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1> 패자까지 포용하는 개방성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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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광활한 영토는 대부분 공화정시대에 확보되었다. 포에니전쟁을 끝으로 로마는 서방에서 외부의 적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고도성장을 이룩한 셈이다. 기원전 509년에 출범한 공화정 체제가 360여 년에 걸쳐 이룬 결과다. 로마의 영토를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 서유럽, 소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에스파냐, 마케도니아, 그리스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이 식민지가 된 것이다.
작은 도시국가에서 초라하게 출발한 로마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당시의 교통 상황을 고려할 때 세계적인 제국을 세운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권에서 로마제국의 성장 비결을 이렇게 소개한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방적인 성향이 아닐까? 로마인의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개방성이 아닐까?”
개방성이 모든 결점을 극복하게 했고, 그 결과 영향력이 확대되어 천년제국 로마가 가능해진 것이다. 로마 건국 초기에 로마는 주변 부족에 어떻게 대응해나갔을까? 로마는 패자를 예속시키기보다 파트너십을 인정하고 공동 발전을 모색했다. 약육강식이 일반화된 고대 사회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방식이다. 전투에 패배한 부족이나 동맹국에 똑같은 시민권을 주어 로마인으로 살아가도록 포용했다.
이러한 로마의 개방성은 건국 초기부터 나타나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다.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사건을 계기로 사비니족과 합병하여 공동으로 통치했다. 전쟁에 패한 알바롱가의 모든 주민을 강제적으로 이주시켜 똑같이 로마 시민을 만들었다. 무력에 의해 흡수했더라도 로마는 시민권을 인정하고 동화의 길을 함께 걸어갔다. 로마는 피정복민을 예속시켜 노예로 만들지 않고 동반자로서 개척해나간 것이다. 이런 개방성 덕택에 로마의 외연이 확대되고 다른 민족과 국가에서는 로마와 파트너로서 동행하기를 원했다. 시민의 첫째 의무는 병역이기 때문에, 동화 정책을 통해 로마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패자조차도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로마의 동화 정책은 로마인의 특성이었다. 그러면 아테네의 시민권은 어떨까? 아테네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 아니면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인도 아테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취득할 수 없었다.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아테네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시민권을 얻을 수 없었다.
시민권이란 로마인에게는 로마인과 정신을 공유하는 것인 반면에, 그리스인에게는 피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의 개방성과 아테네의 폐쇄성이 운명을 바꾼 것이다. 로마는 전쟁을 치르고 나면 패배자에 대한 포용 정책 덕택에 시민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만큼 군인으로 동원할 수 있는 역량도 커졌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카이사르는 갈리아전쟁을 치르고 정복했다. 그러나 그들을 동반자로 인식하고 로마화의 우등생으로 만들었다. 의사와 교사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시민권의 외연이 더욱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인은 기원전에 2중 국적을 허용한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에 가면 꿈과 재능을 펼칠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 능력 있는 외국인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것이 바로 로마가 도시국가를 뛰어넘어 세계 국가로 비약하는 원천이 되었다.
로마는 사회, 문화적으로도 개방적이었다. 종교에도 다양성을 인정했다. 다신교를 믿다 보니 신이 30만이 넘었다고 한다. 속주의 종교와 문화는 인정하고 유지하도록 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어를 지식 언어로 숭상했다. 로마는 승자였지만,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승자의 언어인 라틴어와 패배자들의 공통어였던 그리스어를 대등하게 사용하여 2개 언어를 사용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점령지의 문화라도 로마에 유용하다면 수용해서 로마화했다. 훗날 중동의 작은 나라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의 종교에서 발전한 기독교를 처음에는 박해했지만, 결국 제국의 종교로 수용하고 국교로까지 인정하는 포용성을 보여줬다.
개방성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개방적인 마인드에서 유연성, 포용성, 다양성이 비롯되었다. 개방성은 열린 마음, 열린 사회를 만들어 로마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천년제국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지만, 세계 최고 학부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로마는 최고 학부를 로마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로마의 지도층 인사와 자녀가 그쪽으로 유학을 가게 했다.
개방성의 결과는 놀라웠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로마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로마의 식민지였음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자긍심을 가졌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대영제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해협을 건넜을 때 시작되었다”며 로마와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우리의 언어를 말살하고, 심지어 창씨개명을 통해 이름까지 없애려 하지 않았는가? 식민지를 경험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감정과 비교할 때 로마의 개방성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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