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소국 인식으로는 강중간국도 못 만든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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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의 제목은 조세희의 소설(난쏘공)에서 따왔다. 하지만 공은 조세희가 그린 70년대 산업화 물결에서 소외된 서민의 삶에서 꿈으로 등장한 사랑과 희망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상황을 말해주는 궤적을 형상화한 것일 뿐이다. 조금 올라가다가 이제 곧 떨어질 것 같은 작은 포물선: 그것이 우리가 아닌지 두렵다. 정치, 경제, 사회 모두 무기력증에 빠졌다. K-pop과 여성 골프만 예외다. 노령화와 성장률 그리고 정쟁(政爭)이 그 증좌다. 우리는 큰 원반을 던지지 못하고, 그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자만하면서 그 과실을 분배하여 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던진 공은 그저 그런 반원을 그리면서 곧 추락할 것이다. 날개도 없이 말이다. 세계사에 흔적도 남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우리 사회에 ‘한번 해보자’던 그 열기가 사라진지 오래다. 개인보다는 조직을 조직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을 이제는 고인돌 같은 꼰데 층에서나 희귀하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들도 타도의 대상을 향하여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분들이어서 사회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남이 무슨 소리를 하던 각자도생, ‘내 살 길은 내가 찾아야한다’는 풍조가 쫙 퍼졌다. 특히 젊은이를 둔 가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기적 폭력시위를 경찰에 자녀를 보낸 엄마가 막으려고 나선 세태는 산산이 흩어진 파편화(fragmentation)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혁신적 기업가 정신은?
우리경제는 늙은 징후가 농후하다. 제조업은 활기를 잃은 지 오래되었고, 서비스업은 좀체 개선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그 동안 품질이 나았던 몇 제품도 곧 중국에 밀릴 것이라는 전경련의 조사보고가 나왔다. 가격경쟁력도 싼 엔화 때문에 밀리고 있다. 둘 사이에 낀 샌드위치(sandwich)가 아니고, 두들겨 맞는 무기력한 모래주머니, 샌드백(sandbag)이 되었다. 명동을 메운 관광객 중에서 한심한 제품의 품질과 정직하지 못한 서비스에 속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일까? 며칠 전, 집 앞에 있는 음식점 주인에게서 ‘자신이 경영하는 명동 음식점’에는 가지 말라는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고 동경으로 갈 것이라고 중국관광객도 우리 서비스업주도 다 알고 있다.
창조경제를 소리치고 있는 정부 내에서도 이미 수명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린다. 경제의 척추는 한 때 제조업이었다. 이제는 고부가가치 제조업과 정보지식 산업 그리고 금융, 의료 등으로 변해야 한다. 헌데 면세점 경쟁만큼 제조업과 금융에 신경 쓰는 대기업이 있나? 구조조정에 나서는 대기업이 보이는가? 재벌 2세들은 이 나라의 귀족이다. 기업가의 혁신정신은 귀족의 사치와 형제간이 될 수 없다.
전망도 밝지 않다. 잘 되면 1인당 GNI가 2023년이 되어야 4만 달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2006년에 2만 달러를 통과하였으니 두 배가되는 데 17년이 걸린다. 1970년대까지 세계는 경험하지 못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여성노동력과 과학기술의 힘이 바탕이 되었다. 영국이 14년이 걸렸는데, 심한 영국병을 앓았다. 맹주 자리를 통일독일에 넘겼다. 이탈리아는 13년이 걸렸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정치가 후졌다. 일본은 환율효과가 커지면서 8년이 걸렸다. 노령화와 재정적자로 20년 이상 고통을 받고 있다. 8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할 수 있는 여지는 후진국 몇 개국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추격으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4만 달러에 도달할 수 있는 지도가 있는가? 초속으로 진행되는 고령화 문제나 안정적 대북 관계를 만들 창의적인 대책이 없다면, 미시적 경제 고도화만으론 공을 더 높이 더 멀리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큰 소리 쳤던 건설, 조선, 철강, 유화는 맥이 빠졌다. 기술경쟁력과 혁신인재가 관건이다. 청년일자리성금 보다는 R&bD와 대학과 연구소에 타겟팅을 제대로 한 투자가 더 급하다. 대외의존도를 줄이고 가계소득을 높이는 대책도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말 뿐이다. 민간 대기업이 먼저 기업가 정신과 좋은 지배구조를 창출하여 앞서도 정치권도 관련 입법으로 열성껏 지원해야 한다. 추격모델(catch up model)은 한계에 도달하였다. 그것에 따르면 절벽과 추락만이 있을 뿐이다.
경제 혁신의 Sigmoid.
성장곡선은 S자(字) 모양을 하고 있다. 성장의 비율로 보면, 던진 공이 떨어지는 포물선 모양이다. 좀 더 정교한 것은 Sigmoid(성장곡선)함수에서 발견할 수 있다. Sigmoid는 정교한 성장곡선을 지칭하는데 지속적인 혁신의 모멘텀과 방향을 우상향으로 나타내는데 적합한 곡선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인식은 이 성장곡선이 하나 뿐인 역사에 매몰되어 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궤적(trajectory)에 스스로를 가두어선 안 된다. Sigmoid가 우상향으로 계속 위치를 바꾸면서 동태적으로 커지는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용맹정진만이 여러 개의 공을 높게 날릴 수 있다. 금융, 의료, 녹색기술, 소재, ICBMs, 항공, 관광 모두 나름의 Sigmoid를 더 높이 겹쳐서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제도와 행태는 한계점.
정치는 한계 상황에 와있다. 국회의원이 민간 단말기를 빌려서 국가사무실에서 자기 시집의 영수증을 끌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그 아무도 읽지 않을 책의 출판기념회가 동내를 시끄럽게 한지 오래 되었다. 70년대의 유행어 ‘공안’이 리바이벌 되고 있다. 선거공학이 가장 먼저 나서고 있고, 여당을 ‘명령과 통제(command and control) 방식으로 다루고, 반대당을 요리하고, 여론전을 펼치고 반대여론 묵살하는 기술공학 정치에 함몰되어 있다. 국가를 걱정하게 만들고, 사회를 통합하고, 갈등을 줄이고 평화를 선물하며, 남북문제를 풀고나갈 높은 정치는 없다. 새로운 피의 초청으로 낮은 정치를 높은 정치로 만들어야 한다.
정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민간 조직과 국민을 규율하는 전근대 행정에서 별반 변하지 않았다. 말은 서비스 행정이니 플렛폼(platform) 행정이니 정부 3.0이니 하지만 그 변화가 너무 느리다. 곳곳에 규제와 통제가 공직자의 소명이라고 믿는 이들이 도사리고 있다. 의식이 있는 공직자들은 대개 기획직에 머물고 통제위주의 100만 관리들이 민간을 옥죄고 있다. 인식과 행동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 논리의 극복
해방과 건국, 산업화, 민주와, 선진화라는 단선적 인식으로서는 한번 쏘아본 난쟁이 공 신세를 능가할 수 없다. 이미 조세희가 꿈 꾼 산업화 시대는 곳곳에 전태일 동상을 남겼고, 민주화 시대의 상처도 광주를 비롯하여 도처에 남아 있다. 선진국을 따라 추격한다는 인식으로서는 한국 사회에 무겁게 내리우지는 중진국의 장막을 걷어 낼 수 없다. 추격모델은 기본적으로는 논리와 이론은 미국, 행동과 실무는 일본이라는 이원구조(二元構組)를 가지고 있다. 그간의 갈등이 많았다. 산업화와 민주화간의 시간차 갈등도 여기에서 파생했는지도 모른다. 혁신의 단계로 진입하여야 한다. 일본이나 미국과 다른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여야 한다. 산을 뚫고 물을 건너야 한다.
강력한 척추: 집합적 협업체계
인간의 장기를 매달고 있는 것이 척추요, 한반도의 척추는 백두대간이다. 더 큰 사회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인구를 늘리는 일과 다르다. 도전하는 인구가 중요하다. 또 개인이나 소집단이 뭉쳐야 사회를 크게 만들 수 있다. 이기적 소집단들의 모임은 골다공증을 유발시킬 뿐이다. 부정, 비난, 오만, 공격, 기만은 다른 사람의 에너지를 뺏는다. 구성원의 수보다도 더 작은 난쟁이 사회가 된다. 에너지를 창출하는 융합을 만드는 데는 척추를 강하게 세우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야 한다.
정치의 척추는 역시 국회고, 경제의 척추는 기업이고, 사회의 척추는 시민과 언론이다. 자신의 약점을 이해함이 없이 상대를 손가락질하고, 공격하는 문화부터 허물어야 한다. 벽을 허물 사회적 소통이 필요하다. 여기에 바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국민소통을 위한 제도적 준비는 나라의 척추인 대통령실이 나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주소이다. 난제해결과 갈등해소를 위한 결단의 공간이 필요하다. 입씨름 꾼과 선거꾼들의 장이 된 사회적 공간을 전환시킬 리더십이 필요하다.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고 나라를 꺾어 내리려는 파당적인 인물과 언론을 배제하여야 한다. 진정한 변혁(transformation)을 가능하게 하는 논의의 장을 파터너 사회(partner society)를 만들 때가 무르익었다. 사회, 기업, 언론, 대학의 리더들도 나서여 한다. 이 문제를 접근하는 데는 시간의식이 필요하다. 현재는 너무 느리다. 걱정하는 토론회만 연다. NATO(No Action, Talk Only)가 문제다. 불교에서 업은 쌓은 것이라고 했고, 쌓는 것은 행동이라고 했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야마다 큰 공을 높이 쏘아서, 한없는 궤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리더를 대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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