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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열 번째 이야기 주변 치우기와 내면 다지기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8월26일 17시13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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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청소 

  쉐우민은 하루 3차례 청소한다. 새벽 좌선을 마치는 5시 선방청소는 쓸기만 한다. 선방 대중들은 저마다 벽에 걸린 빗자루를 하나 씩 들고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빗자루 차지를 못한 요기들은 슬며시 선방을 빠져나간다. 고참들 중에는 빗자루 없다는 핑계로 청소 불참이 상습화된 수행자도 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로 충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업자득’을 믿는 탓인 듯하다.

  두 번째 청소는 조식 공양을 마친 직후의 숙소청소이다. 자신들의 방은 자신들이 하지만 공동 공간에 대해서는 방별로 소임이 주어진다. 그 소임은 대략 열흘 단위로 바뀐다. 이를테면 11호와 12호는 복도청소와 방 앞 작은 카페트 털기, 13호와 14호는 샤워장과 화장실 15호는 계단과 낭하, 16호는 슬리퍼 닦기... 그런 식이다. 쓸고 닦고 털고 말리고... 걸리는 시간은 기본 15분 정도. 그 정도로도 청결은 충분히 유지된다.

  세 번째 청소는 오후 3시 좌선이 끝난 다음의 선방 청소인데, 물걸레가 비로소 등장한다. 나의 일본인 룸메가 베란다에 말려놓은 대형 봉걸레를 갖고 등장하면서 청소가 시작되는데, 수행자들이 각기 작은 밀대를 하나씩 들고 베란다에 줄을 선다. 베란다 싱크대에서 말려놓은 걸레에 물을 축이기 위해서이다. 청소가 끝나는 풍경도 줄서기이다. 사용한 걸레를 빨아서 널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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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가 끝나면 바로 주스 타임이다. 선방 입구 낭하에서 나눠주는 주스를 한 잔 씩 들고 복도 끝에 서서 풍경을 보며 하루의 마지막 먹을거리를 즐긴다. 청소 패턴을 반복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생활이 단순할수록 ‘자주, 그러나 아주 짧게’라는 청소의 원칙을 지킨다는 것.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청소는 복잡하다. 가구가 많아서다. 가구는 물건들을 쌓아두기엔 편하지만 청소시간을 늘린다. 청소는 고된 노동이 됐고, 사람들은 급기야 이 일을 기계에 맡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사람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청소 기계까지 만들어냈다. 청소는 의무이지만 삶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 아닐까? 스스로 하는 청소를 포기하는 순간, 인간의 정신은 주기적 정화의 기회를 잃는다는 생각도 든다. 

  로봇 청소기...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던 군복무를 게르만 용병들에게 넘김으로써 나라의 멸망을 초래했듯, 인간은 자신들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던 청소를 기계에 넘겨줌으로써 급기야 기계들에게 지배당하게 될 지도 모른다.

  맹자의 一日三省... 혹시 이 말은 하루 세 번 청소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아님 말고... 

 

  담마토크 

  이 세상엔 수많은 수행법들이 있다. 마치 산 정상에 이르는 길이 무수히 많듯. 하지만 각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는 길이야말로 정상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편안한 길이며, 그 길로 가지 않으면 궁극에 이르지 못한다고 우기고, 가르치고, 또 믿는다. 수행의 목적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개선하는 일이다. 길은 삶을 벗어나 있을 수도 있고, 삶 그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어떤 길을 가든 그것은 길을 가는 사람의 선택이다. 그 길을 찾아 미얀마까지 온 사람들은 위빠사나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쉐우민에 도착해 방을 배정받고 론지를 입으면 다음 순서는 그곳의 가르침의 요지를 익히는 부터 시작한다. 한국에서 온 수행자들에게는 우리말로 번역된 떼자니아 사야도의 저술 4권이 한꺼번에 주어진다. 틈틈이 책들을 읽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누구에게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자리가 그룹별로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담마토크’라고 한다. 사야도와의 인터뷰가 6-7일에 한 번 밖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담마토크, 법담은 중요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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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머무는 동안 한국의 수행자들에게는 (남성들에게만 해당. 성별이 다른 수행자의 처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엄격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매우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마침 떼자니아 사야도의 한국인 제자인 스님 한 분이 센터에 머물고 있었다. 

  사사나 스님. 15년 전 떼자니아 사야도와의 기이한 인연으로 테라바다로 출가하신 분이다. 사사나 스님이 주관하는 담마토크는 이틀에 한 번 스님의 거처에서 열렸는데, 적게는 5-6명 많게는 10명 정도가 늘 참석했다. 각자의 수행상태와 수행하면서 생기는 의문점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를 통해 여러 사람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어떤 수행법이든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익힐 수 없다. 더구나 책으로만 이해할 수는 더 더욱 없다. 체험의 길은 먼저 체험한 이의 도움 없이는 가기 어렵다. 수행자들의 질문에 대한 사사나 스님의 답변은 위빠사나 심념처의 길을 간 체험에서 나온 것이어서 거침이 없었고, 힘이 있었다. 함께 머물던 수행자 가운데 현직 중학교 선생님이 한 분 있었다. 어찌나 열심히 좌선하고 경행하는지 나날이 진보하는 모습이 눈에 확 띠었다. 담마토크 시간에 사사나 스님에게 하는 수행보고와 질문은 여느 수행자와 달랐다. 이를테면 “아는 마음을 알고 나니 이 마음을 늘 뒤에서 지켜보는 마음이 있습니다”라든지, “지혜가 나는 줄 어떡하면 알 수 있습니까?” 등이다. 이렇게 묻고 이에 대한 사사나 스님의 답을 들으면서 여러 수행자들은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사사나 스님은 지난달 한국 테라바다 불교 제2대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현재 경주의 마하보디 선원의 선원장을 맡고있다. 마하보디 선원에서는 매월 한 차례 주말 2박3일의 집중수행이 열린다. 

  산 정상은 하나겠지만 길은 여럿일 수 있다. 길은 길을 가는 사람의 선택이다. 길을 가는 사람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믿음 없이 결코 그 길을 갈 수 없다. 길에 대한 믿음은 앎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결단과 태도의 문제이다. 그래서 가는 길은 인연일 수밖에 없다. 

 

 

  첫해 이야기 마무리 - “욕심으로 수행하지 말라”

  졸갑스러운 토막글들을 여지껏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5년 1월의 기억을 이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쉐우민 첫해의 기억을 더듬어 제게 가장 영향을 준 가르침과 경험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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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으로 수행하지 말라”가 그것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수행한다면 시작부터 틀렸습니다. 그간 이 가르침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참 어리석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으로 수행은 무슨 수행입니까? 제가 머나 먼 미얀마까지 간 이유는 뭔가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쉐우민의 수행방법을 알고 익혀서 그 무언가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고 갔습니다. 어느 조사의 어록엔가 “잡으려 하면 멀어지고 구하려 하면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그것을 ‘비밀’이라고 한다”는 구절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습니다.  

  평소 저는 깊고 깊은 禪定(三昧, Samadhi)을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많은 수행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경험입니다. 그런데 쉐우민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수행하기 전 마음을 바르게 하라. 마음속에 욕심과 분노가 있는 지 점검하라. 번뇌로 수행하지 말라 ”고. 

  뭔가 되려고 하는 건 욕심입니다. 뭔가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건 욕심으로, 즉 번뇌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선정을 얻기 위해 수행한다면 시작부터 잘못됐습니다. 선정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설사 얻더라도 인연이 다하면 사라집니다. 선정의 상태에서 오는 행복감과 희열을 위해 수행한다면 더더욱 틀렸습니다.

  떼자니아 사야도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정에 대한 집착이 잘 안 끊어진다. 어떡하면 좋으냐”는. 그리고 이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집착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선정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집착할 대상은 아니다”라는.

  그런 문답이 있은 지 열흘쯤 뒤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행상태에 대한 제 보고를 들은 사야도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로바(탐욕)로 수행하고 있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 

  섭섭한 처방이었지만 약으로 여기고 사야도의 첫 법문집 ‘마음이 바르게 됐을 때 수행하십시오’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탐욕으로 수행하지 말라’는 말의 뜻을 비로소 ‘구체적으로’ 알게 됐습니다. 많은 선각자들이 ‘불법’, ‘도’, ‘진리’의 핵심을 ‘무아’라고 설명합니다. ‘내가 없다’는 뜻일 텐데, 그 ‘나’를 갖고 가는 길이 순탄할 리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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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평소 좋아하는 임제선사의 말에 “隨處作主 立處皆眞(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는 곳마다 참되리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사람 각자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본래 우주의 주인이고 본래 대자유인 셈인데, ‘나’가 있는 한 그 자유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내 욕심을 채울 길도, 내 분풀이를 모조리 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대자유를 실현하는 방법은 오로지 ‘나’를 없애는 길 뿐입니다. 

  ‘수행’이란 결국 ‘무아’의 길을 가는 거겠지요. 그런데 ‘선정’에, 선정이 주는 ‘희열’, ‘즐거움’, ‘평화로움’, 그리고 남들이 갖지 않는 ‘신통력’... 이런 것들에 집착해 수행한다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 되겠지요. 제가 쉐우민에서 받은 영향은 바로 이런 견해를 갖게 됐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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