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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마흔네 번째 이야기 깨달음으로 이끄는 일곱 인자(상)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4월28일 17시55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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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깨달음은 우연인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도인’들을 우리는 이따금 만날 수 있다. 그 도인들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깨닫게 됐는지를 알고 싶고 묻고 싶지만 대개는 참고 만다. 이들 도인들은 보통 자신의 경지를 스스로 토로해내는데, 분명 뭔가 있는 듯 보인다. 전 마하보디 선원장 사사나 스님에게서 들었던 얘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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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여 년 전 깨달음을 얻었다는 비구 한 분이 쉐우민 센터에 나타났다. 떼자니아 사야도를 만나 자신의 경지를 설명하고 인가를 요구했다. 사야도가 물었다. “잘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됐는가?” 비구의 말문이 막혔다. 사야도는 더 이상 상대해주지 않았다. 센터에서 한 철 나겠다면 비구는 사야도에게 무시당했다며 화가 나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온 지 사흘 만에 돌아가 버렸다.

  이런 도인들은 곳곳에 참 많다.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 깨달음을 어떻게 얻게 됐는지 모르는 도인들. 이들에게 깨달음은 어쩌다 오게 된 것. 그래도 그렇게 온 깨달음 중에서도 진짜가 있을 법도하다.

  이렇게라도 진짜 깨달음을 얻은 존재들을 수행의 세계에서는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다고 해서 ‘獨覺’, 혹은 인연이 충족돼 깨달았다고 해서 ‘緣覺’, ‘프라트예카 붓다’를 음역해서 ‘辟支佛’이라고 한다. 벽지불은 자신이 얻은 깨달음의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독각, 연각, 벽지불이 그리 흔하던가? 그래서 이렇게 깨달은 ‘도인들’ 중에는 진짜보다 가짜가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독각은 깨달음의 과정을 설명하지 못할 뿐 그렇다고 그 깨달음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수행의 세계에도 이 원칙은 철저하다. 특히 37보리분법이라는 수행의 로드맵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수행의 원인과 결과는 분명하다.

  이를테면 수행을 이끄는 다섯 가지 힘, 五力 가운데서도 위리야(정진)은 원인이고 사마디는 결과이다. 믿음은 원인이고 통찰지는 결과이다. 사띠는 원인이고 사마디와 통찰지는 결과이다.

수행자에게 통찰지가 있다면 어떤 원인에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모를 수 없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이 바로 통찰지인 까닭이다. 수행과정을 세세하게 스스로 들여다보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경계를 점검할 수 있다면 수행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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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은 얻은 사람은 해탈을 얻었다는 것을 스스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것을 ‘解脫知見’이라고 한다. 한국불교의 대표적 예불의 첫 구절이 이렇다.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불전에 향을 사른 뒤, 계 정 혜를 닦을 수행의 각오를 다지고, 해탈의 원을 세우며, 해탈한 뒤 해탈을 알게 되기를 빈다. 해탈한 지를 스스로 알아야 완전한 해탈인 셈이다.

  무엇이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37보리분법 가운데 여섯 번째 범주인 七覺支, 즉 깨달음의 일곱 가지 인자이다.

 

  봇장가 ; 깨달음으로 이끄는 일곱 인자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세월을 잘 견디면 커다란 참나무가 된다. 씨앗은 아무리 작아도 그래서 완전하다. 가능성으로서 완전하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꿔놓으려면 내리쬐는 햇볕과 내리는 비, 숲을 흐르는 바람 등등이 적지도 많지도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게 보태져야 한다. 깨달음의 씨앗을 싹틔우고 자라서 완성케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것이 봇장가(bojjhanga)이다. 봇장가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인자’이라는 뜻이다. 한역으로는 ‘覺支’이고 일곱이라서 ‘七覺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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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일곱인가? 논서의 주석들은 ‘모자라지도 더하지도 않게 일곱’이라며 딱 일곱이면 된다고 설명한다. 그 일곱은 무엇 무엇인가?

 

❶ 사띠 봇장가(念覺支)

❷ 법을 간택하는 봇장가(擇法覺支)

❸ 위리야 봇장가(精進覺支)

❹ 희열의 봇장가(喜覺支)

❺ 고요함의 봇장가(輕安覺支)

❻ 사마디의 봇장가(定覺支)

❼ 평온의 봇장가(捨覺支)

 

  역시 사띠가 처음이다. 사띠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강조해도 부족한가보다. 사띠와 위리야(정진)와 사마디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염각지, 정진각지, 정각지의 설명은 건너뛰어도 되겠다. 택법간지, 희각지, 경안각지, 사각지는 별도의 설명 공간이 필요하다.

  깨달음의 이 일곱 가지 요인은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설명도 있다. 즉 선택한 명상주제에 대한 사띠에서 시작해서(念覺支) 이를 바탕으로 특정한 법이 해탈에 도움이 되는 지 여부를 가리고(擇法覺支) 선법은 증장하고 불선법은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精進覺支). 정진의 결과로 커다란 희열이 생기고(喜覺支), 이를 바탕으로 마음은 고요해진다(輕安覺支). 그래서 마음은 사마디에 들고(定覺支) 흔들리지 않는 우뻬까, 즉 평온을 얻게 된다(捨覺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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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七覺支는 그렇게 수행의 지침이 된다. 주석서는 칠각지가 ‘혼침과 들뜸이라는 불선법을 없애고 모든 곳에 이롭다’고 쓰고 있는데, 그 세밀한 뜻은 이렇다. 혼침과 들뜸은 수행에 대표적인 장애이다. (혼침과 들뜸이 무엇인지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다.) 칠각지는 이들 장애를 건너게 한다. 택법, 정진, 희열은 혼침과 반대되고, 경안, 사마디, 우뻬까는 들뜸과 반대된다. 그리고 사띠는 모든 곳에 이롭다.

 

  “뾰족지붕 집의 서까래들은 모두 꼭대기 쪽으로 향하고, 꼭대기 쪽으로 쏠리고, 꼭대기에서 합쳐진다. 그래서 꼭대기를 그 모두의 정점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칠각지를 닦고 많이 익힌 비구는,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쏠리고, 열반으로 나아간다.”(상윳따 니까야 5)

 

  다섯 가지 장애

  혼침과 들뜸은 수행의 길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애이다. 이런 장애들을 경과 논은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이 다섯 가지 장애의 한역은 ‘五蓋’, 다섯 덮개이다.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❶관능적 욕망 ❷악의 ❸혼침 ❹들뜸 ❺의심

 

  ➊갈애라고도 부르는 관능적 욕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기쁘고 즐거운 것이 있는 거기에 갈애는 생겨나고 뿌리 내린다’는 염처경의 경구로 대신해두자.

  ➋악의는 싫은 대상에 따라오는 나쁜 마음부수를 가리킨다. 불쾌한 것에 대한 반감, 의기소침, 분노 등이 이에 속한다.

  혼침과 들뜸은 개념이 모호한 구석이 있고 중요한 개념이어서 보다 상세한 이해를 위해 설명을 잠시 미뤄둔다. 

  ➎의심은 빨리어 ‘위찌끼차(vicikiccha)’인데 ‘고칠 약이 없음’을 뜻한다고 한다. ‘정신적 가려움증’이라는 주석도 있다. 현대적 고질병인 아토피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 병의 증세는 어떤가? 주석서는 ‘분명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눈앞에 위험이 닥치는데도 어쩔 줄 몰라 곤혹을 겪는 사람의 병은 깊다. 확신 없는 자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수행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이제 미뤄뒀던 설명으로 돌아가보자. ‘혼침과 掉擧(도거, 들뜸)가 선수행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구절은 선어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경우, 혼침과 들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어느 선사의 법문에서도 들은 적이 없다.

  선방에서는 선수행 중 몰려드는 정신적 혼미함이나 졸음을 혼침으로, 화두가 들리지 않고 생각이 꼬리를 무는 상태를 들뜸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개념들은 초기불교의 중요한 수행개념이고, 경전 곳곳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개념이다. 

  ➌혼침은 티나(thina)와 밋다(middha)라는 한 쌍의 나쁜 심리상태로 이루어진다. 티나는 마음의 나른함이고, 밋다는 마음부수의 음울함이다. 마음이 느슨해져 있으면 마음상태는 음울해진다. 혼침은 육신의 피로가 아니라 정신의 해이함, 나태함이다. 해이하고 나태한 정신은 정신적 발전을 지체시킨다. 혼침은 굳어버린 버터나 숟가락에 들러붙은 물엿에 비유된다. 해이하고 나태한 정신은 결국 무감각과 무관심으로 발전해서 도덕적 올바름과 정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치명적 장애가 된다. 정신적 노력, 위리야를 통해 극복이 가능하다. 

  ➍들뜸은 ‘웃다짜(uddhacca)’와 ‘꾹꾸짜(kukkucca)’의 결합으로 되어있다. 들뜸과 회한, 또는 동요와 걱정이다. 아라한의 경지에 가서야 완전히 없어진다고 한다. 모든 불선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동요이다. 그래서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의 마음은 들떠있기 마련이다. 죄를 짓거나 참을성 없는 사람들이 이 장애로 고통 받는다. 이들의 마음은 마치 ‘흔들리는 벌통 속 벌떼’와 같다. 이런 정신적 흔들림은 수행을 방해하고 정신적 향상의 길을 막는다.

 

“바람결에 출렁대는 물결처럼, 바람에 부딪혀 흔들리는 깃발처럼, 돌아 맞아 흩어지는 재처럼

산란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청정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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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으로 속 태우는 마음 역시 그렇다. 나쁜 짓에 대한 반성은 꼭 필요하지만 후회는 부질없다. 엎지른 우유에 후회는 헛되고 소용없다. 이런 마음 씀씀이는 ‘강 건너려는 사람이 강 건널 생각은 안하고 건너편 강둑더러 이리 오라’(디가 니까야)고 하는 것처럼 헛되고 또 헛되다. 

 

  담마위짜야

  칠각지, 즉 깨달음의 요인 일곱 가지 가운데 첫 번째인 사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두 번째인 담마위짜야, ‘擇法覺支’에 대한 설명은 필요할 것 같다.

  담마, 곧 法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뜻한다. 범위를 좁혀서 얘기하자면 수행의 대상인 ‘몸과 마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된다. 이 대상들은 어느 순간 일어나서 절정에 이르고 이내 사라진다. 마치 홍수 때 강물이 절정에 이르러 범람하다가 차츰 세력이 꺾이는 것과 같다.

  대상들이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시간으로 따져보면 그야말로 찰라지간이다. 전광석화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와 같아서 한 대상이 찰라라도 지속하거나 반복되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이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틀 안에서 일어나긴 하지만. 수행자는 이런 대상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냉철하게 따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먼저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까지도 스스로 따져보라고 붓다는 말한다.

  한 번은 니간타 나타뿌따(자이나교 교주)의 열성스런 제자인 우빠알리가 붓다를 찾아와 법문을 듣고 신심이 일어나 그 자리에서 붓다에게 귀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붓다는 “우빠알리여, 어떤 진리든 철저히 검토 확인해 보도록 하라”고 말씀하시고 우빠알리를 만류하셨다. (맛지마 니까야)

  붓다는 수행자들에게 자신의 설법까지도 철저한 검증을 거칠 것을 권했다. 먼저 길을 간 사람에 대한 추종이나 믿음보다 스스로의 검증이 더 우선이라는 태도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 ‘우리는 우리 스승을 존경하니까 그분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존중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대 자신들이 스스로 알고, 보고, 터득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맛지마 니까야)

 

  찰라간 명멸하는 대상은 결코 맹목적 믿음으로는 다룰 수 없다. 칠각지 중 첫 번 째인 사띠를 통해 그것들을 포착해야 한다. 그런 다음 마음이 알아차린 대상을 식별하고 추론하고 검토해야 한다. 대상에 대한 이런 날카로운 분석이 바로 택법각지이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이런 정신을 통해서만 통찰지의 개발이 가능하다. 통찰지가 개발되면 이를 바탕으로 무상하여 괴로움으로 가득 찬 세계의 실상, 실체 없이 空한 세계의 실상, 즉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특성을 사무치게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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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28일 17시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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