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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32>죽음까지 철저히 준비한 사람(서기 14)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5월24일 14시27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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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죽을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1년 전부터 죽음을 예감하고 준비했다. 그중에서도 후계자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최고 통수권을 주어 공동 통치자가 되도록 했다.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내전의 위험이 따른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로마가 14년 동안 후유증을 앓았듯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공동 통치자인 티베리우스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권을 부여하여 후계 구도를 성립했다.

 

서기 14년 초,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후세에 남기고 싶은 내용을 담은 『업적록』도 마무리했다. 『업적록』은 역사가 몸젠이 ‘비문들 중의 여왕’이라고 명명할 만큼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사료다. 꼼꼼한 성격의 아우구스투스답게 장례식 절차에 대한 내용도 문서로 만들어놓았고, 후계자 지명을 포함한 유언장 역시 완성된 상태였다. 준비된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그리고 서기 14년 8월 19일, 이탈리아 남부 작은 도시 놀라(Nola)에서 76세의 나이로 평온한 죽음을 맞았다. 허약한 체질의 아우구스투스가 76세까지 장수한 것은 로마제국의 축복이었다. 장수한 덕택에 로마의 시스템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제국 통치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그는 장례식을 소박하게 치러달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여제사장에게 맡겨진 유언장이 원로원에서 개봉되었다.

 

유언장에는 군사력과 세금을 비롯하여 제국 전체의 현재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과 군단 주둔지,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 총액, 각종 간접세 중에서 아직 납부되지 않은 액수까지 적혀 있다. 심지어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물어볼 수 있는 담당자 이름까지 기록해놓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 유언장에도 그대로 묻어난 것이다.

 

티베리우스의 이름은 상속인 가운데 맨 위에 적혀 있었다. 티베리우스에게는 유산의 3분의 2를 주고, 나머지 3분의 1은 아내 리비아에게 주었다. 상속 서열 2위는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 그리고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수도의 모든 시민들에게 총액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 밖에 근위대 병사, 수도 경찰의 경찰관, 군단병 개인에게 지급하는 액수를 정하고 유증했다. 또한 유언장에는 지금까지 기증받은 액수가 14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되지만 국민과 국가를 위해 다 써버리고 현재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유배된 딸과 손녀는 영묘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며 유언장을 마무리했다.

 

공화정을 사실상 폐지하고 로마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다. 에드워드 기번은 “공화정시대는 존경할 만하지만 제정시대에 접어들자마자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토인비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은 로마의 쇠망을 늦추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6권에서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성자필쇠(盛者必衰)는 역사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설령 토인비의 말이 옳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늦춘 세월이 수백 년에 이르렀다면 만족할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역사가들이 제정 로마를 멸시하는 이유로 자유가 사라진 점을 드는데, 그 자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국경을 결정하는 자유다. 그렇다면 공화정시대의 로마에서는 누구나 이런 자유를 누리고 있었을까? 공화정 로마의 정치체제는 아테네와 같은 직접민주정이 아니었다. 민회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원로원이 국정을 결정하는 소수 지도 체제였다. 역사상으로는 과두정이라고 부른다. 술라의 개혁 이전에는 300명, 이후에는 600명의 원로원 의원만이 국정을 결정할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셈이다. 제정시대에 이 자유를 잃은 것은 이 600명뿐이다. 로마제국의 전체 인구는 6천만 명이었다.”

 

공화정 체제와 제정 체제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다. 공화주의자였던 타키투스는 “최악의 공화정이 최선의 제정(帝政)보다 낫다”며 공화정을 극찬했다. 그러나 “속주에서는 제정에 대한 평판이 더 좋았다”고 평가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임종 때 자기 친구들에게 그리스 희곡의 대사를 인용하여 “어떤가, 내 배역을 잘 수행했지? 그렇다면 박수를 쳐서 나를 무대에서 내려오게 해주게”라고 말하면서 평온하고 유쾌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종합적인 평가를 내린다.

 

“아우구스투스는 40년의 재위 기간 중 로마 사회의 모든 구석에 미치는 개혁들을 단행했다. 조급하게 많은 것을 이루려고 덤비지 않고 점진적인 조치와 선례에 입각한 체계적인 작업에 의해 개혁에 성공했다. 복합적인 행정 체계를 만들어 역동적인 조직문화를 구축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옛 귀족들을 만족시킬 만한 최상급 신분의 지위들을 많이 만들어 원로원 의원들을 인재로 활용했다. 경제계 인사인 기사 계급을 실세의 지위들로 끌어들여 체제의 충직한 집단으로 만들었고, 신인들로서 원로원 신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노예도 해방노예로 신분 변화의 기회를 열어주어 전문화해가던 행정 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신분 상승을 기대할 수 있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을 존중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관리했다. 그가 후계 시스템을 원수정 체제로 만든 이유도 바로 원로원과 시민을 존중하면서 통치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자신이 솔선수범하면서 후계자들이 실천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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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24일 14시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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