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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3> 브루투스 너마저!카이사르의 암살 (기원전 44)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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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3월22일 16시27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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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공화정시대의 로마사를 쓴 몸젠이 카이사르를 평가한 말이다. 카이사르는 최고 권력자가 되고 5년 동안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개혁을 거듭했다. 앞에서 소개한 개혁 내용은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그는 마치 최고 권력자의 임기가 5년 단임제인 것처럼 개혁을 추진했다. 급진적인 개혁은 원로원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가면 공화정은 끝난다. 왕정이 시작된다”고 믿었던 보수적인 원로원파는 카이사르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숨 가쁘게 몰아치는 개혁의 광풍과 함께 카이사르에게 주어진 특권은 점점 늘어만 갔다. 도널드 R. 더들리는 『로마문명사』에서 “국가의 모든 유효한 권한들이 카이사르 개인에게 집중되었다”면서 그가 받은 특권을 소개했다. 
“가장 큰 특권은 독재관이다. 기원전 49년에 독재관직이 주어졌고, 기원전 46년에 10년 임기의 독재관, 기원전 44년 1월에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호민관에게만 인정되는 거부권과 신성불가침권의 권리도 받았다. 개선장군에게만 일시적으로 부여되는 임페라토르 칭호를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권리, 개선장군이 입는 자줏빛 망토를 평소에도 입을 권리, 원로원에서 먼저 투표할 권리, 평소에도 월계관을 쓸 수 있는 권리, 달력에 카이사르가 태어난 달을 기념하여 명칭을 율리우스(July)로 바꾸는 권리 등이 파격적으로 주어졌다.” 
카이사르가 가진 중요한 특권들을 보면 이미 황제의 위치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제정이 시작된 셈이다. 군중 속에서 카이사르를 향해 “왕이여, 만수무강하소서!”라고 인사하자 “나는 카이사르이지 왕이 아니오”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로마 시내에는 파르티아(오늘날의 이란) 원정을 발표하고 종신 독재관에 취임한 카이사르에 대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수에토니우스는 운명의 날에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다. 원로원 회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전 10시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회의장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점술가가 가로막고 “카이사르여, 3월 보름을 조심하시오” 하고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갔다. 무기를 가지고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경호도 무방비 상태였다. 카이사르는 에스파냐와 게르만 병사로 이루어진 호위대를 원로원 의원들의 서약을 받은 후 해산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독재관은 24명의 수행원이 같이 행동하지만, 무기를 든 경호원은 아니었다. 더욱이 회의 중에는 가까이 갈 수 없고 멀리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었다. 
암살자들은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암살 음모에 60명이 넘는 원로원 의원들이 가담했다고 한다. 이들은 카이사르를 마구 찔러 무려 23군데나 상처를 입혔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총애했던 브루투스를 보자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치면서 숨을 거두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쓰러진 곳은 오랜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조각상 발치였다. 
암살에는 주동자와 얼굴마담이 있는 법이다. 주동자는 카시우스 롱기누스이고, 얼굴마담은 마르쿠스 브루투스였다. 카시우스는 기원전 54년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회계감사관으로 종군했다. 이 전투에서 카시우스는 총사령관 크라수스를 버리고 500명의 기병과 함께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다. 내전이 일어났을 때는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했다가 카이사르에게 투항했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의 충성파로 여겨지던 브루투스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했다. 기원전 44년에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동시에 법무관에 취임했다.
그런데 카시우스에게 불만이 생겼다. 브루투스는 수도 담당 법무관으로서 수석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반면에 카시우스는 본국 로마에 거주하는 외국인 담당 법무관에 임명된 것이다. 카시우스는 자신보다 경력이 떨어지는 브루투스를 오히려 좋은 자리에 앉힌 것이 불만이었다. 이런 전력 때문에 카시우스가 암살을 주도하면 따라올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인물이 바로 마르쿠스 브루투스다. 그는 로마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출범시킨 브루투스의 후손이다. 더욱이 카이사르의 애인으로 알려진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다. 세르빌리아는 미망인은 재혼하는 것이 관례였던 시대에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카이사르를 일편단심 사랑했다. 카이사르는 애인의 아들인 브루투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내전 때 브루투스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세르빌리아의 부탁을 받은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이면 안 된다”고 명령한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석방될 수 있었다. 
카시우스는 브루투스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울 때 어떻게 설득했을까? 아마도 남자의 자존심에 호소했을 것이다. 필립 프리먼은 『카이사르』에서 그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카시우스와 불만 가득한 원로원 의원들은 수백 년 전 브루투스 가문의 조상이 로마의 마지막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듯이, 지금의 브루투스 역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매일 밤 로마의 옛 영웅 브루투스의 조각상에는 선동적인 내용의 낙서가 등장하곤 했다. 
오! 당신이 살아 있다면! 당신의 후손은 기대를 저버렸다오. 우리는 새로운 브루투스가 필요하오.” 

브루투스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카이사르가 지금껏 베풀어준 호의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살해 음모를 지휘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브루투스가 일을 저질러 카이사르가 쓰러졌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외마디비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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