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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과 세습 –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멍에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03월26일 19시49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2시40분

작성자

  • 김상조
  • 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연대 소장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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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재벌과 세습 –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멍에

 

  지난 3월 10일(화) KBS의 <시사기획 창>은 ‘재벌과 세습’편을 방송하였다. 세 꼭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1부에서는 재벌 총수일가들이 일감 몰아주기와 회사기회 유용 등을 통해 회사의 이익을 사유화하는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2부는 삼성⋅현대차 등의 주요 그룹에서 3세 승계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들의 천문학적 재산이 사실상 불법 위에 서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물론 이상의 사실들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TV 화면으로 전달되는 시각적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이날 방송의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3세들의 경영능력을 평가한 3부라고 할 수 있다. 

 

  삼성 이재용, 현대차 정의선, 롯데 신동빈, 한진 조원태, 두산 박정원, 신세계 정용진, 금호 박세창, 대림 이해욱, 현대 정지이, OCI 이우현, 효성 조현준(이상 2014년 4월 기준 자산 규모 순, 직함 생략) 등 11명의 3세들을 대상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 50명이 내린 평가 결과는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① 승계 정당성, ② 조직 장악력, ③전문성, ④ 노사觀, ⑤ 회사 발전 전망 등의 다섯 항목에서 각각 100점 만점으로 평가했을 때, 11명 3세들의 평균점수는 각각 28점, 47점, 38점, 36점, 39점에 불과했다. 모두 50점에 미달했다. 낙제다. 이들에게 각 그룹의 미래, 아니 한국경제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된다.

 

  11명의 3세들 중에서도 특히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삼성 이재용의 경우 다섯 항목 각각의 점수가 26점, 51점, 35점, 38점, 37점이었고, 현대차 정의선은 29점, 55점, 47점, 42점, 51점이었다. 두 사람 모두 ‘① 승계 정당성’ 항목에서 매우 낮은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삼성 이재용의 삼성에버랜드⋅삼성SDS 주식 헐값인수, 현대차 정의선의 현대글로비스 일감 몰아주기 등 불법으로 얼룩진 승계 과정이 이들 3세 개인은 물론 해당 그룹과 한국경제의 미래에 지울 수 없는 멍에가 되고 있다고 하겠다. 

 

  내가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이날 방송 내용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다섯 항목 중 ‘① 승계 정당성’과 ‘⑤ 회사 발전 전망’을 연결시킨 부분, 즉 재벌 3세들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킨 부분이었다(아래 그림 참조). 통계학적 엄밀성은 제쳐 놓고, 아래 그림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느낌이 무엇인가? 내 눈에 확 들어온 것은, ‘① 승계 정당성’이라는 과거의 문제가 ‘⑤ 회사 발전 전망’이라는 미래에 대한 평가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승계 정당성이 낮으면 대체로 회사 발전 전망도 낮게 평가되었다. 물론 한진 조원태가 두 항목 모두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은 최근 누나가 저지른 땅콩 회항 사건의 영향이 컸을 것이고, 롯데 신동빈이 우등생처럼 보이는 것(그래 봐야 두 항목 모두 60점 미만인 F학점이지만)은 나이가 이미 60이 넘었으니 재산승계 과정이 오래 전에 완료되어 부정적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이 그림으로부터 통계학적 결론을 도출할 생각은 없다. 그저 느낌을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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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3033815 

 

  그런데 그 느낌이 중요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 CEO의 경영능력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지표는 없다. 흔히들 재벌 3세들이 경영능력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비판을 하지만, 어떻게 검증할 거냐고 물으면 답이 궁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3세들에 대한 검증은 결국 그들의 성장⋅훈련 과정에 대한 조직 내외부의 주관적 기억과 대중적 평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3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열린 장소에 나와 대중과 함께 호흡한 적이 없다. 그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기억은 바로 그들의 재산이 불법적으로 증식된 것이라는 점,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회사와 주주의 돈을 훔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그들의 경영능력에 대한 대중적 평판을 좌우하는 사실상 유일한 근거다. 그래서 앞의 그림에 대한 느낌이 중요한 것이다.

 

  재벌총수들은 명과 암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병철⋅정주영 회장 등 창업 세대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슘페터(J.A. Schumpeter)적 의미의 기업가(entrepreneur)라고 할 수 있다. 정치권에 대한 불법적 로비 능력과 무자비한 노조 탄압 능력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대거 등장한 2세들은 아버지가 하지 않은 사업에 새로 진출하여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경영능력을 입증하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보였다. 이에 따른 과다차입 및 과잉투자 압력으로 1997년 외환위기 때 많은 2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했으나, 살아남은 2세들은 ‘재벌공화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런데 요즘 승계 과정을 밟고 있는 3세들은 많이 다르다.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건설한 왕국에서 황태자로 자랐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이들 3세는 도전정신을 상실했다. 더구나 고도성장기를 마감한 한국경제의 현 상황에서는 새로운 사업은 성공의 확률에 못지않게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에 3세들은 기업가정신을 발휘하기보다는 일감 몰아주기와 골목상권 침범 등으로 안전하게 재산을 불리는 데만 몰두하게 되었다. 또한, 언제든지 정보를 왜곡할 준비가 되어 있는 참모조직에 둘러싸여 있어서 세상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그들만의 성 안에서 점점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처럼. 재차 강조하건대, 이는 재벌 3세들에게는 물론 그룹과 한국경제 전체에 매우 불행한 상황이다.

  최근 이른바 이학수법이 발의됨으로써 3세들의 불법적 재산이 사회적 심판대 위에 올랐다. 입법이 될지 여부는 국회의 판단과 국민들의 평가에 달려 있으니,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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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만 충고하겠다. 불법 승계라는 과거의 멍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3세들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지금의 모습에 머물러서도 안되지만,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될 수도 없다. 세상은 변했다. 박근혜 정부가 아무리 경제민주화 공약을 헌신짝처럼 내버렸어도, 2012년의 열풍은 국민 모두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10년 후 한국사회의 변화된 눈높이를 염두에 두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열린 공간으로 나와서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말하고,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공감을 얻으면 CEO가 될 것이고, 실패하면 퇴진을 강요당할 것이다. CEO 자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주주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승인받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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