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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의 문화시평 <38> 국립 근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선결과제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4년08월0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4년08월04일 08시48분

작성자

  • 김찬동
  • 전시기획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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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23일 프레스센터에서는 ‘국립 (20세기) 근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모임’),한국예술인총연합회와 그리고 한국미술협회 등 3개 단체가 주최하였다. 지난 2021년 5월 서울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모임’ 발족식을 겸해 시작된 이 논의는 지난 1월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를 맞는다. 이 ‘모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장과 학예실장 등을 역임한 인사들로부터 작가, 평론가 등 미술계 인사 380명이 참여하고 있고 예총과 미협의 회원까지 합치면 대한민국 미술계의 웬만한 인사들은 모두 참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논의는 오래전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있어왔지만 2020년 10월 고 이건희 회장의 작품이 국가에 기증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모임’의 핵심적 주장은 종로구 송현동에 건립 중인 ‘이건희 기증관(가칭)’ 건립과 관련하여, 차제에 이 미술관을 국립 근대미술관으로 조성하고, 미술관 건물의 일부를 ‘이건희 기증실’로 배정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1,100여억 원의 예산을 들여 이건희 기증관을 짓고자 현재 건축 설계 공모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날 세미나 행사엔 문화체육부 장관도 참석하여 인사말을 했고, 저명한 미술평론가이며 일본 전국미술관회의 회장인 다테하타 아키라(建畠晢) 씨까지 초청하여 행사의 형식을 갖추었다. 장관은 인사말을 통해 근대미술관의 필요성에 충분히 공감하며, ‘모임’의 활동도 들어 알고 있다고 전제한 뒤, 정부가 막후에서 이 학술행사를 지원하거나 조정하는 것처럼 오해되지 않기를 요청하며, 미술계의 의견을 경청하며 근대미술관 조성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이 언급은 구체적인 의견보다는 미술계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원칙적인 입장 정도로 읽힌다.

 

  필자는 지난 1, 2차 모임 때와 같이 이 행사를 참관하며 참 갑갑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정부는 2028년까지 ‘기증관’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고, 이와는 별도로 대통령 공약 사항인 대구에 근대미술관 건립 계획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대구의 공약사항이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된 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임’의 관계자들이 나서서 구체적인 건축설계안까지 제시하며 별도의 계획을 촉박하게 발의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미술인들 대부분은 국립 근대미술관 건립의 필요성에 반대할 이유도, 열정을 가지고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고 있는 ‘모임’과 단체의 노력을 폄훼하거나 무시할 생각도 없다. 우리의 미술관 제도는 근대에 대한 고려나 연구 없이 1969년 곧바로 국립 현대미술관을 먼저 조성했기 때문에 미술사를 재정립하는 차원에서라도 근대미술관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임’의 논의는 ‘근대’라는 육중한 무게를 수용할 계획안 치곤 너무 엉성하고 졸속으로 흐를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이들 ‘모임’의 입장은 근대를 20세기로 한정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새로 조성될 미술관의 이름을 ‘국립 근대(20세기)미술관’으로 하자는 제안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대, 근대, 현대의 기점을 어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학계나 미술계의 합의가 도출된 바가 아직 없다. 많은 학설만 난무할 뿐이다. 특히 근대나 현대는 영어로 Modern으로 표기되는데, 이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관점에서 서로 다른 기점들을 논하고 있으므로 서구나 일본과 달리 나름의 구분과 기점 설정이 난망한 과제이다. 

 

 따라서 ‘모임’이 제기하는 주장들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근대의 기점 문제이다. 대표적인 근대개점론은 우선 영·정조 시대 기점 설, 새로운 교육 및 근대적 제도 도입 시기인 개항기 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참가와 이왕가박물관 건립 등을 염두에 둔 대한제국 설, 서화협회 창립과 고희동의 최초 일본 유학 시기와 관련된 1910년대 설, 조선미술전람회 신설 시기를 염두에 둔 1920년대 설 등등 너무도 다양하다. 또한 1948년 이후를 현대로 보려는 관점 등을 고려할 때 20세기 미술만을 근대로 한정하자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 

 

  둘째 기점 결정에 연동된 소장품의 분류에 관한 문제인데, 근대의 기점에 따라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품과 국립 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을 조정하여 국립 근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조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각 관의 입장에 따라 단시일 내에 완결될 문제도 아니고, 특히 공예나 사진, 건축 등 미술의 유사 분야가 가지는 근대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매우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기실 이 문제는 당사자인 국립 중앙박물관과 국립 현대미술관이 나서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셋째 근대미술의 주요한 내용인 소장품 확보에 관한 일이다. 우선 정확한 소재와 수집 가능성, 소요 예산 등 면밀한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우리 근대 역사가 가진 친일, 전쟁과 이념, 디아스포라 등등의 복잡한 문제까지 아우르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수집할 때 기증뿐만 아니라 구매할 작품들이 많을 것이어서, 구입예산 규모에 대한 조사도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많은 지방 자치 단체들이 행하는 것처럼 건물 먼저 짓고 작품을 확보하는 비합리적인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넷째 이건희 기증관과 근대미술관의 상관성 문제이다. ‘모임’의 주장은 전술한 바와 같이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에는 우수한 근대미술 작품이 62% 정도를 차지하는 상황이니 차제에 기증관을 근대미술관으로 건립하자는 것인데, 고미술까지를 포함한 기증품 전체를 전시할 독립공간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정부의 계획과는 크게 상충한다.

 

  다섯째 위의 경우를 전제로 한 미술관의 입지 선정과 운영체제의 문제이다. 접근성과 지속가능성, 뮤지엄 클러스터 효과를 고려하여 송현동에 짓고 운영체제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행정법인 형태로 하자는 의견이다. 이미 정채진 입지 선정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정부로부터 독립된 전문행정법인 형태를 취하자는 문제는 2011년 국립 현대미술관 법인화 논의 후 지난 2018년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법인화를 공식 포기한 상황과, 2001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독립행정법인 국립미술관 제도의 부분적 성공 사례를 고려하면, 국립미술관 법인화 문제에 대한 신중한 재론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독립 법인화의 장단점을 놓고 여전히 갑론을박의 논쟁 소지가 남아있어 근원적인 논쟁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부의 국립 이건희 기증관 건립계획에는 고대와 근·현대,해외작품 등 시대구분 없이 기증작품 모두를 한곳에 모으기를 원하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근대미술관의 개념이 아닌 셈이다. 일각에서는 기증품 중 고대 유물은 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미술작품만 기증관의 소장품으로 하자는 견해도 있다. 또한 지난 이야기이지만 삼성가가 운영하는 리움미술관의 분관이나 별관처럼 되어버릴 확률이 높은데, 이건희 기증관에 1,000억 원 넘는 혈세 투입은 비효율적이라는 ‘기증관 무용론’도 제기되고 있다. 차라리 고대 유물은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그리고 나머지는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관리하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의견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근대미술관 건립과 관련된 최근의 논의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앞에 놓고 있는 상황인데, 정부와 미술인들이 동상이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기실 이 문제는 국가의 뮤지엄 정책에 관한 마스터 플랜 속에서 체계적으로 논할 문제이다. 당사자인 국립 현대미술관과 국립 중앙박물관이 사안에 대한 논의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민간에서 먼저 나서서 몰아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정도쯤 되면 정부가 나서 책임 있게 공약 실천 계획까지를 포함한 근대미술관의 본격적인 계획안을 발표하고 공청회라도 여는 것이 순서 아닐까? 이건희 기증관 건립에 속도를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좀 더 차분히 미술계의 의견을 진지하게 청취하는 일을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국립 근대미술관의 건립에는 뮤지엄 전문가들의 의견이 매우 중요한데, 이들은 논의에서 배제되고 작가와 미술사가 중심의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문제는 국가의 뮤지엄 정책의 대계와 관련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의 근현대사에 대한 문화적 인식을 정립하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국가 뮤지엄 발전 마스터 플랜 수립을 위해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라도 조속히 발족시켜 하나하나 꼼꼼히, 투명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자리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정부는 언제까지 마스터 플랜 하나 없이 외부적 요인에 떠밀려 돌발적이며 비자발적 과제 풀기에 급급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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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8월0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4년08월04일 08시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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