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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35> 처음에 선정을 베푼 네로(서기 54~64)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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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6월14일 17시30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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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파괴자” “세상의 독” “사악한 인간”.

폭군 네로에게 붙여진 수식어다. 5대 황제 네로는 천년제국 로마에서 이름이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몰라도 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까. 

서기 54년에 황제로 즉위했을 때 네로의 나이는 16세였다. 철부지에 불과했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전임 클라우디우스 황제 체제에서 해방노예들이 설치는 모습에 신물을 느낀 나머지, 비서관 정치가 폐지되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환갑이 넘은 역사가 출신의 황제는 무미건조하고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발랄한 10대 소년의 등장은 신선한 느낌을 주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3대 칼리굴라 황제가 젊음을 무기로 티베리우스 황제 사후에 등장할 때와 비슷했다. 

 

네로가 황제가 된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아그리파나의 야망과 집념이 낳은 결과였다. 아그리피나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때 겨우 3살이었다. 그녀는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미움을 사 판다타리아 섬에 유배되었지만, 친오빠인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비로소 운이 트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광기 어린 젊은 황제의 의심을 사서 폰티아이 섬에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권력의 희생양이 된 그녀는 역설적으로 권력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반드시 권력을 움켜쥐어야 한다”는 목표와 집념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가 되어 네로를 황제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아그리피나는 아들을 위한 교육에도 주도면밀하게 대응했다. 제왕 교육을 위해 유명한 철학자를 선생으로 모셔야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로마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세네카였다.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미음을 받아 코르시카 섬으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아그리피나는 황제를 설득하여 세네카에게 추방 해제령을 내리도록 하여 자유롭게 만든 후 아들의 스승으로 모셔와 제왕 교육을 시켰다. 

 

세네카는 네로 황제를 도와 출범 초기 5년 동안 선정을 베푸는 데 기여했다. 네로의 연설은 세네카의 도움으로 원로원의 큰 호응을 얻어냈다. 또한 정부를 매우 안정되게 운영할 수 있었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황제가 된 후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고 전한다. “나는 통치권을 아무 탈 없이 행사하는 데 필요한 훌륭한 조언자와 모범적인 인물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서기 59년, 네로가 어머니를 살해한 후부터 폭정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이후 3년 동안 세네카는 폭군을 선도하려는 이상과 폭군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부단히 갈등했다. 서기 62년에 세네카는 은퇴를 결심하고, 네로의 반대를 무릅쓰고 64년부터는 궁정에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다. 이런 행동에 의심을 품었던 네로는 서기 65년에 발각된 암살 음모에 세네카의 조카인 루카누스가 연루되자, 세네카와 그의 가족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세네카는 위대한 철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 『인생이 왜 짧은가』에서 “적절한 시기에 죽음을 택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권리”라고 했다. 그는 “현자는 자신의 생명이 지속 가능한 시간까지가 아니라 자기가 생존하려고 할 때까지만 생존하는 것”이라며 자살을 자유로 통하는 통로라고 변호했다. 네로 황제에게 자살을 명령받은 그는 그의 말처럼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네로는 어머니를 암살하고 세네카가 떠난 후로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굴러가기 시작했다. 네로는 원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시나 음악을 즐기며 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이제 옆에서 충고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마침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평소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서 “네로의 주된 성격적 특징은 인기에 대한 억누르기 힘든 욕망과 어떤 식으로든 대중의 눈을 사로잡은 사람들에 대한 불타는 질투”라고 설명했다. 네로는 스스로를 황제라기보다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대중의 환호와 애정을 먹고사는 대중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는 원로원이나 민중 앞에서 연설할 때 시를 인용하고 시적인 운율을 구사했으며, 세네카의 도움으로 알찬 연설문을 만들어 박수갈채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네로는 대중 앞에서 직접 류트나 리라 같은 악기를 켜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환호하는 군중의 박수 소리에 만족하면서 거액의 돈을 뿌렸다. 원로원은 이를 황제답지 못한 경박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타키투스는 “네로의 목소리나 시의 수준은 형편없었으나, 청중은 황제의 무력과 돈 때문에 마지못해 환호를 보내곤 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황제의 이런 전시성 행사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서기 60년, 그리스의 올림픽을 모방하여 ‘네로 제전’ 축제를 5년에 한 번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점점 기간을 좁혀 결국 연중행사가 되었다. 전차 경주와 검투사 경기 등에 이어 시와 리라를 연주하고 웅변 등의 경연이 벌어졌는데. 이들 종목에서는 언제나 네로가 직접 출전했다. 물론 우승은 항상 네로의 몫이었다. 

 

네로는 이 축제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시민에게 뿌렸다. 축제 기간 중 누구나 자유롭게 목욕탕과 음악당을 사용하게 했고, 많은 경기장과 극장을 새로 지어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오락을 서민들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태도를 보고 원로원과 귀족들은 ‘철부지 황제’라며 싫어했지만, 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가장 큰 적대국은 동방의 파르티아였다. 네로는 유능한 장수인 코르불로를 동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파르티아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파르티아 왕자 티리다테스를 로마로 초대하여 양국 사이에 평화가 이어지게 했다. 파르티아에서는 네로에게 큰 호감을 품은 나머지 네로가 죽은 뒤에도 그에게 경의를 표시했을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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