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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 수행의 개괄적 원리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7월08일 17시35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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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음과 대상

  불교의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철학적 원리가 있다. ‘나’와 ‘세계’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한 견해가 그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도 없고 ‘세계’도 없다. 그것들은 실체가 없고 다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인 그것들은 사실은 주체인 마음과 객체인 대상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마음과 그 마음에 드러나는 대상 두 가지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세계관은 일반적 상식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 같다. 물리적 세계는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상식이다. 이런 상식적 입장을 ‘외부세계에 대한 실재론(realism)’이라고 철학에서는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질 수 있는 외부세계를 양자물리학적으로 따져보면 그저 소립자들의 배열이고, 파동이고, 에너지의 응축현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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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물리학은 상식적인 리얼리즘이 철학적이 아니라 상식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계가 마음이거나 마음에 의존한다는 철학적 입장을 서양철학에서는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이런 분류를 따른다면 불교의 세계관은 모든 존재는 마음과 마음에 의존하는 대상일 뿐이니 관념론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그러나 불교가 서양의 관념론적 철학과 다른 점은 마음 자체도 실체가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수행자들은 이런 논의를 즐기지 않는다. 모든 철학적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과 대상을 명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핀다. 명상의 목적은 이 ‘마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한 대상에 모으기도 하고(집중), 마음이 무엇을 하는 지도 살핀다(통찰). 미얀마의 대부분 수행처에서는 마음이 무엇을 하는 지를 살피는 방식의 명상을 수련한다. 마음이 무엇을 보는가, 듣는가, 느끼는가, 생각하는가 등등을 살핀다. 풍경, 소리, 감촉, 몸의 감각, 느낌...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음의 대상이다. 이 대상들이 마음에 알려질 바로 그때 마음의 상태를 살핀다. 대상을 아는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림을 사띠(Sati, 마음챙김 ; 한문으로는 念으로 번역)라고 하는데, 바로 이 사띠가 이 명상의 키워드이다. 사띠에 대해 이해해야 비로소 수행에 입문했다고 일컬을 수 있다. 

쉐우민의 명상수행을 그래서 사띠빠따나(satipatthana ; 마음챙김의 확립)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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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하는 방식은 이렇다.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에 들어오는 대상을 알아차려라. 들어오는대로, 알아지는 대로, 대상에 대해 알고, 또 알고... 아는 마음을 알고... 아는 마음이 아는 마음을 알고... 사띠의 힘을 키워라. 사띠의 힘이 커지면, 힘들이지 않아도 사띠가 스스로 일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에 대해서 알게 되고, 지혜가 자라나리라. 지혜가 마음 깊숙이 도사린 어리석음과 탐욕과 분노를 몰아내주리라. 마치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어려우셨나요? 아무튼 원리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수행법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직접 수행해 보는 것이겠죠?      

 

  사마타와 위빠사나


  사람 사는 곳에 명상 없는 곳은 없다. 모든 문화권에는 제 나름대로의 명상법이 존재한다. 종교적 전통이 명상을 떠나 성립하는 법은 없다. 기독교의 묵상, 회교의 수피즘, 힌두교의 요가 등은 오랜 종교적 명상의 대표적 전통이다. 모헨조다로 하라파의 유적에서 발굴된 기원전 2500년경의 인장(도장) 유물에는 가부좌를 하고 명상하는 사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 다양한 명상의 전통을 두 가지 원리로 요약해낸 종교적 천재가 있었다. 

 

  스리랑카의 수행승이었던 부다고사는 비슈디마가(청정도론)라는 책을 논서를 썼는데, 그는 “모든 명상은 사마타이거나 위빠사나이다”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의 이런 주장에 적극적으로 토를 다는 학자는 없는 듯하다.

  ‘사마타’는 집중명상이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명상방법이다. 사마디(三昧)를 얻는 것이 이 명상의 목적이다. 부다고사는 수행이 익어감에 따라 깊어지는 사마디를 네 단계로 분류하고 마음에 일어나는 상태의 변화를 설명한다. 기쁨, 즐거움, 평안함 등이 차례로 나타나고 사라지는데, 네 번째 단계에 가면 육체의 호흡까지 사라진다고 비슈디마가에 쓰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실제로 이런 사례들이 있다.) 마음의 번뇌를 끊기 위해 필요한 수행이지만, 지혜를 얻어 해탈하기 위해서는 결국 위빠사나 수행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부다고사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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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빠사나’는 통찰명상이다. 마음의 작용에 대한 통찰을 통해 지혜를 얻는 것이 목적이다. 어원으로 본 의미는 ‘나누어 본다’인데, 마음과 대상을 나눠서 본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일상의 정신작용은 대상에 마음이 들러붙는 양상인데, 마음이 대상에 들러붙지 않고 ‘마음은 마음, 대상은 대상’으로 보는 작용이 바로 사띠(sati)의 작용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한다’는 말은 곧 ‘사띠가 작용한다’는 말이 된다. 참고로 사띠를 영어로는 ‘awareness', 'mindfulness'로 번역한다.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드러나지 않지만 사띠가 작용할 때는 대상과 분리돼 스스로를 드러낸다. 위빠사나 수행은 곧 사띠를 정립하는 수행이며, 사띠의 힘을 키워 마음의 정체를 드러내는 수행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명상이라는 수레를 이루는 두 바퀴의 축에 보통 비유된다. 둘은 상보적 관계로 다른 하나가 결여될 경우 원만한 수행이 이뤄질 수 없다. 이 둘의 관계가 일도양단의 배타적 범주가 아니라 서로의 요소를 어느 정도 나눠 갖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미얀마의 수행센터들은 보통 사마타를 별도로 수행하지 않고 바로 위빠사나 수행으로 들어간다. 이런 방식을 ‘순수 위빠사나’라고 부른다. 순수 위빠사나에서는 사마디는 사마타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을 ‘위빠사나 사마디’라고 개념화한다. 

  사마타를 먼저 수행해 사마디를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미얀마의 수행처가 있다. 파옥 사야도의 수행처인데, 미얀마 수도 양곤에서 남쪽으로 6~7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곳인데도 세계 각지에서 많은 수행자들이 찾는다. 

 

  미얀마의 수행처들 

  양곤은 가히 테라바다 부디즘의 수도라고 일컬음직 하다. 꺼져가던 위빠사나 명상의 불씨를 되살려낸 곳이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1945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그 즈음 테라바다의 불씨도 되살아났다. 그 주역은 마하시 사야도(우리 말로 ‘큰 스님’ 정도의 뜻)이다. 수행으로 평생을 산 그는 독립 미얀마 정부의 지원을 받아 6차 결집(함께 모여 경전을 정리하는 증거하는 일)을 주도했고, 자신의 명상법을 확립해 제자들을 키웠다. 미얀마 뿐 아니라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에서 명상을 가르치는 분들 대부분이 그의 제자이거나 제자의 제자이다. 마하시 센터는 1947년 설립된 미얀마 양곤의 대표적 수행처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1982년 입적했고 지금은 그의 제자들이 센터를 이끌고 있으며, 양곤 시내 한 복판에 널찍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마하시 수행의 한 경험자는, 그 지역이 미얀마의 특권층들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센터 숙소 2층에서 이들의 사는 모습이 다 내려다보이는데, 집집마다 보통 고급 승용차가 2대 있고 저녁마다 파티를 연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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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얀마 전역에 3백여 곳의 마하시의 분원이 있다. 양곤의 참메, 빤디딸라마, 쉐우민 등의 수행처들 역시 그의 제자들이 설립한 곳으로, 마하시 사야도의 ‘순수 위빠사나’를 계승하고 있다. 

 

전통의 큰 줄기는 같다고 하지만, 그러나 수행센터마다 수행방식은 많이 다르다. 

  마하시 센터에서는 호흡과 호흡에 따르는 아랫배의 움직임을 집중해서 알아차릴 것을 강조한다. 경행 시에는 발의 감각과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천천히 걸으라고 가르친다. 하루의 일상이 모두 알아차림이 되도록 하도록 수행하는데, 마하시에 한 달 정도 살면 몸무게가 6-7 킬로그램 정도 빠진다. 센터마다 경행 방식에서 외견상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데, 빤디따라마와 참메 센터에서는 경행과 일상생활의 동작을 매우 천천히 하라고 가르친다. 참메가 ‘천천히’를 가장 강조하는데, 그곳에서는 발을 들어서 내리고 다른 발을 들 때까지의 동작을 6개 동작으로 나눠서 구분하고 (마치 군대에서 총검술 16개 동작을 익히듯... ㅋㅋ) 한 동작 한 동작을 모두 알아차리도록 수련한다. 저녁 산책을 하는데, 숲 속에서 느닷없이 사람이 나오더니 너무 빨리 걷는다고 지적하더라는 경험담도 있다. 밥도 되도록 천천히 먹어야 한다. 아침을 먹고 바루를 씻고 있는데, 점심 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리더라는 조크도 있다.

  마하시 전통에 속하지는 않지만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수행 전통도 있다. 고엔까 센터는 미얀마 뿐 아니라 인도에 많은 분원을 두고 있고,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수행센터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호흡을 통한 위빠사나 명상(‘아나빳나 사띠’로 불리는데, 가장 쉽고 기초적인 수행법이다)과 바디 스캔(몸의 감각을 순차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가르친다. 모곡 센터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수행처로 미얀마 곳곳에 분원을 두고 있다. 12연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 

 

  파옥 사야도는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이지만, ‘순수 위파사나’의 전통에서 벗어나 사마타 수행을 강조한다. 파옥 사야도는 부다고사의 ‘비슈디마가’(청정도론)를 바탕으로 해서 나름대로 수행의 체계를 세웠다고 한다. 파옥 센터는 미얀마 남쪽 3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몰레미얀 지역의 숲 속에 있고, 천 명 정도의 수행자가 수행하고 있는 큰 규모의 명상센터이다. 수행이 엄격하고 매일 인터뷰를 통해 수행을 점검받아야 하는 부담이 크다. 그러나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쉐우민은 미얀마의 센터들 중 가장 자유롭고 지내기 좋은 곳이다. 센터를 세운 꼬살라 사야도는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들 중 가장 연장이다. 현재는 꼬살라 사야도의 법제자 떼자니아 사야도가 이끌고 있다. 좌선도 경행도 비교적 자유롭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수행한다. 좌선 시에도 졸리거나 몸이 견디지 못하면 일어나 경행할 것을 권장한다. 경행도 평소 걸음걸이처럼 자연스럽게 하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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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우민은 되도록 많은 대상에 사띠를 두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에도 함께 사띠를 둘 것을 강조한다. 이 점이 쉐우민 가르침의 고유하고 특징적인 부분이다. “앉아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수행이라면, 일상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좌선과 경행은 일상의 수행을 위한 밑바탕이 돼야 한다”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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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7월08일 17시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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