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9>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략한 한니발 장군(기원전 218~201)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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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쟁 그리고 또 전쟁.”
전쟁은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주변 국가들을 장악하여 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계속된다. 로마 공화정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전쟁이 없었다면 로마 역사도 세계적으로 조명받지 못하지 않았을까? 전쟁을 끝내려면 평화를 선언해야 한다. 이 평화는 로마가 더 이상 넓힐 영토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했다. 로마 공화정은 전쟁을 통해 고도성장을 계속해나갔으니, 전쟁은 로마의 성장 엔진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270년에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지중해의 강자인 카르타고와 운명적으로 부딪혔다. 원래 로마와 카르타고는 오래전부터 평화조약을 맺은 관계였다. 로마가 이탈리아반도에만 머물렀다면 이 조약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는 반도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로마가 지중해의 승자가 되려면 카르타고와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카르타고와는 3차에 걸쳐 전쟁을 치른다. 반도를 통일한 6년 후인 기원전 264년에 시작해서 기원전 146년에 끝났으니 무려 120년 동안이나 계속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포에니전쟁’이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의 주민(페니키아인)’을 포에니라고 불렀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경 페니키아인들이 지금의 튀니스 만에 세운 나라로, 리비아에서 지브롤터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일대를 장악한 후 에스파냐와 시칠리아 섬까지 식민지로 만들어 지중해의 패권을 쥔 해상 강국이었다.
1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64~241)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중간에 있는 시칠리아의 영토와 제해권을 수호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을 무대로 일어났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패하여 시칠리아를 로마에 빼앗기고 만다. 2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18~201년)은 한니발 장군이 주인공이다. 그는 이미 9세 때 아버지를 따라 에스파냐로 향하면서 “평생 동안 로마를 원수로 생각하고 로마를 무너뜨리기 위해 헌신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키우며 전쟁 준비를 하여 2차 포에니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 역시 17년 동안 계속되면서 로마를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 리비우스는 “한니발의 리더십하에 치러진 2차 포에니전쟁은 전쟁사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이다”고 할 정도였다.
한니발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로마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그는 역발상으로 로마를 공격했다. 로마와 지중해에서 국지전을 벌이는 것은 불리하다는 판단하에 로마의 심장부에 직접 뛰어들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군대를 이끌고 역사상 처음으로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기상천외한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가 이끈 군대는 보병 5만 명, 기병 9,000명, 전투용 코끼리 37마리였다. 당시에 코끼리는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신무기였다. 한니발은 자신의 그리스어 교사인 실레노스를 기록자로 대동했다. 그가 역사와 기록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과정 등이 알려진 것은 바로 실레노스의 기록 덕택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한니발의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한니발은 부하들을 어떻게 감동시켰을까? 병사들이 추위에 떨면 그들과 함께 같은 막사에서 밤을 새우며 따뜻한 인간미를 나누었다. 병사들이 탈진하여 휘청거리고 쓰러질 때 “고지가 저기인데 여기서 쓰러질 수 없다”며 장차 받을 기쁨과 영광과 보상을 상기시켰다. 이렇게 해서 15일 만에 알프스를 넘는 데 성공했고, 마주치는 로마 군대마다 쳐부수며 로마인의 간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승승장구하던 한니발은 칸나이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둔다. 군사적 천재성, 전략, 용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역사에 남을 만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함정에 빠진 로마군은 학살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참패했다. 몸젠은 『몸젠의 로마사』에서 로마군이 완벽하게 전멸한 사례라고 평가하면서 양쪽의 피해 상황을 기술했다. “한니발은 6,000명이 채 못 되는 병력을 잃었다. 하지만 로마군은 7만 6,000명 중에서 집정관 루키우스 파울루스와 대리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장교들의 3분의 2, 원로원 의원 80명을 포함한 시신 7만 구가 전장을 뒤덮었다.” 이 소식이 로마와 동맹국들에 전해지자, 일부 동맹국과 식민시가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섰다. 한니발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다. 소수의 정예부대만으로 적지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는 승리를 바탕으로 동맹국들의 이탈을 노려 합류하는 전략을 구사하려 했는데, 그것이 일단은 맞아떨어진 셈이다.
로마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한니발은 로마인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항복 조건을 제시하는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싸울 것을 결의했다. 로마인들은 위기가 닥치면 항상 단결하여 승리를 이끌어내는 인내와 도전과 희생의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니발을 맞아서도 장기전으로 맞서는 전략을 세웠다.
지구전을 지휘하는 리더는 파비우스 장군이었다. 오늘날 전투에서 지구전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로마가 장기전으로 전환하자, 한니발은 이탈리아반도 남부로 방향을 틀어 동맹국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몇몇 동맹 도시들이 한니발 쪽으로 돌아섰지만, 대부분의 동맹 도시들이 로마와 의리를 지키며 협조했다. 이것이 한니발에게는 오산이고, 로마에는 저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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