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29> 옥타비아누스, 마침내 1인자가 되다(기원전 31~30)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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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1년 3월,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전력을 이끌고 안토니우스가 머무르고 있는 그리스로 건너갔다. 마지막 운명의 결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전을 준비하던 안토니우스 역시 마지막 전투에 몰두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작전 회의에도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했다.
작전 회의가 거듭될수록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수들의 절망도 깊어갔다. “우리는 로마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집트 여왕의 남편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은 없다.” 이런 불만들이 쌓여가면서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에 상륙하자 진영을 이탈하는 장수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장수가 이탈하면 그 휘하의 장병들도 함께 떠나기 때문에 날이 밝으면 숙영지 하나가 텅 비는 일도 있었다. 격분한 안토니우스는 붙잡히는 탈영병은 사형에 처했지만, 이탈 행렬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토니우스 세력권에 있는 제후들 중에 옥타비아누스 편에 서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헤롯 왕이 다스리는 유대가 앞장섰다. 그리스에서는 스파르타가 가장 먼저 옥타비아누스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의 뜻을 밝혔다. 안토니우스 진영이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자,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안토니우스 진영을 떠난 장교들은 “비록 안토니우스를 버렸지만, 그와 정면 대결하여 화살을 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옥타비아누스는 휘하 부대에 배치하지 않고 귀국을 허락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탈영병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역사상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날씨는 맑고, 바람은 동쪽에서 미풍이 불어왔다. 프레베자 만에서 안토니우스군은 바람을 등지고 싸우게 되어 출발이 순조로웠다. 안토니우스의 전법은 해군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적을 포위하는 전략이다. 안토니우스군의 해상 전력은 520척이고, 옥타비아누스는 400척이었다. 아그리파는 프레베자 만의 좁은 어귀를 향해 돌진함으로써 그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전의 전반부까지도 안토니우스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불던 동풍이 북풍으로 변한 것이다. 아비규환이 일어나면서 클레오파트라는 “어서 돛을 올려라”고 소리치면서 도망가고 말았다. 도망가는 클레오파트라를 발견한 안토니우스도 돛을 올리고 뒤따라갔다. 그날 300척이 넘는 함대가 로마군에 붙잡혔다. 옥타비아누스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목숨은 살려주었다. 그러나 이집트 선박은 전리품으로 뱃머리만 잘라내고 모두 불태워버렸다. 파트라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지상군은 8일 동안이나 사령관이 아무 소식도 없이 나타나지 않자,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약속을 믿고 저항 없이 항복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간 클레오파트라를 따라가지 않고 오늘날 리비아에 해당하는 키레나이카에 상륙했다. 함께 따라왔던 수십 척의 군선과 6,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린 채였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살고 싶으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둬달라”는 편지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보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계속 보내자, 안토니우스는 마음이 약해져서 다시 돌아왔다.
기원전 30년 봄, 시리아까지 와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서 각각 편지 한 통씩 받았다.
“나는 자결할 테니 클레오파트라는 살려달라.”
“나는 퇴위할 테니 아들의 즉위를 인정해달라.”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선결 문제”라고 답장을 보냈다.
7월 31일, 옥타비아누스가 보낸 기병대와 안토니우스 기병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전투 중이던 안토니우스의 기병들이 갑자기 적진에 투항해버렸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자기가 죽었다고 안토니우스에게 거짓으로 알리게 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살을 시도했다. 가슴을 찔러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피투성이가 된 안토니우스는 부하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영묘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품 안에서 초라하게 숨을 거두었다.
이제 클레오파트라만 남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영묘에 숨어 있는 그녀를 산 채로 잡아 연행하라고 명령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왕궁으로 끌려왔다. 그곳에서 아들 카이사리온이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을 알았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 3명은 살아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결심했다. 구차하게 한 여자로서 살아남기보다는 여왕으로서 죽고 싶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묻혀 있는 무덤에 술을 따라주고 싶다”며 영묘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별말 없이 허락했다. 무덤 옆에는 독사가 숨겨진 무화과 열매를 가득 담은 바구니도 반입되었다. 독사는 야심으로 살아온 39세 여왕의 일생을 한순간에 마무리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의 정장을 입고 여왕처럼 죽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300년 동안 지속된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집트는 동맹국에서 로마의 속주가 아니라 신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영지로 전락했다. 이집트에서는 신의 아들이 아니면 지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는 14년 동안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로마 세계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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