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85> ‘무명도공의 비’를 보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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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열정을 통해 얻어진 명성만이 참된 명성이다. 평생을 청자나 백자를 만드는 일에 정진해서 드디어 위대한 가치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위대함을 남기신 분들은 그들의 작품에 개인의 서명조차 남기지 않았다. 세계가 선망하는 작품을 남기고도 그들 자신은 ‘무명’으로 남았다. 전율스럽다.
경기도 광주를 지나 이천 쪽으로 가다가 경사진 비탈길 옆, 한 곳에 “無名陶工(무명도공)의 碑(비)”(아래 사진)가 서 있다. 경기도 광주시는 매년 '무명도공의 비' 앞에서 제향을 봉행한다.
‘무명도공의 비’는 왕실용 최고급 백자를 제작하고 유행을 주도한 조선조 도공들의 장인정신과 예술혼을 되새기고 그 뜻을 이어가고자 1977년 건립됐다. 도공의 비는 이후락의 헌금으로 조각가 최의순이 제작을 맡고 비에 새겨진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가 지었으며 서예가 이기우가 글자를 새겼다.
고려의 청자나 조선의 백자가 지니는 그 우아한 품격과 아름다움의 절정을 만들어낸 것은 모두가 도공으로서의 생에 헌신한 우리들의 조상들이었다. 그들은 평생을 흙에 걸고 흙 속에 혼령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헌신을 딛고 청자의 비색을 만들어 냈으며 백자의 은은한 기품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적 절정을 이끌어 담은 도자기를 만들어 냈을 뿐 거기 어디에도 그들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 위대한 예술가들은 「무명도공」이 되었다.
누구도 ‘무명(無名)’인 사람은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름을 지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사람들에게 두루 불리워지게 되면서 단순히 ‘어느 사람’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이 지니는 인품과 사람됨까지를 지시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상엔 영광스러움으로 기록된 이름도 있고 부끄러움으로 기록된 이름들도 있게 마련이다. 이름을 어떻게 잘 간직하고 훌륭한 가치를 이루어낸 인물로 가꾸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종요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일 게다.
그런데 요즘 세상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염치고 체면이고를 던져버리는 세태가 되어 버렸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한 걸음 나아가 거기 조그마한 이권이라도 걸려있다면 이건 차라리 싸움판이 되어버리는 걸 우리는 종종 보고 있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참으로 가치 있고, 참으로 뜻깊은 것은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닌 걸 어쩌랴. 참으로 가치 있는 건 묵묵히 쌓아가는 자기성장에 있으며, 그런 자기 성장의 결과물에 있는 것이다. 진정 가치 있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침묵한다. 묵묵히 견디면서 주어진 일에 정진한다.
땀을 통해 얻어진 명성만이 참된 명성이다. 땀이 뒷받침되지 않은 명성은 허망한 것이거나 거짓된 것일 게다. 평생을 청자나 백자를 만드는 일에 정진해서 드디어 위대한 가치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땀의 흔적들이 스며있는 고려청자나 조선청자나 조선백자는 위대함일 수 있고, 드높은 가치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위대함을 남기고도 그들 자신은 ‘무명’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전율스럽다. 이름 몇 자를 남기기 위해 인격도 양심도 버리는 세상을 향해 「무명도공의 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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