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죽이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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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BS수능강의는 공교육이다. 이상한 얘기일 수 있지만 정부가 그렇게 대접한다. 그래서 ‘학교 : 학원’의 대립구도가 온라인 세계에서는 ‘EBS 인터넷강의 : 사교육 인터넷강의’의 대립구도를 띤다.
정부는 EBS수능강의를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우선 EBS수능강의는 전액이 무료이다. 그리고 정부는 학생들의 시청을 독려하기 위해 수능시험을 EBS수능교재와 강하게 연계시킨다. 엄청난 특혜다. 이 정도의 지원이라면 EBS는 인터넷 입시시장을 완전히 평정했어야 마땅하다. 메가스터디, 대성마이맥, 이투스 등의 인터넷 사교육 업체는 도산을 눈앞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EBS가 밀리는 상황이다.
지금도 이런 상황인데 EBS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EBS-수능시험 연계정책을 폐기하는 것만으로도 EBS의 경쟁력은 현저히 약화될 것이다. 이에 더해 강의를 유료화하면 EBS수능강의는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다.
내 둘째 아이는 작년에 고3 입시생이었다. 둘째는 수능시험 준비를 할 때 인터넷 수능강의를 잘 활용했다. 그래서 학원비를 절약하고 학원에 오고가는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완전 무료인데다가 수능시험과 강하게 연계되는 EBS강의를 활용했을까? 아니다. 둘째 아이는 단 한 시간도 EBS강의를 시청하지 않았다. 메가스터디, 대성마이맥, 이투스 등의 강의를 시청했다. 아들의 선택이었지만 아내와 나의 생각이기도 했다. EBS수능 연계정책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별다른 망설임은 없었다. 왜일까? 입시 준비로 바쁜 아들의 소중한 시간을 값지게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에서 아들이 EBS수능강의를 시청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그것은 EBS수능 연계정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EBS수능강의는 정부의 지원이 있을 때만 경쟁력을 갖는다. 수능시험과의 연계정책이 폐기되고 비용을 학생이 부담해야 하는 순간 EBS의 경쟁력은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교재 문제다. 정확히 말하면 교재 선택에 있어서의 자율성 부재다. EBS강사에게는 교재 사용의 자율성이 없다. EBS강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교재는 단 하나 EBS교재일 뿐이다. EBS강사들의 수업은 철저히 EBS교재에 종속된다.
그러나 사교육 인터넷 강사들은 교재 사용에 대한 완전한 자율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들의 강의는 교재에 종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재를 자신의 강의에 종속시킨다. 그들은 자신의 강의에 최적화된 교재를 선택한다. 그러한 교재가 없으면 아예 그러한 교재를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사교육 인터넷 강사들은 자신만의 교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들의 교재는 언뜻 보면 시시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교재만을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그들의 교재는 철저히 강의효과의 극대화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언뜻 헐렁하게 보이는 교재라도 수업과 결합하면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
사교육 인터넷 강사들에게 교재는 날개다. 그들의 수업은 교재로 인해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나 EBS강사들에게 교재는 족쇄다. EBS교재에 얽매인 EBS강사들은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수업이 있어도 그것을 실현할 수 없다. 창의력과 개성과 능력을 충분히 살릴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들의 강의는 죽은 강의다. 이것은 EBS교재의 질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아무리 질이 좋아도 그것을 사용하는 강사의 수업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어차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교재 선택의 자율성이 없다는 것만이 EBS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하지만 교재 선택의 자율성이 없는 상황에서 EBS가 경쟁력을 갖는 것은 어렵다. 교재보다 강사들의 능력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동일한 능력을 갖고 있어도 교재 사용의 자율성이 없으면 그 능력을 충분히 살릴 수 없다. 사교육 인터넷 시장의 절대 강자인 한석원(대성마이맥), 신승범(메가스터디에서 올해 이투스로 이적) 강사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교재를 사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EBS교재만을 사용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상황에서도 그들이 강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장담하건데 그들은 몇 년 못 가서 평범한 강사로 전락할 것이다. 설사 EBS수능 연계정책이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추진된다할지라도 그들은 강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2.
학교 교육, 특히 수업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매우 크다.
학교수업을 뒤처지게 만드는 원인은 수십 가지다. 그 원인 중 중요한 하나는 교과서 선택에서의 자율성 부재다. 현재 학교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교과서는 검정교과서다. 최근 정부가 국정화(化)하려는 한국사교과서도 중고등학교에서는 검정교과서이다. 단 한 종류의 교과서만이 존재하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국정교과서에 비하면 선택의 자유가 훨씬 커졌다. 아무튼 검정을 통과한 여러 개의 교과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사의 수업에 상당한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에게 교과서는 여전히 날개가 아니다.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수업을 시도하려는 교사에게 지금의 검정교과서는 여전히 족쇄다.
우선 교과서 선택의 자유가 교사 개개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고 교장의 결재가 있어야 하는 상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선택권이 교사 한 명 한 명에게 있지 않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국어교과서를 선정하는 권한은 국어교사 개개인이 아닌 국어교사 전체에게 있다. 국어교사가 열 명이 넘어도 학교에서 선택하는 교과서는 오직 한 종류여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검정교과서는 실제적 측면에서 다양성이 매우 부족하다. 언뜻 보이는 것과는 달리 선택의 폭이 협소하다. 종류가 10개가 넘는 경우에도 막상 고르려고 하면 그 많은 교과서가 모두 비슷비슷하다. 형식과 분량과 내용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창의성과 개성이 강한 교사의 눈에는 10종류가 넘는 교과서들이 다 똑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의 검정교과서는 날개가 될 수 없다. 국정교과서에 비해선 한결 낫지만 더 좋은 수업을 위해 몸부림치는 교사에겐 여전히 족쇄에 불과하다. 교과서를 일정정도 재구성하여 수업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주어진 교과서의 재구성일 뿐이다. 창의성과 개성과 능력을 충분히 살릴 수 없다. 더 좋은 수업을 위해 몸부림치는 교사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 진실일 뿐이다. 우리의 교과서제도가 교사를 그렇게 만든 것 또한 큰 진실이다. 선택의 자율성이 없는 교과서제도는 교사가 게을러졌을 때 안주하기에 너무나 좋은 제도이다.
교과서를 족쇄가 아닌 날개가 되게 하려면, 교과서제도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지금 당장 실현할 수 있는 것은 교과서 제작 단계에서 정부의 규제를 과감히 줄여 교과서를 실질적으로 다양화하는 것이다. 비슷비슷한 교과서 열 종류보다 현저하게 다른 교과서 서너 종류가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 이것은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자유발행제를 시행하고 교사 개개인에게 온전한 선택의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 교사가 자신의 수업에 날개를 달아줄 교과서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이것들만 가지고 학교교육을 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의 실현 없이 학교수업이 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3.
최근 정부는 한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꾀하고 있다. 명백한 퇴행이다. 그것은 교사의 수업에 지금보다 더 크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우리의 교과서제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교사의 수업에 날개를 달아주는 방향, 즉 자유발행제와 자유선택제다.
자유발행제와 자유선택제의 도입은 교과서제도에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를 도입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시장경제의 힘을 믿고 과도기적 혼란을 이겨내야 한다. 시장의 선택을 받는 교과서가 좋은 교과서라는 믿음을 갖고 자유롭게 교과서를 만들어 시장의 선택을 받게 해야 한다.
시장경제의 논리를 무작정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교육에 함부로 시장논리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교육의 어떤 분야에서는 시장논리를 도입해야 한다. 시장경제의 논리를 도입해야 할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교과서제도다. 우리의 교과서제도는 시장경제의 논리를 강화하는 방향, 즉 자유발행제와 자유선택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가 맨 처음 하는 일도 아니다. 상당수 선진국에서 하는 일을 모방하면 되는 일이다.
물론 한국사교과서만은 국정으로 해야 한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한국사는 국민의 이념, 특히 정치적 이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국정화가 옳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생각을 바꾸어 한국사교과서에 제일 먼저 자유발행제와 자유선택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모적인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존재하는 교과서가 단 한 개뿐이라면 좌파와 우파가 그 하나 뿐인 교과서를 둘러싸고 더 치열하게 갈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과서가 수십 개라면 갈등의 여지는 현저히 줄어든다. 물론 처음에는 수십 개라도 나중에 다수의 선택을 받는 교과서는 몇 개에 불과할 수 있다. 그 몇 개의 교과서가 우파가 좋아할 교과서일지, 좌파가 좋아할 교과서일지, 중도파가 좋아할 교과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시장이 결정할 일이다. 승부가 어떻게 나든 공정하지 않은가?
나의 상식으로는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를 더 강하게 신봉해야 할 쪽은 보수우파 정부이다. 시장경제가 만능은 아니겠지만 보수우파가 국민의 선택을 받은 후에 시장경제의 논리를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교육에서는 보수우파가 오히려 더 시장경제의 논리를 부정하는 것만 같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사교과서의 국정으로의 회귀는 명백히 시장경제논리의 후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그것은 교과서제도에 공산주의 획일경제의 논리를 도입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논리를 확대해야 할 정부가 왜 시장경제의 논리를 버리고 공산주의 획일경제의 논리를 따르려 하는가? 교과서제도 분야는 시장경제논리를 도입하기에 제일 적합한 분야인데 왜 하필 교과서제도에서 시장경제의 논리를 크게 후퇴시키는가? 진정한 보수정부라면 시장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교육의 다른 분야에서 함부로 시장논리를 도입해서는 안 되겠지만, 교과서제도는 마음껏 시장경제의 논리를 도입해도 되는 부분이다.
4.
교과서, 죽이기와 살리기 - 어떤 길을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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