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6> 폭군의 대명사가 된 네로(서기 64~68)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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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에게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발생했다. 서기 64년 7월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다. 대경기장 관중석 밑의 가게에서 불이 발화되어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으로 번졌다. 로마의 14개 행정구 가운데 3개 행정구가 모두 타버리고, 7개 행정구는 절반 정도 타버리는 피해를 입었다. 네로는 이재민의 주택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동시에 자신의 궁전을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 궁전)’라고 명명하고 재건을 추진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대화재로 전소한 지역이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 예정지와 거의 일치한 까닭이다. 시민들 사이에 네로가 궁전을 짓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불길처럼 퍼졌다. 타키투스가 전하는 소문의 내용이다.
“수도가 한창 불타고 있을 때 네로가 대저택 내의 사설 무대에 올라서서 눈앞의 화재를 구경하면서, 이것을 태곳적의 불행과 비교하며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하고 있었다.”
27세의 젊은 네로는 시민들의 반감과 적개심에 무척 당황했다. 이 소문을 진화하지 않으면 자신이 화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네로는 희생양을 찾았다. 마침내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이라고 지목했다.
기독교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은 대화재 때 절반 정도 불탔지만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미사 양식이 증오심에 기름을 부었다. 미사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제공되는데,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의미한다. 그런데 로마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인들이 인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퍼져나가 야만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또한 당시에 기독교인들의 숫자도 많지 않아 영향력이 약한 까닭에 방화죄를 뒤집어씌우기에 적합한 상대였다.
네로는 기독교도들을 ‘방화죄 및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 등으로 체포하여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네로는 이들을 단순히 처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경거리로 삼아 시민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 했다. 일부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하고, 일부는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 씌워 들개 떼에게 물려 죽도록 했다. 일부는 밤의 구경거리로 남겨져, 땅에 말뚝을 박고 한 사람씩 산 채로 불을 붙여 처형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의 잔혹한 죽음은 네로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은 더욱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것이다. 타키투스가 기록한 내용이다. “기독교인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해도, 처형 방식의 잔혹함은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가슴을 동정심으로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기독교도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서기 65년에 피소의 황제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다. 피소와 네로와 가까운 사람들이 음모에 가담하여 측근에서 네로를 암살할 계획이었다. 이때 세네카도 가담자로 몰려 죽음을 맞았다. 피소의 음모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네로는 더욱 마음을 닫고 의심이 나면 처형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서기 66년, 네로는 가수로서의 역량을 시험하고 과시하기 위해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3명의 사령관을 그리스로 불러들였다. 라인 강 방위선을 책임지고 있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과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을 맡고 있는 스크리보니우스 형제였다. 또 한 사람은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유프라테스 강 방위선을 지키고 있는 코르불로였다.
네로는 이들에게 죽음을 통고하여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군대에서 존경받는 베테랑 장수 3명을 확실한 증거도 없이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네로는 3명의 사령관을 명분 없이 죽임으로써 로마군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에스파냐 갈바 총독이 네로를 반대하며 나섰다. 그는 “속주 총독은 황제가 아니라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선언하면서 에스파냐에서 1개 군단을 새로 편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식량 문제에 불만을 품고 네로에게 등을 돌렸다. 갈바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원로원과 시민은 갈바를 지지하는 쪽으로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네로가 믿었던 근위대장 티겔리누스도 도망쳐버렸다. 급기야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다. 근위대 역시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사람이 네로를 떠나가고 4명의 하인만이 곁에 있었다. 네로는 하인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교외의 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인 내가 죽는구나!”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서기 68년, 5대 황제 네로는 초라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다.
네로의 죽음은 아우구스투스를 시조로 하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몰락을 의미한다. 하지만 로마의 제정은 세습제가 아니라, 원로원과 시민이라는 견제 기능이 있었다. 로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황제의 실정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로마인은 실력을 중시했다. 황제에게 절대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만, 그 권력은 실력이 있을 때 유효했다.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권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네로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로원에서 권력 위임을 철회하고 군단에서 충성 서약을 거부하면 어제의 황제도 보통 시민이 되고 마는 것이다.<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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