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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3> 천년제국 로마의 역사 개관(기원전 753~서기 476)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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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10월26일 17시14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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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를 흔히 천년제국이라고 부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면 로마제국의 역사는 약 1,200년 정도가 된다. 로마제국이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었고, 서로마제국이 476년까지 지속되었으니 정확하게 계산하면 1,229년간 존속했다. 『로마사』의 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 등 많은 사람들이 로마제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서로마제국에 국한해서 언급한다. 실제로 동로마제국이 1453년에 멸망하는 시기까지 포함한다면 2,200년이 넘지만, 필자 역시 서로마제국에 국한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오랫동안 대국으로 존속하고 유지된 국가는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제국, 칭기즈칸의 몽고제국, 페르시아왕국, 청나라 등 인류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긴 국가는 많았지만, 대개 300년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로마는 오랫동안 강성함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가 로마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래서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로마 역사를 3단계로 구분했는데, 1,229년의 로마 역사를 왕정시대 244년, 공화정시대 482년, 제정시대 503년으로 나누었다. 왕정시대(기원전 753~509)는 로마의 건국 초창기로, 7명의 왕이 다스렸던 시기다. 로마 건국의 시조는 로물루스(Romulus) 왕인데, 로마(Rome)의 어원은 바로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로물루스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대 왕 로물루스는 혼자서 독단으로 처리하는 전제국가를 선택하는 대신, 국정을 왕, 원로원, 민회로 구분하여 3권분립을 이루었다. 왕을 투표로 선출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 세습제가 아니라 종신제가 되도록 했다. 세습제는 왕위가 혈통에 의해 계승되지만, 종신제는 왕이 죽으면 다시 왕을 선출한다. 왕은 민회에서 선거에 의해 뽑고, 죽을 때까지 권력을 맡겼다. 

 

그러나 로마 왕정은 7대 왕인 타르퀴니우스가 시민들의 신뢰를 잃으면서 붕괴된다. 그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이미 정통성을 잃었다. 선왕을 암살하고 왕위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 된 후에도 원로원과 민회를 무시하고 정치를 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를 ‘거만한 왕’이라고 불렀다. 결정적으로 왕정 붕괴는 그의 아들 섹스투스가 일으킨 유부녀 강간 사건으로 일어났다. 강간당한 당사자가 자결하자 시민들이 분노하여 궐기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로마 왕정은 건국 후 244년이 지난 기원전 509년에 종말을 맞았다. 

 

그 후 로마는 공화정시대로 진입했다. 공화정이란 공공의 이익 또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국가라는 뜻이다. 공화정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갈망과 1인 지배에 대한 거부감이 표출된 결과다. 로마인들은 일단 왕이 선출된 후 죽을 때까지의 기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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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은 기원전 509년에 시작하여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등장하는 기원전 27년까지다. 공화정과 왕정의 차이점은 왕을 대신하여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왕정과 마찬가지로 민회에서 집정관을 선출하되, 임기가 1년밖에 되지 않고 2명씩 선출했다. 공화정은 집정관, 원로원, 민회라는 권력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로마는 공화정시대에 영토를 넓혀 제국을 건설했다. 공화정시대의 최대의 사건은 포에니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 시작하여 120년 동안 3차에 걸쳐 일어났다. 포에니전쟁을 끝으로 로마는 외부의 적을 모두 복속시켜 통합한다. 로마는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를 점령하여 명실공히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고,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전부 식민지로 만들었다. 로마를 위협할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이 사라지고 나니 내부 분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과 민중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이다.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 혜택은 귀족에게만 돌아갔다.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후퇴했다. 민중들은 토지 문제를 가지고 싸워야 했다. 이후 100년 동안 민중과 귀족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지루한 싸움이 지속된다. 집권 세력이 바뀌면 피의 숙청이 일어났고 살생부가 등장했다. 이때, 피로 얼룩진 숙청의 악순환을 끊겠다고 생각한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광활한 제국의 영토를 통치하려면 매년 정권이 바뀌어서는 안정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래서 황제 체제를 구상했다. 원로원파의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고 한다며 암살 음모를 꾸몄고,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결국 브루투스 일파에게 암살당한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원로원과의 갈등으로 암살당하는 것을 보고, 원로원과 화해 무드를 조성하여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함으로써 원로원의 환심을 산다. 하지만 그는 카이사르와 방향은 같지만 방법이 달랐다. 결국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황제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탄생했고, 기원전 27년에 제정시대가 열려 서기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 황제 체제가 이어진다.

 

제정시대는 다시 원수정시대와 전제정시대로 구분된다. 원수정시대는 1인자, 즉 원수가 원로원의 승인을 얻은 체제로 동양의 전제군주제와는 달랐는데,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서기 284년까지 계속된다. 전제정시대는 서기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시작하여 서기 476년까지 지속된다. 전제정시대는 절대군주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이에 따라 원로원의 입법 기능은 사라지고, 황제가 집정관을 직접 임명하고, 법안을 제정할 때도 원로원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황제의 칙령으로 바뀌었다. 이 체제가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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