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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18세 애송이 옥타비아누스의 대담한 행동 (기원전 44)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4월12일 16시46분
  • 최종수정 2018년04월12일 16시52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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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은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의 종조부, 즉 외할머니의 오빠였다. 영웅으로 생각했던 할아버지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로마로 돌아가는 것이 자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지시로 그리스의 아폴로니아에 파견 나가 있었다. 앤서니 에버렛은 『아우구스투스』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당차게 대처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암살 소식을 듣고 그는 지체 없이 로마로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카이사르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양자로 삼아 성까지 물려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변에서는 로마에서 이미 권력을 장악한 안토니우스가 살해할 수도 있으니 “로마로 가지 말고 기다리면서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가서 정면 돌파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무명의 옥타비아누스를 순식간에 명문 귀족의 후계자로 끌어올렸다. 로마의 정치가들은 그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그리스에 처박혀 사태를 관망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고 단시간에 귀국한 것이다. 국법을 지키기 위해 군대는 데려오지 않았다. 다만 아그리파를 비롯한 수행원들이 그와 함께 왔다. 

 

먼저 옥타비아누스는 당대 최고의 석학인 키케로를 방문했다. 키케로가 이제는 아버지가 된 카이사르와 절친했고 존경하는 원로라는 이유로 찾아가 인사를 했던 것이다. 키케로는 자신을 존중해서 찾아온 옥타비아누스의 방문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분이 좋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이 있었다. 바로 부드러운 태도였다. 그는 인사성이 밝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호감을 주는 매력이 있었다. 

 

예의 바른 옥타비아누스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카이사르의 2인자인 안토니우스의 자택도 방문했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쌀쌀하게 대했고 비협조적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겠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을 돌려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돈이 필요했다. 로마에서는 존경받는 명사가 죽으면 그 후계자는 고인을 기리는 연극을 상연하고 경기 대회를 주최하는 것이 관례였다. 경기 대회는 무료로 초청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었다. 또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안토니우스가 돈을 돌려주지 않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 가까웠던 재력가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중에서도 명망이 있는 마티우스를 찾아갔다. 하지만 키케로가 훼방을 놓았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를 계승하면 카이사르를 제거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마티우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옥타비아누스의 부탁을 거절하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5권에 실린 마티우스가 보낸 답장이 신선하다. 

“키케로여, 당신은 카이사르를 추모하는 경기 대회 자금을 내가 책임진다는 소문을 듣고 나한테 편지를 쓴 모양인데, 나는 이것을 개인의 의무로 받아들였을 뿐, 거기에 정치적인 의미는 전혀 없소. 위대한 인물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사람을 기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경의가 담긴 선물을 하는 것뿐이오. 나는 이 젊은이의 진지한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소. 그 청년이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더없는 기쁨이었소.”

 

카이사르 추모 경기 대회의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마티우스와 경제계의 또 다른 거물이 지원하면서 로마 경제계 전체가 지원하게 된 것이다. 대회는 카이사르가 태어난 7월에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이 소식은 로마에 있는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여겼던 옥타비아누스가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추모 대회를 연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7일 동안 계속된 카이사르 추모 경기 대회에는 여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시민이 초대되었다. 참가한 시민들은 56회 생일을 앞두고 안타깝게 암살당한 카이사르를 그리워하며 암살자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불태웠다. 옥타비아누스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시민들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를 나누어주었다. 상상하기 힘든 큰 대회를 애송이라고 생각한 젊은이가 성공적으로 해내자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 소문은 로마 시내를 넘어 이탈리아반도 전체로, 그리고 속주에까지 알려졌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아들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것이다. 

 

예상과 달리 옥타비아누스가 당차고 빠른 속도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자리를 굳혀나가자, 안토니우스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원로원은 8월 초에 회의를 열고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제안한 의제를 가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정관인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가 집정관 임기를 마치면 기원전 43년에 부임할 임지를 정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정안을 마무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결정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첫째,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의식하지 않고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둘째, 암살자들을 사실상 사면시켰다.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에 임명된 브루투스와 시리아 속주 총독이 된 카시우스가 공무를 띠고 이탈리아를 떠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는 암살자들과도 손을 잡고 그들을 사면시켜서라도 옥타비아누스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이 권력을 잡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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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12일 16시46분
  • 최종수정 2018년04월12일 16시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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