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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마흔 다섯번째 이야기 깨달음으로 이끄는 일곱 인자(하)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5월05일 18시30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13일 12시02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메타정보

  • 30

본문

 

  기쁨은 삶의 추진력이다.

  칠각지의 세 번째는 위리야(정진)이다. 위리야는 각 범주마다 반복되는 요소이다. 설명이 이미 충분한 만큼 건너뛴다. 네 번째 각지는 기쁨의 각지, 喜覺支이다. 37보리분법에 단 한 번 나오는 요소인 만큼 설명이 필요하겠다.

  청정도론은 기쁨이 ‘몸과 마음을 강하게 하는 역할을 하며, 표면적으로는 의기양양함으로 나타난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기쁨은 몸과 마음의 활력소로 삶의 원동력이 된다.

 

 

  기쁨이 없는 삶은 우울하고 지겹다. 기쁨이 없는 사람에게 삶은 지옥이다. 청정도론은 기쁨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❶ 몸의 털을 곤두서게 하는 작은 기쁨 

❷ 번개불 같은 순간적 기쁨

❸ 해안의 물결처럼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기쁨

❹ 몸을 공중에 뛰어오르게 하는 ‘들어 올리는 기쁨’

❺ 충만한 기쁨이 그것이다.

 

  이처럼 기쁨에는 단계가 있다. 충만한 기쁨을 얻은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되겠다. 진리를 알고 얻는 기쁨을 法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충만한 기쁨에 해당한다. 깨달음의 인자 일곱 가지, 칠각지에 기쁨(삐띠 piti)이 들어가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고 하겠다. 삐띠는 몸과 마음 양면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특성을 갖추지 못하고서는 깨달음을 향한 길을 계속해 나아갈 수가 없다. 삐띠가 없으면 수행이 시큰둥해진다. 수행의 길을 가는 많은 사람들이 법열을 이야기 한다. 법열의 맛을 본 수행자는 결코 수행을 포기할 수 없다. 세속의 뭇 즐거움들이 시시해진다. 

  삐띠와 연관된 법구경 이야기 하나. 붓다가 어느 땐가 탁발을 나갔다가 음식을 얻지 못하고 빈 바루로 돌아왔다. 그때 어떤 방정맞고 부질없는 자가 붓다가 배가 고파 괴로울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붓다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아, 장애를 여윈 우리는 언제나 행복하게 산다네. 

光音天의 신들처럼 기쁨을 먹고 살리.” (법구경)

 

  광음천은 색계 2선천의 3번째 하늘이다. 여기 사는 신들은 의사소통할 때 음성을 사용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빛을 사용하기 때문에 광음천이라고 한다.

  사마타(집중명상)를 닦아 얻는 사마디의 첫 단계인 제1선정에서 삐띠는 필연적인 동반 심리상태로 나타난다. 명상을 하고 선을 닦는 수행자들이 수행 중 나타나는 삐띠(법열)를 한 번이라도 체험하게 되면, 그 ‘명상의 맛’을 결코 잊지 못하게 된다.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삶을 살든지 그 맛은 마치 고향집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음식의 손맛 같아서 고향 그리워하듯 그리워하며 살게 된다.(하지만 인연이 없어서 수행과 담을 쌓고 그럭저럭 사는 사람을 많이 봤다.

물론 본인을 포함해서.)

  그러나 수행 중 나타나는 기쁨, 삐띠는 가장 낮은 단계에서 나타나는 심리현상이다. 보다 높은 단계에 가면 오히려 삐띠는 사라지는 대신 평온함이 나타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된다.

기쁨은 그렇게 수행의 원동력이긴 하지만 수행의 궁극은 결코 아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어떻게 다른가?

  쉐우민에서의 어느 날, 담마토크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토론이 벌어졌다. 윤리학 교과서에 쓰고 있는 것처럼 행복은 만족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데는 대략 의견이 일치했다. 싯달타는 왕궁의 태자였을 때 불행했고, 맨발로 걸식을 하며 행복했다. 논의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즐거움과 기쁨이 어떻게 다른가로 옮겨갔다.

  칠각지에 기쁨은 있는데, 왜 즐거움은 없는가? 아비담마에서 즐거움은 좋은 웨다나(느낌)이다. 좋든 나쁘든 느낌은 거의 자동으로 애착이나 싫음으로 옮겨간다. 좋은 느낌인 즐거움은 덧없는 것이다. 덧없기에 괴로움의 넓은 범주에 들어간다. 한 순간의 즐거움이 괴로움의 근원이 되기 일쑤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순간의 쾌락을 취하는 행위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즐거움보다는 ‘참된 행복’을 얻고 싶어 한다. 논의의 시작으로 돌아가면, 행복은 물질이나 욕구의 충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참된 행복은 오히려 知足의 기쁨에서 온다. 족함을 아는 것, 지족은 탐욕을 줄여야 얻는다. 진정한 기쁨은 버림으로써 얻어진다. 지족은 행복한 사람만이 갖는 특성이다. 지족은 우연히 얻어지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난관에 용기와 결단력으로 대응하고, 스스로의 나쁜 성향들을 제어하며, 경솔하게 행동하려는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늘 갈등한다. 마음에 갈등이 있는 한 지족은 없다. 갈등의 원인이 되는 나쁜 성향과 욕구의 족쇄를 풀어야 한다. 그 길은 청정의 길이다. 청정의 길을 가지 않고 지족과 기쁨을 계발할 수 없다. 계, 정, 혜를 닦는 붓다의 길이 청정의 길이다.

 

“남들은 사람을 해치더라도 나는 남을 해치지 않으리.

남들은 살아있는 존재의 목숨을 빼앗더라도 나는 살생하지 않으리.

남들은 행실이 나빠도 나는 청정하게 살리.

남들은 거짓말을 하더라도 나는 진실만을 말하리.

남들은 사람을 비방하고, 거친 말을 하고, 잡담을 일삼더라도 나는 화합을 돕는 말, 듣기에 좋고, 사랑으로 가득 차고,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정중하고, 마음에 담아둘만 하고, 때에 알맞고, 적절하고 합당한, 그런 말만 하리.

끝까지 겸손하고, 진리와 정직함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하고, 평화롭고, 성실하고, 만족하고, 너그럽고 진실 되리.” (디가 니까야 / 맛지마 니까야)

 

  마음의 고요함에 대하여

  잔잔함, 또는 고요함은 평화의 이미지이다.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많은 사람의 소망이다.

‘평화로운 삶’에 상대되는 개념은 ‘시달리는 삶’이 되겠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보통 여유를 갖지 못하고 시달리며 산다. 일의 부하와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하지만 마음을 늘 추스르고 반성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바쁘고 복잡한 일상에 시달리지 않는다. 

  빳삿띠(passaddhi)는 잔잔함과 고요함을 의미하며 七覺支, 즉 일곱 가지 깨달음의 인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한역은 ‘輕安’, 가뿐하고 편안함 정도의 뜻으로 이해된다. ‘빳삿디’는 걷다 지친 사람이 나무 그늘에서 쉴 때 경험하는 행복에 비유된다. 

 

  마음은 한 순간도 쉬지 않는다. 논서들은 대상 하나에 마음이 열일곱 번 일어난다고 쓰고 있다. 마음의 방황은 제멋대로여서 종잡을 수 없다. 오죽하면 ‘백팔 번뇌’라는 말이 있겠는가. 마치 땡볕에 황야를 걷는 나그네와 같다. 빳삿띠는 나그네가 나무그늘을 만나 쉬듯 쉬는 마음을 일컫는다. 

  사마디, 즉 마음의 집중도 빳사띠를 닦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물질적 풍요와 온화한 인간관계 속에서 빳사띠를 얻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궁핍과 억압, 인간관계의 갈등을 겪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지니기란 결코 쉽지 않겠다. 하지만 ‘어려워서 가치가 더 크다’는 말도 있잖은가? 경전에는 빳삿띠를 닦는 사람은 세간의 여덟 가지 어려움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씌어있다. 여덟 가지 어려움은, 이득과 손실,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 칭찬과 비난, 고통과 행복을 말한다.(이득, 좋은 평판, 칭찬, 행복도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어려움에 속한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 즉 요니소 마니시까라(yoniso manisikara)가 빳삿띠를 돕는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것을 조건 지워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보게 되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본생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서도 슬퍼하지도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 어머니 얘기가 나온다. 그 여인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 아이는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가라고 해서 간 것도 아닙니다. 왔듯이 그렇게 가버린 것인데 한탄하고, 울고, 통곡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뱀에 관한 본생담)

 

  어쩐지 좀 비정한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은 삶을 대상으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조망함으로써 삶 자체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니소 마니시까라는 빳삿띠를 돕고 빳삿띠는 깨달음으로 가는 씨앗이 된다.

 

  우뻬까 

  칠각지 중 마지막 일곱 번째는 우뻬까이다. 평온함 정도로 번역되고 한역은 버릴 ‘捨’이다. 양쪽 극단을 버린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뻬까가 무관심은 아니다. 마음의 고요함과 집중에서 비롯된 정신의 평온함이다. 

 

  우뻬까를 얻은 사람은 세간의 여덟 가지 어려움, 즉 이득과 손실,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 칭찬과 헐뜯음, 고통과 행복에 흔들리지 않는다. 우뻬까를 얻은 수행자는 거세게 부는 바람에도 바위처럼 견고하다. 누군가가 물었다. “성자들은 왜 성자일까요?” 이런 답이 있다. “그분들은 쾌활하기 어려울 때도 쾌활하고, 참기 힘들 때에 참습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그렇지만 매우 어렵습니다.”(호더, ‘고요한 마음이라는 건강위생법’) 다음은 경전의 한 구절.

 

  “선한 분들은 진실로 모든 것에 대해서 욕구를 버린다. 선한 분들은 갈망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행복이 오든 고통이 오든 현자들은 우쭐대지도 소심해지지도 않는다.”(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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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뻬까는 중도에 이르는 길이다. 우뻬까는 모든 존재들을 치우침 없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에서 우뻬까는 마음부수에 속한다. 웨다나(느낌)의 일종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중립성’이라는 말로 설명을 요약한다.

  그래서 우뻬까는 ‘치우치지 않는 느낌’이다. 느낌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좋은 느낌, 나쁜 느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 그것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 우뻬까이다. 좋은 느낌은 애착을 낳고 나쁜 느낌은 분노를 낳는다. 느낌에 휘둘리지 않는 중도의 길,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은 해탈의 요인이 된다. 사마디를 닦는 사마타 수행을 하다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가면 우뻬까가 갖춰진다. 우뻬까는 희열이나 즐거움이 나타나는 경지보다 높은 경지에서 나타난다고 논서는 설명한다. 즉 희열과 즐거움까지도 사라진 색계 4선정의 상태에서는 우뻬까만이 남는다.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들은 사띠가 증장되면 사마디가 따라온다고 말한다. 그것을 ‘사띠 사마디’ 혹은 ‘위빠사나 사마디’라고 하는데, 이때 우뻬까가 함께 갖춰진다. 그러니까 사마타든 위빠사나든 우뻬까는 수행의 진척도를 재는 중요한 척도가 아닐 수 없다. 논사들이 칠각지의 마지막에 우뻬까를 배치한 뜻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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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05일 18시30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13일 12시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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