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융화를 시도할 때가 되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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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미래연구원’의 활동을 보면 사회변화를 위한 용기있는 변화의 조짐을 볼 수 있다. 이 연구소의 출발은 현 정부와 관련이 있는 보수적 식견을 가진 학자들이 주축이 되었다. 하지만 글을 싣는 사람들을 보면 제법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인사들도 눈에 띤다. 논의되고 있는 글들을 비교하면서 보면 자칫 한 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편견을 교정하고, 균형을 살리면서 사안을 종합적으로 보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대비되는 견해는 종합적인 이해에 필수적
흔히 보수와 진보로 학자들을 나누기도 하지만, 엄격하게 보면 문제가 적지 않다. 보수는 우리가 지켜온 가치와 전통의 내용이 어느 정도 합의 가능하기에 그 실체가 구체화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ideology)이지만, 진보는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의 내용을 차용하지 않는다면 그 내용을 획정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보수나 진보를 그 사회의 과거와 현재 궤적을 두고 지킬 것인가 바꿀 것인가를 두고 씨름하는 입장(position)이나 자세(stance)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이 학문적인 구획과는 다른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 내용에는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상당히 진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어쨌든, ‘국가미래연구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보적인 인사들의 포럼인 ‘좋은정책포럼’과 토론회를 가질 계획이라고 한다. 계속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이번을 계기로 서로 노력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전문가가 현안 문제를 다루는 정책방향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개진할 진지한 계기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각선 뒤에는 보수와 진보의 사상적 색채와 논리가 버티고 있을 것이다. 또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주관하는 ‘정책박람회’가 4월 6,7,8일에 열리는데 그 행사 중에 최근 경제 이슈인 소득주도 성장과 최저임금에 대한 토론을 벌릴 것이라고 한다. 물론 복지문제가 동전의 앞뒤와 같이 따라가면서 논의될 것이다. 물론 토론의 주역은 보수 학자들과 진보 학자들일 것이다. 정치인과 실무경제인은 쉽게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보 연구소인 ‘경제개혁연구소’. ‘경제개혁연대’와도 상시 토론하고 대화하는 상설대화체널을 구축하는데도 합의하였다고 한다. 이들 연구소는 시민사회의 특징인 자율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운영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소위 보수와 진보 진영(?) 학자들간의 진정성 있는 자발적 활동이다. 이들이 모두 정치.정부.재벌로부터 자유로운 “열린정책 플렛폼”을 지향하고 있으며, 전문가로서의 지식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띤다.
타성과 관성을 탈피할 때가 왔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 언론매체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그리고 좀 더 큰 규모로는 대학 구성원들 간에 이러한 시도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연구원 차원의 열린정책 시도는 이제 시작이다.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은 국가체제의 경우에 오래 지속된다. 보수와 진보 모두가 동의하는 바는 한국사회가 광복이후 70년 동안 정부주도의 집권적 발전국가체제라는 점일 것이다. 특히 경제와 정치분야의 집권성은 상당히 고질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사들이 많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국민의 혈기와 열기로 이루어져 왔다. 그 에너지가 지력(知力)과 슬기로 전화된 시점이다. 하지만 국가체제의 구조나 운영에서 뚜렷한 방향전환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구조적 다기화와 분권은 요원하고 분야 간의 견제와 협력의 지혜는 아직도 요원하다. 보통 정부와 경제계를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시민사회의 활동가들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분권적 참여 거버넌스는 시민사회의 조밀한 구성과 성숙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제권력이나 정치권력이 집권화되어 권위주의적인 속성을 노골화하면서 막 태어난 시민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은 80년대나 90년대에는 수용될 수 있었다. 지난 50년간의 한국시민사회는 유사시민사회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관변조직이거나 반정부조직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집권적 권위주의에 대한 시민 행동가들에게 이러한 극단의 구조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존의 어느 한쪽으로 분명한 방향성을 가져야 인식이 용이하고 그것이 시민행동가들에게는 오히려 생존에 익숙한 방법으로 수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현실에서 얻는 것도 있었지 않는가?
한국에서 국가는 아직도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시장을 누르고 사회생활에 개입한다. 규제국가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비공식적이고 일탈적인 행태가 자주 목도되는 것도 국가의 무게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희구 때문일 것이다. 특이 잘 발달된 집권적 관료제는 시민사회의 발전궤적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하여 자발성(voluntarism)이라는 시민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가 정부의 방침에 따른 관료주의적 보상에 끌려가는 동원된 참여로 여겨지는 점이 있다.
하지만 2015년 한국 사회구성원의 정보해독 수준이나 글로벌 의식수준으로 볼 때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구조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없고,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리더십을 한정적으로 보아서도 안 될 일이다. 지성의 역사에서 극단화(extremize)는 이론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다. 현실의 개선을 어디까지나 극단성을 따를 수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창조된 진화적 존재인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시민사회를 이끌고 있는 이론가들만이라도 극단성을 배격하고 시민사회의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유형 인간(思惟型 人間)이 가질 수 있는 사고와 발표의 자유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상대 논리를 유연하게 숙고하면서 대응하는 것이 전문가 윤리(professional ethics)이다.
시민사회의 선두에 있는 지식인의 소명
우리사회의 민주화 정도는 선거의 제도화를 넘어선지 오래되었고, 각종 법률과 규정으로 절차상의 민주주의 제도화하는데 이르고 있다. 70, 80년대 전개된 반독재 투쟁과 노동운동 시기를 2015년 오늘과 비교하면 나름 민주주의가 진전된 것임을 실감할 수 있다. 이제 민주주의를 더욱 심화시키기(deepening democracy) 위해서는 가족의 범위를 능가하는 다양한 조직과 공동체의 인식이나 민주적 관례의 토착화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는 시민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문화적 각성이 필요하다.
사회적 이슈가 상대를 공격하는 투쟁적인 것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일자리 창출, 복지재정 문제로 옮겨가고 있는 것을 보면 점점 생활정치로 정치의 방향이 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투쟁보다는 민생과 소통을 화두로 삼고 있는 데서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넘겨볼만 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제주 민군복합항만이나 밀양 고압송전탑 문제 등은 미묘한 이념성향에 지역의 이익문제가 결부된 국가적 과제였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역의 문제 해결과정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다기화한 형식으로 거론되고 있는 심의 혹은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도 사회적 진전을 밝혀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전문가나 이론가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장형 실무자(現場型 實務者)들은 오늘. 내일의 현안에 매달려서 숙의할 여유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론가들은 달라야 한다. 넓은 폭으로 사유하고 토론하는 유연성(flexibility)이 생명이다. 특히 시민사회의 핵심구성체로서의 지식인 집단이나 단체는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과도하게 극단화된 좌우 대립의 자세를 완화시켜야 한다. 민생을 창조할 대안 제시에 나서야 한다. 사실상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과 순수성을 극단으로 잘 못 숙지하고 있는 몇 시민단체의 대립으로 꼭 필요한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이 계속적으로 지연되고 있다. 대기업 정책, 노동정책, 금융혁신정책, 기술중소기업과 벤처 육성 문제와 같은 분야별 정책을 비롯하여 경제의 고도화와 고용안정 대책도 과거를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복지 분야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되고 있는 보육시설의 운용상의 문제는 물론이고 복지재정구조의 개선이나 학교급식 정책, 그리고 초고령 사회 대책 등에 대해서도 공무원 연금과 같이 30년-50년을 내다보는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먼저 나서는 이들에게 박수를
현실의 정책과제를 보면 보수와 진보 논쟁은 전체를 조망하는데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뒤에서 사소한 주변부의 문제로 서로를 백안시하지 말고 융화(reconciliation)의 용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에 국가미래연구소가 내미는 손은 용기 있는 손이다. 앞으로 두 팔을 활짝 벌려 다른 편에 있는 용기 있는 숙의의 대상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악수와 포옹에 박수를 보내는 시민사회가 필요하고 나아가 정치권의 변화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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