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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마흔여섯 번째 이야기 여덟 겹의 바른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5월13일 17시13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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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지도를 지니고 길을 떠나다

  지금이야 스맛폰에까지 네비게이션 기능을 갖추고 있어서 차 안에 비치됐던 지도책이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과거에는 차를 길가에 세우고 지도를 펼쳐보는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낯선 곳을 운전해 갈 때 지도와 이정표를 보며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하지만 실제로 가는 길과 머릿속으로 그리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이는 누구나 갖는 경험이다.

 

  처음 길을 떠나는 사람은 목적지와 목적지로 가는 길에 대해 추상적으로나마 알아야 한다. 지도를 잘 못 해석하거나 이정표를 잘 못 보면 목적지와 오히려 멀어지거나 길을 헤매게 된다. 37보리분법은 길을 떠나는 사람이 지니는 지도와 이정표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수행의 길을 위한 지도이다. 실제로 가는 길과 지도를 보고 머릿속으로 그리는 풍경이 다를 수 있듯 37보리분법을 이해하고 수행의 길을 가는 수행자는 곳곳에서 낯선 풍경과 만나게 된다.

  어떤 이는 처음 보는 풍경에 넋을 잃고 가야할 길을 잊을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잘못 든 길에 쏟은 수고가 안타까워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를 주저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붓다는 수행자들에게 스스로 점검하고 검증하면서 길을 가라고 권한다. 심지어 붓다 자신이 갔던 길까지도 맹목으로 따르지 말라고까지 말한다.

  37보리분법의 7가지 범주 가운데 마지막 범주는 8정도이다. 八正道는 37보리분법이라는 지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8정도는 붓다의 최초 설법이자 최후의 설법이라고 일컬어진다. 사성제 중 도성제의 내용을 이루며 열반으로 가는 노하우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히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이다.”(초전법륜경)

 

  팔정도는 여덟 겹의 길이다. 비유컨대 목적지로 가는 길에 여덟 개의 정거장이 있는 건 아니다. 8개의 포인트의 개념으로 8정도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 여덟 가지는 오히려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 반드시 지녀야 할 8가지 장비와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방한복, 장갑, 스틱, 산소통 같은 장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탈과 열반으로 가기 위한 여덟 가지 장비란 어떤 것들인가? 

 

 

  해탈의 길에 갖춰야 할 장비 여덟 가지 

  앞서 초전법륜경에서 인용한대로 해탈의 길을 가는데 갖춰야할 여덟 가지 장비는, 

❶ 바른 견해(定見), 

❷ 바른 사유(正思),

❸ 바른 말(正語), 

❹ 바른 행위(正業), 

❺ 바른 생계(正命), 

❻ 바른 노력(正精進),

❼ 바른 사띠(正念), 

➑ 바른 사마디(正定)이다.

 

  붓다의 ‘첫 가르침이자 마지막 가르침’으로 일컬어지는 만큼, 적어도 그 여덟 가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겠다. 요약 일별해 본다.

 

  ❶⁺ 바른 견해(正見)는 苦, 集, 滅, 道,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연기의 가르침이 정견이라고 쓰고 있는 경전도 있다. ‘바른견해경’에는 정견의 내포를 보다 넓혀서 12연기와 4성제를 꿰뚫어 앎에다가 ‘유익함과 해로움을 꿰뚫어 앎’을 보태고 있다. 

  미지의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은 무작정 떠나지 않는다. 그 나라에 대한 사전지식을 많이 갖추면 갖출수록 여행은 수월해진다. 또 지도를 보면서 미지의 목적지를 상상으로 나마 그려본다. 사전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다. 정견이 바로 그런 일이다.

  죽고 태어남의 고통을 지성으로나마 이해하고 고통의 원인이 12가지 고리를 따라 돌고 돌며, 그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 도움이 되고 무엇이 해가 되는 지를 ‘꿰뚫어 알게 되면’ 해탈의 길을 퍽 수월하게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경전들이 팔정도 중에서도 정견을 맨 처음 위치에 둔 까닭이 이것 아니겠는가?

 

❷⁺ 바른 사유(正思)의 ‘사유’는 ‘생각’보다는 ‘의지’나 ‘태도’에 가까운 말이다. ‘마음씀씀이’나 ‘심뽀’ 같은 뜻이라고 나는 본다.(너무 독창적이었나?) 경전은 수행자의 본분을 추스르고, 나쁜 마음을 갖지 않으며, 남을 해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른 사유라고 가르친다. 

  한 마디로 ‘나쁜 놈’이 되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나쁜 놈, 악인을 정의하면 ‘나쁜 마음, 惡意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을까? 적극적으로는 바른 사유란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교리는 해석한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은 慈, 悲, 喜, 捨의 四無量心을 가리킨다. 자애와 연민을 갖고 살아있는 것을 대하고 기쁨과 평온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바로 여덟 겹의 길 가운데 두 번째 길 正思인 것이다.

 

❸⁺ 바른 말(正語)은 “거짓말과 남을 헐뜯는 말, 욕설과 잡담을 삼가는 것”인데, 경험상 참 지키기 어렵다.

 

❹⁺ 바른 행위(正業)는 “살생과 도둑질,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이다.

 

❺⁺ 바른 생계(正命)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대한 붓다의 가르침이다. 다시 말하면 ‘먹고 살되 똑바로 먹고 살아라’는 가르침이다. 

  재가자는 정당한 직업을 갖고 먹고 살아야 한다. 가져서는 안 되는 직업으로 무기장사, 사람장사, 동물장사, 술장사, 독약장사를 들고 있는데 붓다 생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이보다 훨씬 가져서는 안 되는 직업이 많지 않을까?

  출가자는 생업에 종사하지 말고 걸식으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생업에 종사하는 시간을 해탈의 길을 가는데, 또 그 길을 널리 알리는데 쓰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 얻은 것을 내일을 위해 비축해서도 안 된다. 청정한 무소유의 삶을 살지 않으면 출가자라고 할 수 없다. 사주, 관상이나 점을 쳐서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가르침은 우리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❻⁺ 바른 노력(正精進)은 이미 앞서 충분히 언급했지만 다시 간략히 정리한다. 바른 위리야는 수행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하는 노력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은 잘 보전하고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들은 사라지도록 노력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은 일어나도록,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한다.

 

❼⁺ 바른 사띠(正念) 역시 다시 얘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이 설명했다. 이렇게 요약해 본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상으로 사띠한다. 그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의 네 가지로 분류된다. 사념처가 그것이다. 바른 사띠야말로 팔정도 중 가장 구체적인 수행노하우라고 할 수 있다. 사띠가 왜 구체적 노하우일 수 있는가? 법(진리)이란 지금 이곳을 벗어나 저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을 경전의 이곳저곳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은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 그래서 법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실현된다. 사띠란 바로 ‘우리 자신의 내부 지켜보기’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대상으로 ‘사띠하기’이다.

 

➑⁺ 마지막으로 바른 사마디(正定)는 사마디를 닦아 네 단계의 사마디에 들어 머무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백 가지 명상이 있다. 대부분의 명상들이 마음을 대상 한곳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마음이 한 대상에 집중하면 사마디를 얻는다. 사마디를 얻으면 일상에서 만나지 못하는 높은 차원의 기쁨, 즐거움, 평안 등이 따라온다. 이렇게 사마디의 마음은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갖가지 신통들도 사마디에서 나온다. 하지만 사마디로 얻어지는 체험들과 신통들은

결코 궁극이 아니다. 그저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것들에 집착한다면 ‘바른’ 사마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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