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번 타자에 딱 알맞은 티베리우스(서기 14~37)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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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로마제국은 티베리우스의 통치를 거치면서 반석처럼 견고해진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7권을 이렇게 시작했다.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초창기 3세대가 절묘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다한 덕택이다. 3대에 걸쳐 설계되고 구축된 로마제국은 이후 안전 궤도를 달리는 기차처럼 굴러갈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역할은 수리하고 유지 보수하는 일이다. 그는 3번 타자에 적합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는 경제와 사회 정책을 탁월하게 집행하여 로마를 안정 궤도에 올려놓았다. 나아가 인사관리를 비롯한 나머지 정책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첫째, 탁월한 인사 능력이다.
티베리우스는 인사에 관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사람을 발탁하고 활용했다. 군단장에는 군사 능력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고, 행정관에는 행정 능력이 우수한 사람을 발탁했다. 속주 총독에는 공화정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을 등용했다. 속주 출신이라도 로마 시민이 된 이상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를 싫어한 역사가 타키투스조차도 “어떤 황제라도 티베리우스만큼 교묘하게 인선을 해낼 수는 없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에게 엄격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기 25년 원로원에서 티베리우스의 업적을 찬양하여 신전을 세우자고 했을 때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후세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내가 한 일이 조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는가? 원로원 의원 여러분의 입장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제국의 평화 유지에 공헌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해낸 것도 후세는 평가해줄까?”
둘째, 카프리 섬의 은둔 정치를 시작했다.
티베리우스는 형식을 중시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서기 27년, 티베리우스는 근위대장인 세야누스에게 권력의 많은 부분을 위임하고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에 은둔한다. 그가 은둔한 이유는 가족 간의 불화로 인한 불편한 마음, 원로원에 대한 실망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타키투스는 “잔인하고 방탕한 본성을 숨기기 위해, 늙은 외견상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여, 그의 어머니의 오만한 기질이 싫어서” 은둔했다고 설명한다.
은둔했다고 해서 정치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측근 정치를 하고, 필요할 때는 서신을 통해 통치를 했다. 로마는 당시 로마가도가 발달하여 정보 수집이 가능했고, 명령 전달 체계가 확립되어 있어서 별문제가 없었다.
그가 은둔한 직후, 큰 사건이 2건이나 발생했다. 로마 근교의 경기장이 붕괴되어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과 로마의 일곱 언덕의 하나인 첼리오 언덕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사태를 성공적으로 수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대형 사고를 원만하게 수습한 티베리우스는 은둔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은둔을 계속하면서 근위대장인 세야누스의 측근 정치가 지속되었다. 서기 29년에는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도 티베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오지 않고 편지 한 통을 원로원에 보냈다. 편지에는 고인의 장례식을 검소하게 치르고, 사후에 주어지는 많은 명예도 가능하면 줄이며, 특히 어머니를 신격화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인 아그리피나 일파를 소탕하도록 명령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성격인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제국의 창시자인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직접 이어받은 외손녀다. 피를 물려받지 않은 티베리우스는 찬탈자다. 뿐만 아니라 피소를 시켜서 남편인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살인 교사범이다.”
티베리우스는 틈만 나면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내세워 주제넘게 나서는 아그리피나를 싫어했다. 그동안의 분노가 쌓인 황제는 세야누스를 통해 아그리피나 가족을 국가반역죄와 간통죄로 처벌할 것을 지시했다. 아그리피나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씩 배제되었다. 공포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서기 29년, 아그리피나 모자에게 유배형이 확정되었다. 아그리피나는 판다타리아 섬(오늘날 벤토테네), 아들 네로 카이사르는 폰티아이 섬(오늘날 폰차)에 각각 유배되었다.
서기 31년,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다. 세야누스의 권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고 후계자의 욕심까지 생긴 것을 안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제거하고 사형에 처했다.
티베리우스는 승계를 염두에 두고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훗날 칼리굴라 황제)를 카프리 섬에서 함께 살도록 했다. 세야누스의 궁중 음모 전략에 걸리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타키투스는 “가이우스가 티베리우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면서 영악하게 행동했다”고 평가하면서 “가이우스만큼 훌륭한 노예도 없었지만, 그만큼 무서운 주인도 없었다”는 말이 생겼다고 소개했다.
티베리우스는 서기 37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그는 원로원이 자신에게 주려고 했던 많은 칭호와 명예를 사양하는 겸손함을 지녔다. 자신에 대한 비난 연설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청의 자세를 보임으로써 공화정과 민주 원리를 존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들로 국가 재정을 풍요롭게 하여 후임자에게 물려주었다. 몸젠은 “티베리우스는 로마가 가졌던 가장 훌륭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반대자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제거, 궁정 음모 사건, 측근 세야누스의 권력 남용, 카프리 섬 은둔 기간에 나돌던 무절제한 성적 타락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 등으로 인해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 등 고대 역사가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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