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전망 <7> '규제 완화'라는 도그마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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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는 정부가 재벌 대기업을 국가대표 선수처럼 육성하는 정책을 통해 발전해 왔다. 한국처럼 강력한 ‘정부 주도-재벌 중심’의 발전 전략을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일본과 서유럽 국가들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경쟁정책보다는 국가대표 기업(National Champion)들을 키우기 위해 투자 보조금 등을 활용한 산업정책으로 미국을 빠르게 따라갈 수 있었다. 이처럼 서유럽이나 일본이 미국과의 성장 격차를 좁힌 것은 내생적 성장 모형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내생적 성장 모형은 경제가 물적·인적·R&D 자본의 축적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결국 자본축적을 위한 저축률과 투자율이 경제성장의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의 저축률과 투자율이 여전히 미국과 비슷하거나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부터 성장률의 격차가 다시 벌어졌다. 더욱이 일본의 경우에, 1인당 소득수준을 통제하더라도, 미국 나아가 서유럽보다 저축률, 투자율, R&D 투자 비중이 더 높았다. 내생적 성장 모형에 따르면, 일본은 미국이나 서유럽과 비교해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더 높은 성장률을 누려야 했다. 그런데도 일본에서는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이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일본과 서유럽 그리고 미국 사이에 관측되는 성장의 격차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성장이론이 이른바 ‘슘페터주의 성장이론(Schumpeterian Growth Thoery)’이다. 내생적 성장 모형에서는 물적·인적·R&D 자본이 경제성장을 견인한다고 설명하는 반면, 슘페터주의 성장이론에서는 새로운 제품과 기술이 기득권 제품과 기술을 대체함으로써 성장이 일어난다고 본다. 즉, ‘창조적 파괴’를 통해 경제가 성장한다는 아이디어다.
1990년대는 경제의 중심축이 제조업에서 신경제와 혁신산업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던 때다. 이른바 정보통신기술(ICT) 혁명,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플랫폼의 등장, 소프트웨어·콘텐츠·바이오산업 등의 비약적 발전 등 세계경제가 혁신 경제 체제로의 전환이 시작된 때이다. 따라서 경제성장의 패러다임 전환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이나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았을 때는 공정혁신(process innovation)이 더 중요한 제조업 중심의 경제체제였다. 그러나 혁신 경제 체제로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과 기회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도전의 기회가 없으면 창조적 파괴라는 혁신은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슘페터주의 성장주의자들은 서유럽국가들이 유럽통합 이후에도 여전히 국내 규제를 유지함으로써 진입과 퇴출 장벽을 쌓고 있음에 주목해, 진입과 퇴출 장벽 철폐를 위한 규제 완화를 성장전략으로 제시했고, 이를 OECD 차원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규제 완화로 국가 간 진입과 퇴출 장벽 철폐를 통해 슘페터적 창조적 파괴를 야기하겠다는 생각이 탈맥락적으로 ‘규제 완화 = 경제 활성화’라는 맹목적 도그마가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한국적 맥락에서 진입과 퇴출 장벽을 완화하려면,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는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오히려 필요하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된 상태에서 섣부른 규제 완화는 재벌들이 손쉽게 레버리지를 활용해 다른 시장으로 진입해서 혁신을 말살할 수 있다.
경제력 집중의 억제와 해소를 통해 새로운 기업들에게 진입할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슘페터적 혁신은 아주 한정된 분야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특히 1997년 경제 위기 이후에 한국 제조업의 독과점 양상은 심화되었고, 중간재 생산에서는 하청기업들과 전속거래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런 전속계약 하에서 반복 거래를 통해 원청 대기업이 하청기업의 비용 구조를 거의 다 파악하게 되고, 단가 후려치기를 쉽게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하청기업은 혁신을 통해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도, 결국 원청 대기업이 하청기업의 기술을 탈취해 다른 하청기업에 넘긴 후, 제품을 더 싸게 만들도록 해서 단가를 낮추는 행태가 무한히 반복되고 있다. 이런 전속계약 체제에서, 부품 및 소재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의 주 무대인 B2B(Business to Business)에서의 혁신의 기회와 유인 모두 사라지고 있다.
기회와 유인의 중요성은 국내 B2B와 B2C(Business to Consumer) 산업에서 유니콘 기업의 발생을 비교해 보면 명확하다. 유니콘 기업이란 흔히 기업 가치가 1조 원이 넘는 비상장 기업을 말한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유니콘 기업은 18곳이며, 이미 상장했거나 M&A를 해서 유니콘 기업에서 벗어난 기업을 포함하면 27개사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혁신적인 유니콘 기업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서유럽 국가와 비교해도 꽤 많은 편이다. 그런데 한국의 유니콘 기업들은 모바일, 화장품, 게임, 핀테크, O2O, 전자상거래, 바이오, 부동산 중개, 도소매업, 게임 등 주로 B2C를 지향한다. 결국 문제는 진입 및 퇴출 장벽과 약자의 재산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고 있는 중간재 산업의 문제인 것이다.
GDP의 26% 정도를 담당하는 제조업, 제조업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간재 산업에서 혁신이 없다면, 한국 경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맹목적 규제완화가 답이 아니다. 정부의 역할은 혁신형 경제가 잘 작동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를 통해 시장에 경쟁을 도입해 전속적 하청구조를 해체하고, 기술탈취 기업의 경제적 능력에 비례해 징벌 배상액을 정하는 진정한 징벌배상제도 및 민사소송의 원고 측 변호사가 형사재판의 검사처럼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권한을 법원이 부여하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다면, 한국 중간재 산업에서도 혁신은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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