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5>시스템과 도덕성이 만든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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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리비우스가 로마 공화정시대의 특성을 설명한 내용이다.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왕의 역할은 매년 민회에서 선출되는 2명의 집정관이 맡게 되었다. 집정관이 왕을 대신하게 되었으니, 집정관은 ‘1년짜리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집정관에는 누가 선출되었을까? 왕자의 강간 사건을 활용하여 왕정 타도까지 몰고 간 브루투스가 선출되었다. 또 다른 집정관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루크레티아의 남편 콜라티누스가 차지했다. 브루투스는 시민들에게 “로마는 앞으로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도록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함으로써 왕정 폐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해서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창시자가 되었다. 공화정이란 공공의 이익 또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부 시스템을 뜻한다. 당시에 왕정을 종식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브루투스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브루투스는 추방당한 타르퀴니우스 왕의 조카로, 브루투스의 어머니가 타르퀴니우스의 누이였으니 왕과 브루투스는 외숙부와 생질의 관계다.
브루투스란 이름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바보’를 뜻하는 말에서 생겨난 별명이라고 한다. 마지막 왕이 제멋대로 미친 사람처럼 권력을 휘두를 때 바보처럼 참고 견뎠기 때문이었다. 그는 왕의 외척으로 누구보다도 왕정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독단적으로 통치하는 왕을 보면서 그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수없이 자문자답하며 나름대로 국가의 개혁 방안을 놓고 고심했을 것이다. 마침내 인내한 보람이 있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왔고, 그 역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개혁에 성공하자 브루투스라는 별명은 자랑스러운 성이 되었다. 혁명이나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은 많지만 결실을 맺기는 어렵다. 브루투스는 이 점에서 진정한 개혁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두 가지다.
첫째,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1년 임기의 집정관을 민회에서 직접 선출하여 민심을 그때 그때 반영하도록 했다. 집정관은 콘술(consul)이라고 하는데 ‘함께 쟁기를 끄는 사람’이란 뜻으로 2명의 집정관을 선발하여 서로 협력하고 견제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두 집정관은 매달 주요 행정 업무를 교대로 맡아 담당했다. 집정관은 움직일 때 경호관(릭토르) 12명의 호위를 받았다. 이들은 처형과 형벌권을 상징하는 파스케스(fasces), 즉 막대기 다발에 묶인 양날 선 도끼를 들고 다녔다.
또한 원로원의 기능과 역할을 강화했다. 예전에는 왕의 자문 기구에 불과했으나, 원로원을 권위 있는 기관으로 격상시켰다. 원로원 의원 수는 초대 로물루스 왕 때 100명이던 것을 5대 타르퀴니우스 왕 때 200명으로 늘렸고, 공화정 출범 이후에는 300명까지 증가했다. 신흥 세력이 원로원에 참여한 결과, 젊은 사람과 새로운 귀족이 탄생했다.
원로원 출신 중에서 집정관을 비롯한 공직자가 선출되고 원로원의 신임을 받지 못하면 공직자로서 성공할 수 없었기에, 원로원은 실질적으로 정치의 중심 역할을 했다. 민회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고 선거와 입법을 통해 통치권을 행사하는 중요한 의사결정 기관이 되었다.
둘째, 브루투스는 도덕성을 바탕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이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신구 세대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었고, 공화정을 반대하는 젊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성세대는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이 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기에 공화정을 선호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기회가 줄어들었다. 왕정은 왕이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발탁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명문 집안의 젊은이들은 공화정에서는 그런 기회가 잘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서 국외로 추방된 왕을 복위시키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들통나고 말았다. 음모자 중에는 집정관인 브루투스의 두 아들도 있었다. 주위에서는 적당히 마무리하려 했지만, 이를 안 브루투스의 입장은 단호했다. 아들 둘을 냉정하게 신문한 후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최고 권력자가 아들을 법대로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과 지도자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브루투스는 해외로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왕이 에트루리아 동맹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최전선에 나서서 왕의 아들과 일대일로 싸우다 왕자를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500년 동안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집정관이 수없이 나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리더십 전통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브루투스의 위대한 점은 바로 공화정 시스템을 세웠을 뿐 아니라 도덕성을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브루투스를 강철처럼 엄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브루투스는 단련된 강철처럼 엄격하고 타협을 모르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대쪽 같은 그의 기질은 명상이나 교육으로도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독재 군주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힌 나머지, 심지어 독재 군주와 공모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들들까지 처형했다.”
브루투스에 대한 좋은 평판과는 달리 동료 집정관인 콜라티누스는 시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도중에 하차했다. 그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었는데,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진실성을 의심받으면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해외로 망명했다.
공석이 된 자리에 발레리우스가 보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솔선수범한 브루투스를 본받아 공화정 제도를 더욱 보완하고 도덕성을 실천하여 공화정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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