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교육감 대거 당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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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어느 쪽도 승리를 주장하기 어려웠던 6․4 지방선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진보 성향 교육감들의 대거 당선이 아닌가 싶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13곳에서 전교조 간부를 지냈거나 진보 성향이 뚜렷한 후보들이 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한 결과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한국 학부모들은 진보 성향 교육수장에게 자녀의 학교교육을 맡기는 데 상당히 유보적이거나 부정적인 편이다. 자신들의 정치 성향에 비해 교육문제에서는 좀 더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이러한 흐름에 거슬러 진보 성향 교육감 후보들이 대거 학부모들의 선택을 받았다. 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단일화의 위력
진보 성향 교육감들의 약진에는 무엇보다도 선거구도의 영향이 컸다. 대부분의 시․도에서 진보 성향 후보들은 단일화에 성공했다. 반면 보수 진영 후보들은 단일화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 교육수장에 대한 선호가 강한 풍토에서 진보 진영 후보들에게 단일화는 절체절명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진보 진영 내에도 정파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일화를 이루어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 단일화를 외면하기에는 보수 정권 아래에서 노정되고 있는 교육현안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워낙 강렬하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에도 대부분의 시․도에서 진보 진영 후보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단일화를 이루어냈다. 반면 많은 지역에서 보수 성향 후보들은 굳이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여전히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을 수 있다. 더욱이 대다수 보수 진영 후보들은 진보 진영 후보들에 비해 비교적 대접받으며 평탄한 삶을 살아왔고 권력의 위력에 대해서도 훨씬 더 익숙해 있지 않은가. 이러한 경우에 당선을 담보하기 위한 양보나 희생이 자신이 아닌 다른 입지자의 몫으로 치부되는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의 여파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대다수 국민들은 집단적으로 완벽한 감정이입을 경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학령기 자녀를 둔 부모들은 꽃다운 어린 생명들이 눈앞에서 하릴없이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번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과 똑같은 비통함과 참담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부모들은 가족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교육의 본령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결과 자녀가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건강하게 곁에 있어만 준다면 고맙다는 정서가 학부모들 사이에 폭넓게 자리를 잡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중산층 학부모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불량맘’ 신드롬이 이를 방증한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불량맘’ 십계명에는 ‘아이를 실컷 놀게 하라’, ‘사교육을 시키지 말라’, ‘아이를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라’, ‘아이가 내 곁에 있음을 감사하라’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 세칭 일류대를 졸업해도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한 현실에서 하루라도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고 싶다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는 것이다. 만일 세월호 사태가 학부모들의 정서나 인식에 이 같은 변화를 가져왔다면 보수 진영 교육감 후보들이 표방했던 경쟁 지향, 학력지상주의, 수월성 교육 등은 소구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진보 성향 후보들이 내걸었던 인성교육, 평등교육, 행복교육 등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이전보다는 훨씬 더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을 개연성이 크다.
통상 정당 공천이 없는 교육감 선거는 깜깜이 선거, 로또 선거로 불리곤 했다. 유권자들의 관심이 낮아 유력한 시장 또는 도지사 후보와 동일한 기호를 받는 게 당락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교육감 선거의 경우 캔디 고(Candy Koh)가 촉발한 후보들 간 진흙탕 싸움 때문에 교육감 선거가 전례 없는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면면에 대해 좀 더 충분한 검토를 하게 되었고 후보들 간 공약의 차이에 대해서도 이전보다는 많은 학습을 한 상태에서 선거에 임했을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적어도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 진영 후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음직하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대한 염증과 피로감
세월호 참사가 학부모들로 하여금 가족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교육의 본령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참사 이전에 그간 우리 교육현장을 지배해온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에 대한 학부모들의 염증과 피로감이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보아야 한다. 1995년의 5․31 교육개혁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진보 성향인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에도 핵심기조를 면면히 유지해 왔고 이명박 정부에서 만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율형 사립고의 전면적 도입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정수에 해당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고교다양화30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도입된 자율형 사립고는 처음부터 논란의 소지가 많은 제도였다. 무엇보다도 전국적으로 자율형 사립고 100개교를 육성한다는 목표 자체가 현실성이 없었음은 물론 합리적 근거(rationale)도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도입 여건이 양호한 서울시를 중심으로 무리하게 정책을 추진하는 바람에 일반고 슬럼화 및 황폐화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오죽하면 정권이 채 끝나기도 전인 2012년 5월에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보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율형 사립고 100개 정책은 실책이었다”고 토로했겠는가. 자녀를 일반고에 보낸 학부모는 물론 자율형 사립고의 학부모 모두 불만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점을 교육당국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교육이 희망을 주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교육이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더 이상 기능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무런 꿈이나 희망도 없이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자녀를 바라보며 깊은 시름과 회한에 젖어 있는 학부모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현 정부와 보수 성향 후보들은 이를 살피고 대안이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소홀했다. 교육을 통한 부의 대물림에 핵심기제로 작용할 수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폐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자율형 사립고 제도를 두고도 거듭 현상 유지를 천명해왔다. 보수 진영 교육감 후보들의 쇠락을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던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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