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서른아홉 번째 이야기 깨달음을 향한 도움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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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을 누구에게 전할까?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 후대에 전해지기로는 몸을 괴롭히는 고행의 부질없음을 알고 중도의 길을 걸었고, 보리수 아래서 일주일을 용맹정진 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붓다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깨달음을 얻은 뒤 붓다는 중생들의 세상을 떠날 생각이었다. 즉 무여열반, 즉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열반’에 들려고 했다. 깨달음을 설명해도 이를 알아듣거나 믿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천신이 붓다에게 청했다. 그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전해주기를.
아무튼 불교의 경전들은 그렇게 전하고 있다. 자신에게 수행법을 가르쳐준 여섯 외도들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것이 함께 도를 닦다가 고행을 포기한 싯달타를 변절했다며 떠나버린 다섯 수행자들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苦集滅道의 4성제를 설명한다. 불교의 교리는 이 사건을 ‘초전법륜’이라고 명명한다. 이후 초전법륜은 2천5백년 불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잣대가 된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행자들은 4성제에 사무쳐야 한다. 삶이 괴로움임을 사무치게 알고, 그 괴로움의 원인을 사무치게 알고, 그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음을 사무치게 알고, 그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사무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4성제는 12연기와,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인 8정도를 포괄한다. 불교의 교리는 요약하면 4성제가 되고, 펼치면 5부 니까야, 경율론 3장, 급기야 팔만대장경이 된다. 그래서 4성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교를 이해할 수 없다.
경전 상 ‘깨달은 자’는 셀 수 없이 많다. 싯달타 이전의 붓다들이 있고, 아라한과를 얻은 싯달타의 제자들과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깨달은 벽지불(연각 또는 독각이라고도 부른다)이 있다. 하지만 모든 깨달은 자들이 법을 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건 별개’라는 서양의 경구도 있지 않은가? 오직 석가모니 붓다만이 법을 장엄(멋진 형상으로 꾸밈)할 수 있었다고 불교는 주장한다. 석가모니가 설한 가르침을 바로 ‘불교’라고 부른다. 그 가르침은 놀랄 만큼 체계적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단순하기 그지없다.
진리는 단순하다
석가모니가 장엄한 법이 단순하다? 앞서 말한 대로 모든 법이 4성제로 요약되기 때문에? 아니면 체계적이라서? 사실 그렇다. 단순하다. 불법의 체계를 순서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그 체계를 요약하면, 蘊, 處, 界, 根, 諦, 緣과 37菩提分法이 된다. ‘온처계근제연’은 교학체계를, 37보리분법은 수행체계를 요약한 것이다.
교학체계를 잠시 요약하고 가자.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그 아무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체가 없는, 곧 ‘無我’이다. ‘무아’를 알려면 ‘나’를 해체해 보면 된다. 해체해서 보면 ‘나’는 다섯 무더기, 5온일 뿐이다. 5온은 色, 受, 想, 行, 識이다. ‘색’은 물질(몸)을 가리키고, ‘수상행식’은 마음에 속한다. ‘名色’으로 요약하기도 한다. 결국 ‘나’는 오온이고 명색일 뿐이다. 그것은 ‘다섯 개의 개념’이고, ‘두 개의 개념’일 뿐이다.
經이나 論은 오온을 순차적으로 설명하지만, 오온의 발생은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적이다. 대상(色)을 받아들여 느끼고(受) 지각하고(想), 그런 다음 의도를 일으키고(行), 그것이 마음에 새겨진다(識)는 설명은 얼토당토 하지 않은 주장이다. 오온은 매 순간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사라진다.
그렇다면 내 밖의 세계는 무엇인가? 12처, 18계이다. 그것의 바탕은 ‘6門’,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감각기관이다. 12처는 안의 감각장소(內處)인 안이비설신의와 밖의 감각장소(外處)인 色聲香味觸法을 통튼 것이다. 18계는 안의 감각장소와 밖의 감각장소가 만나 생겨나는 알음알이의 요소 6개를 더한 것이다.
결국 세계란 여섯 감각기관에 마음이 작용하여 형성된다. 그렇다면 세계는 마음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터프하게 말하자면 결국 내 밖의 세계는 없다. ‘諦’는 4성제, 苦 集 滅 道이다. ‘緣’은 12연기, 생사의 원리이다. 이제, 수행의 체계를 요약한 37보리분법이 무엇인지를 알면 붓다가 장엄한 법의 체계를 이해한 셈이 된다.
깨달음을 향한 37가지 도움길
괴로움은 중생의 삶을 사는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이것이 붓다의 최초 통찰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이 숙명이긴 하지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건 아니다. 벗어날 수 있지만, 괴로움은 그냥 사라지지는 않는다. 수행을 해야만 없앨 수 있다. 괴로움을 없애는 수행을 초기불전은 37보리분법으로 정리한다. ‘보리분법’은 보디 빡키야 담마(bodhi pakkhiya dhamma)를 직역한 것으로,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이라는 뜻이다.
“깨달았다는 뜻에서 깨달음이라고 이름을 얻은
성스러운 도의 편에 있기 때문이다.
편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도와주는 상태에
서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청정도론 22-33)
중국에서는 ‘도와주는 상태’라는 뜻을 살려서 ‘37 助道品’으로 옮겼다. ‘수릉엄경’ 등 대승경전은 약간의 변형을 거쳐 거의 그대로 이를 수용하고 있다. 보리분법은 가짓수로는 37가지이지만, 주제로 분류하면 7가지가 된다. 5부 니까야 가운데 붓다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모은 상윳따 니까야가 그렇게 분류하고 있다. 그 7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四念處 ; 네 가지 사띠의 확립
四正勤 ; 네 가지 바른 노력
四如意足 ; 네 가지 성취수단
五根 ; 다섯 가지 기능
五力 ; 다섯 가지 힘
七覺支 ; 일곱 가지 깨달음의 징조
八正道 ; 여덟 가지 요소의 성스러운 징조
(첫 번 째 카테고리인 사념처를 ‘네 가지 사띠의 확립’이라고 옮겼다. ‘사띠’는 보통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이라고 옮기는데, 각각의 단어를 선택하는 측이 지지하는 늬앙스와 논리 차이가 있다.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민감하므로 차라리 음 그대로 ‘사띠’라고 옮기고 차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일곱 가지 카테고리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의 수는 4+4+4+5+5+7+8=37이 된다. 그래서 ‘37 보리분법’이라고 부른다. 수행자들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매뉴얼로 이를 숙지하고 수행을 점검할 수 있다. 매우 간편하지 않은가?
“비구들이여,
수행에 몰두하지 않고 머무는 비구에게
‘오 참으로 나의 마음은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기를’이라는
이러한 소망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결코 취착 없이
번뇌들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이다.” (까뀌 자루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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