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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처럼 저질러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09월18일 18시37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9시56분

작성자

  • 박명성
  • 신시컴퍼니 대표, 명지대 교수

메타정보

  • 34

본문

돈키호테처럼 저질러라.

 

 가장 처절한 실패의 기억은 뮤지컬 <갬블러>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패였다. 연극정신을 발현하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새로운 도전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만심에 들뜬 프로듀서가 벌인 과욕의 결과였다. 1990년대 후반이었다. 뮤지컬 관객이 많지 않았던 시기에 초연의 막을 내린 지 두 달만에 재공연이라니,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다. 이 실패를 통해 과욕에 대한 경계와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도 여전히 부끄러운 실패의 기억이다. 

그 똥배짱의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나도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다.’하고 말이다. 그러나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이런 걱정과 응원을 듣고 싶다. 프로듀서로 살고 있는 한 ‘저지르는’ 작품을 하고 싶다. 세밀한 전략을 세우고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저질러 놓고 세밀한 전략을 세우는 프로듀서로 살고 싶다. 햄릿처럼 심사숙고하고 고뇌하는 프로듀서가 아니라 돈키호테처럼 저지르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돈키호테는 미쳤고 미치지 않은 돈키호테는 아무 매력이 없다. 그래서 일 저질렀다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말을 듣는 동안에는 아직은 내가 쓸 만한 프로듀서라는, 존재 이유가 있는 프로듀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내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신 분이 김성녀 선생이다. 선생은 내 제안을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출연을 해주셨다. 뮤지컬 <댄싱 섀도우>에서도 극의 중심을 잡아주셨고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엄마’ 역을 맡아주셨다. 이외에도 함께 작업한 작품들이 많다. 선생은 좌절하고 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무 낙담하지 마. 박대표는 우리 연극계의 희망이야. 충분히 이걸 딛고 일어설 수 있어.”

그러고는 출연료를 받지 않겠다는 말까지 하셨다. ‘일방적으로’ 입금해드리긴 했지만 선생은 끝까지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출연료의 문제가 아니라 선생의 그런 마음이 앞으로 어떻게 컴퍼니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다. 금전적인 면에서 보면 <댄싱 섀도우>가 더 큰 실패이지만 부끄러운 기억은 아니다. 연극정신의 발현이었고 새로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댄싱 섀도우>의 실패 이후였던 것 같다. 김성녀 선생은 내가 어려운 도전을 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대표, 또 일 저질렀네!”

그러시면서 우리 공연들의 티켓 판매 순위를 직접 확인하시고 전화로 걱정을 해주시고 작품이 잘되면 너무 좋다고 기뻐해주신다. 그리고 함께 일을 저질러달라고 말씀드리면 두 말 없이 동참해주신다. 비슷한 말씀을 해주시는 분이 또 있다. 손숙 선생이다. 

연극 <엄마를 부탁해> 재공연에 엄마 역을 맡으셨을 때였다. 지방공연을 위해 대극장인 국립중앙박물관의 용극장을 선택했다. 지방은 소극장 아니면 대극장이다. 서울 공연을 중극장에서 한다면 지방에 갈 때는 소도구에서 무대장치까지 대극장용으로 다시 제작해야 한다. 아니면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질 낮은 공연을 하거나. 그래도 과감한 도전이긴 했다. 초연 때도 600석이 넘는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한다고 여러 분들에게 걱정을 들었던 터였다. 작품에 대한 자신감, 대극장 연극의 가능성 타진 등의 이유로 M시어터를 선택했는데 두 달 동안 거의 매진이었다. 그런데 용극장은 800석이고 위치도 M시어터에 비해 열악하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변두리의 척박한 지역이었다. 

“박 대표 너는, 도대체 이 큰 극장에다가…. 어떡하려고 찬바람 부는 이 겨울에 허허벌판에 있는 극장을 잡았어? 두 달 동안 손님을 어떻게 채우려고, 무슨 똥배짱으로 그러는 거야?”

그리고 공연이 성공한 이후에는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우리 박 대표가 키가 작달막해도 통이 커. 추진력도 좋고 자기가 생각하는 거에 확신을 갖고 밀고 나가는 맷집도 좋고 말이야. 역시 작은 거인이야.”

‘또 일을 저질렀다, 무슨 똥배짱이냐, 작은 거인이야’라는 선생들의 말에서 나는 걱정과 기대, 칭찬과 나무람을 한꺼번에 듣는다. 연극계 어른으로서 새로운 시도를 해줘서 기특하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시는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좋다. 내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런 나를 걱정해주시는 마음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고 그런 말씀을 유발할 작정이기도 하다.

최소한 2015년까지는 원 없이 걱정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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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창작뮤지컬 <아리랑>.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내가 <아리랑>을 뮤지컬로 만들겠다고 하자 조정래 선생께서 ‘지금까지 신시컴퍼니를 이끌어 온 걸로 봐서는 박명성이는 하겠다, 해라, 아리랑이 이제 주인을 찾았다.’고 하셨다. 영화, TV 드라마, 뮤지컬로 만들겠다고 온 사람은 많았는데 결과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무대언어로 바꾸기 어려운 작품이다. 

3년 동안 46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댄싱 섀도우> 이후 가장 모험적이고 위험한 발상의 도전. 때때로 ‘얼마나 망하는지가 문제다.’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30년 넘게 연극쟁이로 살면서 성공하는 선택만 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멋진 선택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 공연예술의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는 생각으로 열정적으로 작업했다. 

오랜 노력 끝에 만들어진 <아리랑>은 2015년 7월 LG아트센터에서 두 달 동안 관객들을 만났다. ‘주옥같은 캐릭터와 이야기와 문장과 풍경묘사와 상황들을 1%도 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되지 않으려 몸부림친 날들이 숱하다는 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연출이 원작자에게 고백한 말이다. 숱한 몸부림의 날들은 나도 잘 안다. 연출뿐 아니라 배우, 스태프, 신시의 기획팀은 각자 자기 분야에서 몸부림을 쳤다.

그렇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준 덕분에 공연은 120% 성공을 거두었다. 공연 초반을 제외하고는 매회 매진이었다. 평소 초대해 달라던 지인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나에게 표를 사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다른 뮤지컬에 비해 중장년 관객이 많다는 <맘마미아!>보다 중장년 관객들의 비중이 높았던 점도 긍정적이었다. 50대부터 70대까지 손을 잡고 온 부부 관객이 많았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에서 일정 부분 소외되었던 분들을 모셔옴으로 해서 관객의 저변 확대에도 기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정래 선생도 몇 번을 보시고는 ‘주위 사람들이 너무 좋아한다. 특히 영상전문가인 아들이 스토리와 영상이 빈틈이 없을 정도로 융합되었다고 하더라.’며 행복해하셨다. 

2개월 동안 5만 명이 넘는 관객이 <아리랑>을 만났다. 어떤 관객은 슬프고 처연하고 답답하고 화가 나더라고 했다. 티슈 몇 장으로는 흐르는 눈물을 다 닦을 수 없었다고 했다. 득보와 수국이 달콤한 사랑을 속삭일 때조차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렇게 울고도 남은 울음이 있어서 목이 아프고 다음날 아침까지도 눈이 아팠다고 했다. 낡디 낡았다고 여겼던 아리랑이 이렇게 깊게 현재의 아픔으로 다가올 줄 몰랐다고 했다.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다. 조정래 선생을 비롯해 연출, 스태프, 배우, 기획팀 그리고 관객 여러분들까지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여러 분들 덕분에 <댄싱 섀도우> 때 맺혔던 한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덕분에 조금은 뒤로 물러서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프로듀서의 자리가 그렇다. 공연이 성공하면 뒤로 물러서서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박수를 치면 된다. 그러나 실패하면 공연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비바람을 막아주어야 한다. 

실패했더라도 나는 ‘이럴 줄 알았다’면서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연극작업은 하다가 잘못되어도 상관이 없다. 공연을 만드는 데는 정답이 없으니까 형식에 구애 받을 필요도 없다. 뮤지컬 <아리랑>이 성공했다고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오로지 <아리랑>만이 갖고 있는 새로운 스타일과 다양성만이 정답이고 <아리랑>도 그 중 하나다. 용기 넘치는 도전을 반복하다보면 성공한 작품도 있고 실패한 작품도 있다. 쓰디쓴 실패의 구배길 없이 곧게 뻗기만 하는 인생이 어디 있던가? 낙담도 좌절도 즐기고 있다.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싶을 때가 바로 승리의 문턱에 다다랐다는 증거라 여기며 작업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리랑이 연일 매진 행렬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만나는 사람들 마다 돈을 좀 벌었느냐고 묻는데 어림없는 소리다. 두 달 내내 만석이었어도 이번 초연으로서는 태생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맞추지 못한다. 그러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후로는 내내 매진되어 객석만은 초대박이 났다. 중장년 관객의 비중이 높았다. 공연을 본 관객들의 감동을 여기저기서 전해 듣고 있다. 재공연에 대한 명분, 재공연에 대한 기틀을 만든 것이고 국민뮤지컬로 거듭날 수 있는 자신감도 얻었다. 아쉽게도 극장을 너무 짧게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내년에라도 재공연을 올리고 싶지만 극장이 없다. 1년 동안 보완수정해서, 지금보다 더 멋진 무대를 만들어서 내후년에 재공연을 올릴 계획이다. 더 감동적인 <아리랑>으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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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연장한 마지막 공연의 무대인사에서 김성녀 선생이 ‘박명성 대표가 <아리랑>을 계속할 수 있게, 새로운 창작뮤지컬을 할 수 있게 신시의 <원스> <아이다> <맘마미아> <시카고>도 많이 봐 달라.’고 하셨다. 관객들은 폭소가 터졌고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창작 뮤지컬은 화가 이중섭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공연할 예정이다. 그 무렵이 되면 창작뮤지컬을 하라고 하셨던 김성녀 선생을 비롯한 많은 어른들께서 또 말씀하실 것이다. 

“박 대표, 또 일 저질렀네! 박명성 똥배짱을 누가 말려!”

그 똥배짱의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나도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다.’하고 말이다. 그러나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이런 걱정과 응원을 듣고 싶다. 프로듀서로 살고 있는 한 ‘저지르는’ 작품을 하고 싶다. 세밀한 전략을 세우고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저질러 놓고 세밀한 전략을 세우는 프로듀서로 살고 싶다. 햄릿처럼 심사숙고하고 고뇌하는 프로듀서가 아니라 돈키호테처럼 저지르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돈키호테는 미쳤고 미치지 않은 돈키호테는 아무 매력이 없다. 그래서 일 저질렀다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말을 듣는 동안에는 아직은 내가 쓸 만한 프로듀서라는, 존재 이유가 있는 프로듀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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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9시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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