회가 차단됐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공포정치를 일삼던 카라칼라 역시 서기 217년 근위대장의 사주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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