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코미디, “소극적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한편의 코미디다.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으로 재벌에 대한 국민 여론이 악화되자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은 국민연금이 주요주주로서 적극 나설 것을 주문했다. 형제간 경영권 분쟁으로 인해 롯데그룹의 상장계열사 주가가 크게 하락하였고, 결국 ‘손가락 해임 지시’로 상장되는 후진적 지배구조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들 회사에 투자하고 있는 국민연금(궁극적으로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 8월 10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새누리당 정책위원회에 출석하여, 현행 법령상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소극적 주주권의 범위 내에서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새누리당은 ‘소극적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라’는 해괴한 주문을 하며 ‘롯데그룹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요구’ 방침을 사실상 철회하였다.
언론보도를 통해 기금운용본부와 새누리당 지도부 사이에 오간 문답을 접하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기금운용본부의 궤변에 새누리당 지도부가 농락당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주주권을 ‘소극적 주주권’과 ‘적극적 주주권’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라’는 의미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 요구’를 새누리당 지도부가 ‘소극적 주주권’과 구분되는 ‘적극적 주주권’이 있는 것처럼 오해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기금운용본부는 새누리당 지도부의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는커녕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는데 적극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행 자본시장법에는, 5% 이상의 지분을 취득하여 대량보유 공시(이른바 5%룰)를 할 때 ‘경영 참여’로 신고를 해야 할 영향력 행사 유형이 열거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것을 이른바 ‘적극적 주주권’이라고 정의한다고 하더라도, 국민연금으로 하여금 롯데 사태에 적극 개입하라는 것이 반드시 ‘경영 참여’ 신고를 필요로 하는 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반드시 빈번한 공시에 따른 포트폴리오 내역 누출 및 단기매매차익 반환 등의 제약을 불러오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금운용본부는 롯데 사태에 대한 국민연금의 관여가 초래하는 제약 효과를 지극히 과장함으로써 새누리당 지도부를 오인하게 만들었다.
주주권 행사는 일련의 과정이다. 2010년 제정된 영국의 Stewardship Code 및 이를 기초로 2014년에 EU 전체의 강행규범으로 제정된 Shareholder Rights Directive에는 기관투자자들의 주주권 행사 원칙과 절차가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ⅰ) 주주권 행사의 출발점은 피투자회사에 대한 지속적 감시(monitoring)이며, ⅱ) 이를 기초로 피투자회사 경영진과 적극적으로 비공개 대화를 진행함으로써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공동 모색하는 ‘주주 관여’(engagement)를 시행하여야 하고, ⅲ) 그래도 개선되지 않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공개 개입(intervention)하는 조건과 방법을 수립하여야 하며, ⅳ)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기관투자자들과의 연대 활동을 추진하여야 하고, ⅴ) 이러한 주주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상충 문제를 관리하는 절차를 구축하여 공시하여야 하며, ⅵ) 의결권 행사지침을 명확하게 수립하고 그 행사 내역을 공시하여야 하고, ⅶ) 마지막으로, 이상의 모든 권리행사 내역을 이해관계자들에게 주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이상의 주주권 행사의 범위와 절차를 감안하면, 국민연금이 ‘경영 참여’ 신고를 하지 않고서도 롯데 사태와 관련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으며, 그래도 개선되지 않을 때에는 ‘경영 참여’ 공시를 하고서라도 해야 할 일 또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금운용본부는 현행 법령 하에서는 ‘경영 참여’ 신고를 하지 않고서는 국민연금이 롯데에 영향력을 발휘할 여지가 별로 없고, 영향력 발휘를 위해 ‘경영 참여’ 공시를 하면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에 너무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는 식으로 새누리당 지도부를 농락한 것이다.
반례를 들자면, 작년 현대차그룹의 한전부지 매입 건 때나 최근 삼성물산 합병 건 때 네덜란드연기금(APG)를 비롯한 다수의 해외 기관투자자들은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주주 관여’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현대차와 삼성물산으로부터 거버넌스위원회 설치 및 배당 확대 등의 주주친화정책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들 해외 기관투자자들 역시 한국과 자국에서 공히 5% 대량보유 공시 등의 법률적 제약에 직면하고 있는데, 해외 기관투자자들은 할 수 있었던 일을 국민연금만 하지 못할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마지막으로, 기금운용본부는 현행법상 ‘경영 참여’ 공시를 필요로 하는 ‘적극적 주주권’은 행사하기 어렵지만, ‘경영 참여’ 공시가 필요 없는 ‘소극적 주주권’은 행사할 수 있고, 나아가 국민연금이 지금까지 그렇게 행동해왔다는 식으로 새누리당 지도부를 오인하게 만들었다. 특히 피투자회사의 경영진과 적극적으로 대화함으로써 문제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주주 관여’(engagement) 활동은 과거에도 수행해 왔고, 따라서 롯데의 경우에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식으로 보고했다. 한마디로, 허위보고다. 국민연금이 피투자회사의 경영진과 미팅을 가지기는 했겠으나, 이를 ‘주주 관여’ 활동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피투자회사 경영진이 압박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실효성 있는 개선방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국민연금이 압박 강도를 높이는 후속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닌데, 그런 형식적인 미팅을 어찌 ‘주주 관여’ 활동이라고 부르겠는가.
한편, 기금운용본부가 이런 궤변을 늘어놓게 된 배경으로서, 금융위의 책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금융위는 올해 초 ‘2015년 업무계획’에서 국내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행사 강화를 위해 ‘한국판 Stewardship Code’ 제정을 추진하고, 기관투자자의 경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기관투자자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장애가 되는 요인도 합리화할 계획임을 발표한 바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2010년 제정된 영국의 Stewardship Code는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오남용 문제를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 실제로 주주권을 행사한다면 어떤 원칙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지 등의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한 모범규준이다. 일본도 작년 2월 서둘러 ‘일본판 Stewardship Code’를 제정하였고, 작년 5월까지 일본의 127개 기관투자자가 이를 행동지침으로 채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의 ‘한국판 Stewardship Code’ 제정 계획은 여기에 자극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초 6월 경 발표될 예정이던 ‘한국판 Stewardship Code’ 초안은 현재까지 감감무소식이고, 금융위는 여에 대해 별다른 이유나 향후 일정도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제정안의 발표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만일 금융위가 기관투자자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한국판 Stewardship Code’ 제정안을 예정대로 발표하고 시행했더라면, 최근의 삼성-엘리엇 사태 및 롯데의 경영권 분쟁에서와 같이 국민연금이 상당한 손실을 입고도 주주권을 행사할 근거가 부족하다며 ‘소극적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한다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국민연금이 국회의 주주권 행사 요구를 사실상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금융위가 한국판 'Stewardship Code'의 제정을 미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작년에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이 우리나라의 금융시장 성숙도 순위를 말라위(79위)와 우간다(81위) 등 아프리카 권역에 준하는 세계 80위로 평가하여 논란이 된 바 있다. 그러나 현대차의 한전부지 고가매입, 삼성물산 합병의 불공정성,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 등 재벌기업들의 시대착오적인 지배구조 문제를 감안하면, 그리고 국민연금을 비롯한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세계 80위라는 평가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공정거래법 등의 강행 행정규제만으로는 재벌개혁을 달성할 수 없다. 시장참여자, 특히 기관투자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 유효하고도 지속가능한 재벌개혁 방안이다.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지침을 만들어 적극 행사하여야 하며, 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금융위는 조속히 Stewardship Code를 제정하여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