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48>그리운 것들은 먼 곳에 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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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많은 삶은 아름답다. 그리움의 근원에 닿으려는 간절한 바램을 지니고 있는 동안 사람의 심성은 늘 열려져 있게 마련이다. 감성의 촉수가 예민하게 상기되어 있게 마련이며 상상력의 파장도 활발해진다. 사람 사는 원래 모습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것들은 먼 곳에 있어서 아련한데, 세사에 바쁜 사람들은 지나치며 살 뿐, 거기 어딘가에 그리움의 근원이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주 공간을 거리로 측량하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를 사용한다. km로는 우주 별자리 사이의 광막한 거리를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쯤을 돈다고 하는 빛으로 지구에서 달까지는 1.5초, 태양까지는 8분쯤` 걸린다고 한다. 태양에서 제일 가까운 <우리 은하수 은하>의 중심까지가 3만 광년이고, <우리 은하수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자리의 별까지는 250만 광년, 지구에서 가장 먼 퀘이사의 은하까지는 80억~100억 광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비추고 있는 태양 빛은 8분 전에 태양을 떠나서 지금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이고, 가장 청명한 가을밤의 하늘에 질펀히 깔린 은하수의 푸른 별빛들도 3만 년 전의 것들이란 얘기가 된다. 3만 년 전에 어느 별자리를 떠난 <우리 은하수 은하>의 별 빛들이 지금 강물처럼 질펀히 깔린 은하수로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은하수의 별빛이 3만 년 전의 것이라면, 그 빛을 우리에게 보내준 별들은 3만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별들은 3만 년의 풍상을 겪으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3만 년의 거리 저쪽에서 3만 년 전의 빛을 보내주고 있는 것들- 사람의 삶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 키를 다투던 친구들이며, 잃어버린 하모니카, 첫사랑까지, 이제는 흔적도 없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이‘새로운 그리움’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먼 곳에 있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흔적조차 희미해져 버린 시간 속 어딘가에 그리운 것들이 있다. 그렇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먼 곳에 있다. 그리움은 닿을 수 없는 곳, 까마득히 먼 곳 어딘가에서 면면한 파장이 되어 와 닿는다. 형해조차도 가물가물해져 버린 것들이 선연한 그리움이 되어 다가오는 때도 있다.
나는 몇 년 전, 고등학교 졸업 60년을 맞았다. 동창생들이 그 <졸업 60년 축제>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일의 책임을 내게 맡겨 그 일을 이뤄내기 위해 골몰했던 일이 있었다. 우리 280 여 명 동기생들은 1961년 3월에 정들었던 교정을 떠났었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 그 간난의 시대에 세상에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시절 삶과 죽음이 뒤엉긴 6.25를 겪었다. 4.19 때는 앞장서서 광화문을 달리며 불의에 항거한 순정한 소년들이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졸업 60년 축제>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90여 명의 친구들이 벌써 이승을 떠났으며 40여 명의 친구들은 해외로 거주지를 옮겼고, 또 50여 명의 친구들은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 친구들 중에서도 10여 명이 와병중이어서 병마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똑같은 자리, 똑같은 위치에서 출발한 친구들이었지만 60여 년의 시간 속에서 제각기 다른 길을 걸어 오늘의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이 제각기 다른 운명을 만나 서로 다른 행로를 거쳐왔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활짝 열린 운명의 길을 따라 명예의 자리에 올랐고, 어떤 친구들은 국내 굴지의 기업을 이뤄내기도 했지만, 또 어떤 친구들은 닫힌 운명과의 평생에 걸친 싸움 때문에 핍진한 삶을 살고 있을 친구들도 있었다. 친구들은 60년 전의 자리에서 추억의 파장을 보내주며 선연한데, 많은 친구들은 이승의 사람이 아니다. 나머지 친구들도 나이 80 객이 되어 주름이 깊게 패이고 대머리가 되었으며 백발이 성성하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60년>행사를 준비하면서 너무나, 일상사에 매어 살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까마득히 먼 날의 교실에서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을 ‘그리움’의 이름으로 찾아보기도 하였다.
‘그리움’의 마음이 메마른 시대이다. 모두들 어딘가로 바삐 달려가고 있다. 모두들 무엇인가에 골몰해 있다. 지하철의 사람들 거의 모두가 전자기계에 골몰해 있다. 연신 스마트폰의 화상을 두드리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육성 메시지를 전하느라 정신이 없다. 사람들 모두가 ‘현재’의 순간에 서 있다. 위태로워 보인다. 기능과 효율만이 선호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신 속에 황사바람이 인다. 가슴도 메말라 버렸다. 밟으면 파삭파삭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그리움’의 마음은 사람의 삶에 핏줄이 돌게 한다. 신경이 돌게 한다. 옛날에 잃어버렸던 윤기 나는 시간, 그 풋풋했던 시간 속에서 왕자였으며 공주였던 날들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리움의 삶은 실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실제 눈으로 ‘보고’, 실제 귀로 ‘듣고’, 피부에 ‘닿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짜 그리움을 소유할 수 있다. 관념이나 타성에 기대 사는 사람은 진짜 ‘그리움’을 소유할 수 없다. ‘그리움’은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혀로 맛볼 수도 있다. 이른 봄, 양지바른 언덕 어딘가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면서, 찔레나무 새순을 보면서, 나풀나풀 날아온 첫 나비를 보면서 우리는 ‘그리움’의 실체를 만난다.
그리운 것들은 멀리 있다. 멀리 있는 것들을 아주 놓아버리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그리고 ‘밝은 눈’으로 보고 ‘맑은 귀’로 사물과 현실의 실체를 보려는 쉼 없는 탐색은 ‘그리움’에 이어져 있다. ‘그리움’에 닿아 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연하고 보드라우며 따뜻한 봄날의 양지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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