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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스물네 번째 이야기 불교는 마음을 이렇게 본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2월02일 16시06분
  • 최종수정 2017년12월08일 13시56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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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테라바다와 비슈디마가

  불교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또 많은 사람들이 여기고 있는 것처럼 과연 불교는 유심론인가?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테라바다 부디즘이 그려놓은 마음의 지도를 따라가 보자. 물론 그 지도는 붓다 자신이 그려놓은 건 아니다. 붓다의 제자들, 테라바다 논사들이 수 세기에 걸쳐 완성해 놓은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5부 니까야(경)로 집대성됐는데, 한자문화권인 우리에게는 아함경 4부로 전해졌다. 5부 니까야가 어떻게 4부 아함이 되었을까? 니까야는 본래 팔리어로 편집됐는데, 수 세기 뒤 불교의 수호자를 자처한 아쇼카 왕이 성스러운 경전은 성스러운 언어로 기록돼야 한다며 산스크릿으로 번역 편찬했다.

  중국에 전래돼 한역되는 과정에서 이 경전은 여러 부파들의 경전을 나름대로 체계를 세워 4부로 편집돼 한역 대경장에 편입됐다. 그 오리지널인 5부 니까야는 스리랑카에 전해져 팔리어로 남아 있다가 19세기 초 발굴,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이 팔리본 니까야는 초기 불교를 비롯한 불교 전반의 연구에 귀중한 텍스트가 되고 있다. 

 

  아무튼 아함, 또는 니까야의 주요사상은 사성제와 연기이다. 이를 바탕으로 마음의 철학을 세련되고 구체적으로 다듬어 간 사람들은 후대의 승려들이다. 붓다의 사후 100년경에 제자들 사이에 붓다의 법을 해석하는데 견해차이가 생겨 크게 두 파로 갈리게 되는데, 이를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갈리고 두 부파로부터 여러 갈래의 분열이 일어나는데, 이 시대의 불교를 통칭하여 ‘부파불교’라고 부른다. 참고로 대승불교는 대중부 계통의 부파에서 비롯됐다는 이론이 설득력이 있지만 확정된 학설은 아니다. 

  부파불교에서 활약했던 학승들을 ‘논사’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저술이 ‘논서’이다. 보통 경, 율, 논을 삼장이라고 하는데 논서들을 모아놓은 것이 ‘논장’이다. (과거 독재정권시대 동숭동에 ‘논장서적’이라는 책방이 있어서 이곳에서 금서들을 사다 많이 읽었다. 지금도 그 책방이 있는 지 궁금하다.)

 

  논사들의 해석과 사상을 담은 불교의 논서들은 여럿이다. 북방 부파의 구사론, 성실론, 발지론, 대비바사론 등 10여종, 대승의 대승장엄경론, 대승기신론, 대지도론, 중론, 백론, 성유식론, 성실론 등 30여종, 선불교의 간화결의론 이입사행론 등 수십 종이 있다.

  그러나 테라바다의 논서는 해탈도론, 청정도론, 아비달마 상하 등이 전부로 많지 않다. 이 가운데 비슈디마가, 즉 청정도론이 사상을 대변하고 테라바다 수행자들의 텍스트가 돼왔다. 그래서 불법에 대한 테라바다의 견해는 비교적 일관성이 있어서 수행자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가 따라가 볼 마음의 지도는 테라바다의 것이다. 

 

  마음은 하는 일은 알아차림 뿐

  현대심리학은 프로이트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는 빙산이 자신의 실체를 거의 바닷물 속에 감추고 있듯, 현상적 마음의 심연에 숨겨진 저변의 마음이 있다고 주장한다. 감춰진 마음이 행동을 지배하는 숨은 조정자이며,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알게 모르게 드러나는 그 조정자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에 와서 그의 이론은 지지보다는 비판을 많이 받지만, 반대진영까지를 포함한 심리학의 원조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받은 영감을 체계화하려는 지나친 욕구 때문에 비판자를 양산한 셈이다.

 

  하지만 마음의 정체가 심층적으로 보일만큼 복잡다단하다고 본 점에서는 옳았다. 요가짜라(유식론)는 식의 흐름이 마치 폭포와 같다고 말한다. 폭포는 그것을 이루는 물방울이 무수하여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보인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흐르는 폭포도 해체하여 보면 물방울의 모임이듯, 의식이 폭포처럼 흐르지만 마음이란 순간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이다. 

  테라바다 논사들이 살아나 프로이트와 논쟁을 벌인다면 그들이 이런 마음의 특성을 간과했다고 비판하리라. 그래서 폭포를 보고 물방울을 못 보듯 프로이트 계통의 심리학이 마음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리가 없다고 말하리라.

  테라바다 부디즘(결국은 요가짜라를 위시한 모든 부디즘)에서 마음은 ‘대상을 아는 작용’이다. 마음은 이렇게 실체가 아니며, 수시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대상’이란 안 이 비 설 신 의, 여섯 개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색 성 향 미 촉 법이다. 

  ‘아비달마 상하’라는 논서에는 대상 하나에 마음이 17번 일어난다고 쓰여 있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이 17번 일어나는지, 18번 일어나는 지를 둘러싸고 논사들 사이에 논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찰라 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일진댄 그 수를 어찌 센단 말인가? 수행이 궁극에 도달하면 알게 된단다.

  아무튼 테라바다에서 마음이란 ‘알아차리는 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화엄이나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一心’이나 ‘眞心’과는 퍽 발상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왕은 홀로 오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후회하고 기대하고...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을 마음의 작용이라고 본다. 그러나 테라바다 부디즘은 오직 분별하는 작용만을 마음이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심적 작용이라고 하는 현상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에 따라오는 것들, ‘마음부수’라고 부른다.

  상식의 세계에서는 마음과 마음부수를 통틀어 마음이라고 하지만 논사들은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면, 거기에 마음부수들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마치 왕이 시종을 거느리듯. 그래서 마음을 ‘심왕’이라고 하고 마음부수를 ‘심소’라고 하기도 한다. 아비담마(논서)는 마음은 하나이고,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가 52가지가 있다고 분석해 놓았다. 

  그런데 마음이 일단 일어나면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 일곱 가지가 있다. ‘아비담마 상하’(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는 그래서 마음을 ‘항상 일곱 대신을 거느리고 다니는 왕’에 비유한다. 마음의 이 8가지 측면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기본골격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현대심리학의 어떤 이론보다도 정교해 보인다. 

 

  심리학은 정신치료나 광고, 심지어 대중조작까지 현실적 필요에 따라 발전했다. 아비담마 역시 필요에 따라 발전했다. “생로병사라는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종교적 난제를 풀기 위해 사람의 마음에 대해 알아야 했기 때문에 나온 이론들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이론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보전하고 전파하기 위한 필요에서 발전했다. 

  하지만 부디즘이 시간적으로 확대되고 공간적으로 확장되면서 많은 논서의 주장들이 붓다의 사상과 어긋난다는 비평도 적지 않다. 특히 대승불교의 논서들이 부디즘의 핵심인 연기와 공, 반야(지혜) 등의 개념을 재해석하면서, 그것들을 실체화했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문제들은 관련되는 여러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문제들이지만, 우리나라 불교계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왕과 일곱 대신

  왕은 어디에나 출현한다. 하지만 혼자 오지 않는다. 왕의 곁에는 늘 일곱 대신이 따른다. 왕이 하는 일은 대신들의 도움이 없다면 성취되지 않는다. 심왕(마음)은 육문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들을 무엇이든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심왕을 따르는 일곱 가지 심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마음과 함께 반드시 따라오는 일곱 가지 마음 부수는, 觸(감각접촉), 受(느낌), 想(인식), 思(의도), 心一境(집중), 命根(생명기능), 作意(마음에 새김)이다. 

  이쯤 되면 아비담마는 복잡하고 정교한 심리학이 된다. 마음이 일어나면 이 일곱 가지 심리적 현상이 ‘반드시’ 함께 일어난다는 견해는 논사들의 통찰이다. 논사들이 ‘마음’이라는 주제를 놓고 수백 년 동안 관찰하고 논쟁해 내놓은 결론이다. 그들은 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까?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해체해서 보라’는 붓다의 가르침 때문이다.

  일곱 가지 마음 부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필요할 듯하다. 촉은 12인연의 요소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12연기에서 名色, 즉 몸과 마음이 있으면 바로 따라오는 것이 촉이다. 비슈디마가(청정도론)는 ‘대상을 정신적으로 만지는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촉을 설명한다. 6경 6근이 만나 12처가 되는 메카니즘을 일컫는 것으로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수(느낌)는 12인연의 고리에서 촉 다음 바로 따라 나온다. 수는 순수느낌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느낌이 있다. 상식적으로 느낌의 종류는 엄청나게 많은듯하지만 아비달마는 느낌을 세 종류로 분류한다. 좋은 느낌, 나쁜 느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 (느낌은 수행에서도 매우 중요한 마음부수로 친다. 느낌은 통찰수행의 네 가지 대상 중 하나이며, 마음을 아는 좋은 방편이다.) 

  인식과 의도도 함께 한다고 아비달마는 본다. 알아차림에 판단이 가미되면 想(지각)이 된다고 보통은 설명하는데, 엄격히 따지면 알아차림(識,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판단이 덧붙여지는 것처럼 보이는 지각이 따라온다고 할 수 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는 어느 禪師의 가르침은 이런 견해에서 보면 말이 안 된다. (좀 지나친가?) 의도는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더 섬세하게 말하면 마음이 일어나면 행위를 촉발하는 의도가 함께 따라온다. 마음이 일어나면 이렇게 느낌, 인식, 의도가 꼭 함께 따라오는 것이다. 

  집중, 생명기능, 마음에 새김이 마음과 함께 일어난다는 견해는 더욱 섬세한 관찰의 결과일 것이다. 아비담마의 마음에 대한 이런 통찰은 현대의 어떤 심리학이나 심리철학보다도 정교해 보인다. 

 

  마음은 왜 왕인가?

  비오는 날이면 마음이 멜랑꼴리해 진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우울의 포션이 점점 높아져 간다. 마음도 늙어가는 것인가?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상식의 세계에서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한다. 마음을 몸에 빗대어 무엇처럼 표현한다. 하지만 여러 차례 지적했듯 마음에 대한 기술들은 거의 모두가 은유적이다. 마음은 데카르트의 건축물이 아니다.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심리적 작용들을 끌고 다닌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에 끌려 다니는 작용들이 52가지라고 보았다.

 

  마음이 왕인 까닭은 이것들을 끌고 다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논서들은 ‘마음은 알아차리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찌따(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윈냐냐(알음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비담마에서 찌따와 윈냐냐는 완전한 동의어로 쓰인다. 알음알이의 발생 자체가 마음이다. 

  논사들은 왜 이 점을 강조하는가? 주체이지만 실체는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알음알이란 단지 아는 작용일 뿐이고 그 작용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참마음’, ‘참나’, ‘아트만’, ‘우주 자체인 브라만’ 등은 그래서 어불성설이다. 그것들은 개념(빤냣띠)이고 생각 속에 존재할 뿐이다.

  개념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비담마는 그런 개념들이 모두 산야(想, 지각)에 속하는 것이라고 본다. 실체는 아니지만 마음은 주체이다. 마음은 주체와 대상의 구조를 지닌다. 6가지 감각기관과 그 대상들이 만나는 12개의 장소(12처)에서 마음은 일어나는데 마음이 덧붙여진 18개의 요소가 세상을 이룬다. 그래서 세상 모두가 주체인 마음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인식의 선험적 주체인 정신과, 그 대상의 구성으로 세상을 설명하려했던 칸트의 시도는 아비담마의 발상과 흡사한 면이 있다. 

 

  반야심경으로 ‘마음’ 복습

  불교의식이 열리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의식의 말미에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내 경우, 솔직히 말하자면 수십 년 반야심경을 외면서도 수십 년 동안 그 뜻이 확연하지 않았다. 갓 불교에 입문했던 20대 어느 누구도 속 시원히 뜻풀이를 해주는 이 없었다. 그저 ‘그거 알면 깨닫는다’는 따위의 무책임한 말들만 주위에 무성했다. 앎에 대한 욕구가 스펀치처럼 왕성하고 충만했지만, 좋은 스승이 없었던 것 같다. 여담이고, 반야심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을 떠올려 보자.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夫如是...’

‘사리자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

수상행식 역시 이와 같으니라.’

 

  색도 공하고 수상행식도 공하다는 말이다. ‘空’은 대승을 거쳐 중국불교가 성립하면서 더욱 풍부한 임플리케이션을 갖게 되지만, ‘무상하다’, ‘실체 없다’가 프라이머리 미닝이다. (논의를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색수상행식이 무상하며,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색수상행식이 무엇이던가? 五蘊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바로 오온, 즉 몸과 마음이다. 다른 말로는 名色인데, 색은 몸, 명 즉 수상행식은 마음이다. 또 달리는 12처가 색이요, 6식과 그에 따라오는 마음부수가 명이다. 세상은 그렇게 18가지 요소로 해체된다.

  인간과 세상이 복잡한 것 같지만 해체해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오온이 공하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요지다. 그런 진리를 아는 것이 지혜(반야)요, 그 지혜로 관자재보살이 일체의 고액을 넘어간다는 스토리를 사리불 존자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줄거리다.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반야심경에서 名을 受想行識으로 해체해 설명한 것은 아비담마의 전통이다. 식은 대상을 만나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주체로서의 마음이다. 일단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따라 일어나는 7가지 마음부수가 있다고 앞서 설명했다. 그 가운데 느낌과 지각이 受와 想이다. 그렇다면 52가지 마음부수 가운데 수와 상을 제외한 50가지는 어디로 갔는가?

  그 50가지 마음부수를 뭉뚱그려서 行(상카라)이라고 한다. 사실은 52가지 마음부수 모두를 상카라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수(웨다나)와 상(산야)이 너무도 특별한 성질을 갖기 때문에 별도로 분류한 것이라고 논서들은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들을 염두에 두고 논의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불교의 마음에 대한 견해를 요약해 보자. 

  세계는 물질(色)과 마음(名)으로 되어있다. 마음은 오직 알아차리는 기능만을 하는 심왕(識)과, 심왕이 일어날 때 따라오는 심부수(受想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다섯 가지 색수상행식을 오온이라고 하니, 결국 세계는 오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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