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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86>폭설로 인적이 끊긴 절에서 노스님과 단둘이 먹은 소박한 절밥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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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12월28일 16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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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절간에 머물면서 만나게 되는 침묵을 좋아한다. 말이 사라진 대웅전 빈 뜨락을 거닐거나, 옛 고승들의 부도 앞을 지날 때, 그리고 이따금 마주치는 스님들과 합장으로 지나칠 때, 또한 그리고 밤 두시나 세 시 요사채에 누워 카프카를 읽을 때, 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들을 바라보며 해우소에 갈 때, 은하수를 볼 때, 나는 모처럼 청신한 내 말들을 만난다. 일상생활 속에 허우적이며 사느라고 너무나 쓰잘 데 없는 말의 쓰레기 속에 묻혀 살다가 이런 침묵을 만나게 되면 가슴 속까지, 머릿속까지 깨끗해진다.

                                                                           

나는 시인으로 50 여 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14권의 창작 시집을 펴냈다. 그런데, 내가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펴낸 시집들, 가령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2005),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2007),『굴참나무 숲에서』(2012)와 같은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상당수가 절에 머물며 쓰여졌고, 그곳에서의 체험을 모티프로 한 시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시인으로서 나는 스님들의 정진 공간에 내가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준 스님들께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다. 함평 용천사, 지리산 금대암, 가평 현등사, 파주 보광사, 그리고 인제 백담사의 만해마을, 이 곳들이 내게 머물 곳을 마련해주고 공양을 베풀어준 고마운 절들이었다.

868c26ddb786d482f4fdd3a7fe1f5e06_1733714<사진; 함평 용천사>

 나는 절에서 만나게 되는 이 철저한 침묵을 좋아한다. 절간의 깊은 정적 속에서 어쩌다 만나게 되는 저 태허의 세계, 절대 무의 여백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물들과 그것들이 언뜻 언뜻 스쳐 보여주는 직관과 영감이야말로 시인인 내가 너무나 목마르게 찾아 헤매는 시의 궁극이다. 절간에서는 가급적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절간에서의 삶은 원래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에 머물면서 하루에 한 열 마디쯤, 합쳐서 단 2, 3분 정도의 말을 하게 될까. 그것도 새나 나무나 산골짜기와 나누는 독백의 말이 거의 전부이다.

 

 우리나라의 절은 대부분 산에 있고, 그것도 명승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명승이 인간의 마을 가까이 있을 리 없으니 대개가 깊은 산 속, 전망 좋은 벼랑 위 앞이 툭 트인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산으로 오르는 먼 길에 눈이 쌓이면 절간은 절해고도처럼 인간세상과 격리된 채, 절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나는 절해고도처럼 격리된 절간에 신세를 지면서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고 화집들을 펼친다.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깬다. 그리고, 진심의 말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말이 차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절은 보이지 않는 제도가 엄격히 지켜지는 곳이다. 절에 머물며 숲 속을 헤매고 다니든, 잠을 자든,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마음대로이지만 하루 세끼 공양시간만은 엄격히 지켜야한다 아침 7시, 점심 12시, 저녁 5시-거의 정확하게 시간이 지켜진다.

 

내가 함평 용천사엘 들른 것은 아마도 20여 년 전 겨울이 아니었나 싶다. 혜용 스님이 주지로 있었고, 외우 오세영 시인이 주지스님에게 연을 넣어주어 거길 가게 되었었다. 그런데, 내가 거기 도착한 이튿날부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주지 스님은 서울에 일이 있어 이날 아침 절을 떠났고, 공양주 보살 역시 외부에 출타를 하게 되어 이 덩그런 겨울 절간에 노스님(성후) 한 분과 나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이튿날까지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눈은 내려 산천을 깊게 덮었고, 용천사로 들어오는 길마저도 무릎까지 눈이 쌓였다. 말하자면 나는 폭설로 고립된 절 안에 노스님과 단 둘이 남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길이 뚫리기까지 며칠, 노스님이 마련한 아주 소박한 공양을 노스님과 단 둘이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찬밥이나 누른 밥을 물에 끓이고 김장 김치 한 가지를 반찬으로 한 공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노스님께서 마련해주시는 하루 세끼 공양을 다른 어느 절간에서의 푸진 공양보다 더 맛있게 먹었었다.

 

 나는 폭설로 인적이 끈긴 이 절에서 때맞추어 울리는 예불 소리를 들었다. 산천이 눈에 덮인 대웅전에서 노스님 혼자서 새벽 예불을 드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노스님을 따라 예불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겨울 법당 마루에 무릎을 꿇고 있으려니 추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발이 시려오고 나중에는 전신이 오그라드는 듯하였다. 그런 추위 속에서 노스님은 혼자서 정해진 시각에 묵묵히 예불에 열중이었다. 스스로를 다스려 화엄을 깨치려는 그런 몰입이 거기에 있었다. 노스님이 내주시는 소박한 공양, 찬밥을 물에 끓이고 김장김치 한 가지로 마련된 밥상에 마주앉아 나는 참 감명깊은 공양이었다. 그렇다, 내게는 최상의 감동을 불러오던 절밥이었다. -여담 한 가지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그 노스님 생각이 나서, 용천사에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물으니 노스님은 몇 년 전 열반에 드셨다는 대답이었다. 스님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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