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7> 리키니우스 법,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하다(기원전 367)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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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과 분열의 악순환’은 어느덧 로마 공화정의 특징이 되었다. 공화정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 로마는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면 귀족과 평민이 단결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위기를 넘기고 나면 다시 귀족과 평민의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 것이 관행이 되다시피 했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이 침입할 때도 귀족과 평민의 내분이 계속되고 있었다. 켈트족은 북유럽의 삼림지대에 사는 부족으로 ‘갈리아인’이라고 불렸는데, 이탈리아반도의 북부에 있는 에트루리아 민족의 힘이 약화되면서 켈트족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켈트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목민이고 호전적이어서 짐승으로 불릴 만큼 야만스럽다고 소문나 있었다. 켈트족이 로마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쳐들어오고 있을 때 로마군의 지휘관이 겁에 질린 병사들에게 원색적으로 호소하는 모습을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권에서 이렇게 전한다.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적이 라틴족이나 사비니족처럼 전투가 끝난 뒤에도 우리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이다. 이번 적은 흉포한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기 때문에 죽을 각오로 싸워야 한다.”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켈트족에 패배하여 7개월 동안 로마 시를 야만족의 손에 무방비 상태로 넘겨주었다. 켈트족은 로마 시내를 무법천지로 만들면서 폭행과 살생과 약탈을 일삼았다. 로마 시내가 적에게 짓밟힌 것은 건국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800년 후인 서기 410년 로마제국이 멸망할 무렵에 야만족인 서고트족에 점령당한 것이었다. 켈트족의 침입은 그만큼 로마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로마인은 켈트족에 “몸값을 지불할 테니 로마를 떠나달라”고 협상을 제의했다. 다행히 켈트족은 도시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300킬로그램의 금괴를 받고 순순히 로마를 떠났다.
그러나 로마가 입은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로마인의 명예 실추는 말할 것도 없고, 야만족에게 어이없이 굴복한 로마에 다른 부족들이 등을 돌려 ‘라틴동맹’이 공중 분해되는 외교상의 손실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라틴동맹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국가끼리 적이 침입하면 공동 전선을 구축하여 함께 싸울 동맹군을 구성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가 힘이 없어지니 동맹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로마는 바닥까지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켈트족의 침입은 로마인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야만족의 침입에 처참하게 무너진 이유는 국론 분열이었으므로, 국론이 통일되지 않으면 또다시 이런 치욕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모두 공감하게 되었다. 이렇듯, 로마인의 강점은 패배로부터 배우는 학습 능력이다.
로마인들이 지혜를 모아 만든 법률이 바로 기원전 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 법’이다. 허승일 교수는 『로마 공화정』에서 리키니우스 법의 발전 과정을 설명한다. “기원전 367년에는 평민이 집정관에 입후보할 자격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첫 번째 평민 집정관이 366년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342년부터는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반드시 평민이어야 한다. 결국에는 평민들도 모든 정치적·종교적 직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의 취지는 귀족이 평민에게 정치적으로 양보함으로써 평민의 지지를 얻어 이민족과의 항쟁 능력을 강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민이 집정관이 되어 정치에 참여한 것은 사실상 소수의 일부 평민층에 불과했다.
또 주요 공직을 거친 사람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는 법률도 제정했다. 집정관뿐만 아니라 평민 계급을 옹호하는 호민관도 원로원 의원이 되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는 호민관이 급진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스스로 견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또한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의 관계도 절묘한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설계되었다. 집정관은 매년 민회에서 선거를 통해 뽑히므로 단기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원로원의 의원은 선거를 통하지 않고 요직을 경험한 자로 뽑다 보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관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같은 제도 개혁은 보수와 진보, 단기와 장기 정책이 균형을 이루게 해주었다. 그 결과 로마인은 귀족과 평민이 소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발전을 위해 모든 역량을 투입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토머스 R. 마틴은 『고대 로마사』에서 “로마의 정치사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통치권을 공유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벌어진 팽팽하면서도 때로는 폭력적인 역사였다”고 규정한다. 로마인들은 로마 시내의 요지에 리키니우스 법의 제정을 기념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 신전을 세웠다. 귀족과 평민에게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균등을 가슴속에 새기며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자는 염원을 담고 신전을 건축한 것이다. 리키니우스 법이 제정되고 80년 후인 기원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 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호르텐시우스가 제정한 법으로, 평민들만 참여하는 평민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국법으로 효력을 지니게 하여 평민회의 독자적인 입법권을 보장한 것이다. 이는 귀족과 평민의 법적 평등을 보장하여 기원전 5세기 이후 계속된 신분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와 같이 로마 공화정은 필요할 때마다 민의를 반영하여 제도를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무너진 자존심을 정치 제도의 개혁을 통해 보란 듯이 일으켜 세웠다. 이것이 바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로마인의 저력이다. 이제 귀족과 평민은 국정의 동반자로서 손을 잡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주변의 국가들을 하나하나 굴복시키며 로마제국을 건설해나가는 일만 남았다. 단합된 로마의 힘 앞에 대적할 적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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