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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갈등과 아태지역제도의 변화:2023 샌프란시스코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11월03일 11시19분
  • 최종수정 2023년11월03일 10시32분

작성자

  • 문돈
  • 경희대학교 국제대학 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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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23 APEC 정상회담(공식명칭으로는 “경제지도자회담”)이 “모두를 위한 회복력 있고 지속가능한 미래 창조(Creating a Resilient and Sustainable Future for All)”를 주제로 11월 17~1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다. 불확실했던 중국 시진핑의 참석 여부는 참석으로 확정된 듯하고, 기대했던 미·중 정상회담 역시 순조롭게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하마스 군사 충돌과 중동 전체 위기 확산으로 지구적 불안감이 한껏 고조된 상황에서, 가장 큰 영향력과 책임성을 지닌 두 국가 정상이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세계 경제와 정치에 일정한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정상회의는 코로나 종식후 처음 열리는 APEC 대면 정상회의이기도 하지만, APEC 장기비전과 구체적 지침으로 2020년 채택 된 푸트라자야 비전 2040(Putrajaya Vison 2040)과 아오테아로아 행동계획(Aotearoa Planof Action)을 점검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대부분 정상회의가 그러하듯, 2023년 한 해 동안 수차례 열렸던 고위급실무자 회담(SOM:Senior Officers’ Meeting), 통상장관회담, 주제별 포럼, 연구단체연석회의 등의 논의를 종합하고 정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의와 관련하여 특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포인트는, 미·중 대립의 격화 속에서 과연 APEC을 비롯한 지역제도가 어떤 압력과 도전을 받고 있으며,어떤 적응과 재편을 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태지역에서 특별히 오랜 역사와 최대다수의 참가자를 보유한 다자기구인 APEC은 미·중 전략경쟁 아래 판도변화의 시금석으로서 특히 중요하고 흥미롭다. APEC은 1989년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한국, 그리고 당시 ASEAN 6개국을 창립회원으로 출범했으며, 1991년 중국, 홍콩, 대만, 이후 멕시코, 파푸아뉴기니 (1993), 칠레 (1994)를 거쳐 1998년 러시아, 페루, 베트남의 가입으로 현재의 21개국 회원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냉전 종식 후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 세계경제의 지역블록화(EU와 NAFTA)가 가속화되던 당시 상황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독자 블록화를 저지하고 미국과 동아시아가 연대한 거대 경제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회원국의 전체 경제 규모, 인구, 경제성장률 등 여러 지표에서 최대의 경제권역이 형성된 것이며, 특히 아태지역을 넘어 전 세계정치경제의 주요행위자인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모두 당연직 회원으로 포함되는 유일한 지역협력체라는 점에서 출범 초기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APEC의 역동성 및 성취와 관련하여 가장 높은 기대가 형성되었던 시기는 미국이 의장국을 맡았던 1993년 무렵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신태평양 공동체(New PacificCommunity)” 건설을 기치로 시애틀에 회원국정상들을 초대함으로써 APEC 연례정상회의를최초로 제도화했다. 아울러 미국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전까지 매우 느슨한 협의체 수준에 머물러 있던 APEC을 보다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국제기구로 전화시키고자 하였고, 가시적 목표인 APEC 자유무역지대 (FTAAP: Free TradeArea of Asia-Pacific)를 선진국은 2010년까지,개도국은 2020년까지 완성하자는 야심 찬 계획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후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APEC 제도화의 속도와 수준에 대한 이견, 1995년 WTO 성공적 출범에 따른 APEC에 대한 상대적인 관심 저하, 특히 1997~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부각된 APEC의 무능함과 무책임성으로 인해 APEC의 효능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가 팽배하게 되었다. FTAA를 포함하여 높은 수준의 경제통합은 더 이상 APEC의 실질적인 목표로 추진될 수 없었고, 소의 “APEC 정상회의에서 하는 일은 각 국가 정상이 주최국 전통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은 일뿐”이라는 조롱 섞인 비판도 듣게 되었다

 

비록 APEC이 초기의 기대와 같은 구속성, 엄밀성, 위임성을 지닌 높은 수준의 제도로 진전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APEC 무용론 혹은 폐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제도주의의 여러 연구가 입증하듯, 제도는 일단 형성되면 상당한 관성을 가지고 지속되고, 자체의 경로의존성(path-dependence)을 만들어 내며, 내외적 압력에 적응하여 위상과 기능을 재조정하게 된다. 역내 무역/투자 자유화를 경제협력 의제 중 주요한 하나로 여전히 포함하지만, 그 속도와 방식에서는 국가별 유연성과 자율성을 인정하였고 추진 방식도 강제가 아닌 모범을 통한 성과확산으로 변화되었다. 매년 회의의 주제 및 핵심의제도 인간안보(2010년), 녹색성장과 규제협력(2011년), 식량안보와 혁신성장(2012년), 인프라개발협력과 중소기업 지원(2014년), 인적자원개발(2015년), 기후변화 대응(2017년), 여성에 대한 기회 제공(2019년), 디지털경제(2020년), 포스트코로나 시대 회복력 복원과 포용적 성장(2022년) 등경제협력의 거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이슈들로확대되어왔다.34년의 긴 기간을 거치면서 APEC은 나름의 내용적·절차적 원칙을 확립하고 발전시켜 왔다.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는 APEC 특유의 내용적 원칙이라 할 수 있는데, 역외국을 무역과 투자에 있어 역내국과 동등하게 대우함으로써 APEC을 배타적 경제블록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지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절차적 원칙은 “합의와 조화(consensus and harmony)”로서, 모든 의사결정에 있어 각 회원국 합의를 중시하고 강제적 방식이 아닌 점진적이고 자발적 방식으로 공동 행동과 이견 조정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APEC 원칙은 소위 “아시아적 방식(Asian Way)”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강한 구속력을 가진 법적 제도화를 특징으로 하는 미국적 방식 혹은 서구적 방식과 대비되는 제도적 특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탄력성, 유연성, 합의제, 점진성, 비차별성 등 APEC 원칙의 여러 장점은, 당연하게도 비효율성, 지지부진함, 시간 소모와 정체, 실질적성과 부재와 같은 APEC의 고질적 단점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게 된다.

 

2023년 주최국 미국은 핵심 정책의제로 상호연계(Interconnected), 혁신(Innovative), 포용(Inclusive)의 세 범주를 제시하였다. 첫째 범주인‘상호연계’는 공급망 안정성 강화, 서비스무역, 디지털 무역, 아태자유무역협정(FTAAP: FreeTrade Agreement of Asia-Pacific), WTO 개혁과 강화 등 주로 다자/지역 무역과 관련된 주제를 다룬다. 두 번째 범주 ‘혁신’은 기후위기 대응, 재난 등 위기에 대한 응급 대응, 식량안보 등의 주제를, 세 번째 범주인 ‘포용’은 중소기업 지원, 성 형평(equity) 인프라 투자, 노동자와 소수자 목소리 반영 등을 세부주제로 담고 있다. 

 

개별 주제에 대해 여기서 상세히 살펴볼 수는 없겠으나, 현재의 미·중 갈등 혹은 경쟁 구도와 관련하여 대략 다음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미국이 주도성을 가지고 공세적 입장에서 제기하는 것으로서 주최국 미국의 이해를 강하게 담고 있는 것들이다. 공급망 안정성, 디지털무역, 서비스무역 등의 주제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2021년 인도·태평양 전략(Indo-Pacific Strategy)의 경제적 축인 IPEF(Indo-PacificEconomic Framework)를 주창하면서 그 내용을 제시한 바 있다. 미국은 전략경쟁이나 자연재해 등 공급망 붕괴 위험으로부터 경제안보를 확보하고 디지털 무역과 노동권 강화, 반부패 등 새로운 무역규칙을 만드는 데 리더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을 초대하여 중국을 배제한 경제협력체를 만들겠다는 IPEF에서 제시했던 내용 일부를 APEC을 통해 제기함으로써 그 외연을 확대하고 동의 범위를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WTO 개혁도 미국의 중요 아젠다 중 하나인데, 중국의 WTO 규범 악용 혹은 오용을 방지할 강력한 다자적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주제는 미국이 일정하게 수세적·방어적 입장을 견지할 것으로서, WTO 강화, FTAAP 진전 등이다. 항소기구 재판관을 임명하여 WTO 분쟁해결기구를 정상화하는데 미국은 여전히 부정적이며, 국내 정치 지형상 새로운 자유무역협정을 시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주제는 미·중을 비롯한 전체 회원국이 이익을 공유하는 주제인 글로벌 공공재 공급에 관한 것으로서, 기후변화 공동대응, 팬데믹 등 재난대비, 사이버안보, 인프라투자를 통한 개도국지원 등이 그것이다. 이런 주제는 미국과 중국이 협력할 여지가 많을 뿐 아니라 여타 APEC 회원국, 특히 개도국들의 지원과 인정을 얻기 위해 ‘매력경쟁’을 벌이는 영역이라 하겠다.

 

미·중 경쟁, APEC의 미래, 그리고 한국

 

미·중 패권경쟁이 세계질서 및 글로벌 다자제도 전반에 심대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전국인 중국의 앞마당 격인 동아시아지역은 미·중 대립이 어느 지역보다도 격렬하고 노골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음은 물론, 그로 인한 제도 재편의 압력도 강력하고 즉각적이다.미·중 전략경쟁의 블랙홀에서 APEC을 비롯한 지역제도, 병존하고 경쟁하고 융합되면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아태지역의 여러 제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재편되고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학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정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현실주의는 패권경쟁의 한 형태로서 제도적 경쟁과 균형에 주목한다. 기존 제도 내부에서 패권국과 도전국은 현상유지/변경, 특권유지/변경, 영향력의 지속/변화를 둘러싸고 투쟁을 벌이고 (내부적 균형) 그 결과 제도가 유지되거나 분열되거나 소멸된다고 예측한다. APEC을 비롯한 아태지역제도의 맥락에서 보자면, 현재의 미국 우위 구도에 대한 중국의 도전은 더욱 거세질 것이며 그 결과 일방이 타방을 제압하여 무력화하거나 축출하는 결과가 도래할 것이라 본다. 제도 내 패권경쟁에서 밀려나 영향력을 관철하기 어렵게 된 국가, 혹은 제도적 제약이 거추장스러워 이를 벗어나려는 국가는 기존 제도 외부에서 제도를 새롭게 구축함으로써 제도적 균형(외부적 균형)을 이루게 된다. 반면 합리적 제도주의는 협력 촉진을 위한 제도의 기능과 역할에 주목한다. 제도가 필요한 기능을 적절히 수행함으로써 그 유용성을 입장하지 못한다면 회원국으로부터의 외면, 무력화, 그리고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예측한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디커플링과 같은 공급망 분리가 심화되고 배타적 블록화로 APEC 회원국이 양 진영으로 균열된다면 APEC은 열린 지역주의와 합의제 원칙에 기초한 역내 경제협력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며 그 결과는 무력화와 소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관론적·파국적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미래는 구조적 제약에 완전히 구속된 것이 아니며 그 속에서 공간을 열어가는 행위자에 의해 변화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도는 행위자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유력한 수단이다. 미·중 갈등이 APEC과 같이 느슨하고 모호한 조직의 유용성에 대한 의구심과 도전을 제기하는 것은 사실이나, 지역 내 주요행위자를 모두 포괄하는 다자조직으로서 APEC의 가치는 재평가 되어야 한다. 정기적인 접촉과 대화의 장을 제공하고, 신뢰 구축을 위한 경험을 축적하며, 위급상황에서 긴장을 완화하는 안정적 협의의 틀을 만드는 것은 아태지역에서 매우 긴요한 제도적 과제이며, 당장 일거에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APEC은 이러한 방향으로 자신의 역할과 위상을 재조정해 나가야 한다.1)

 

‘ 냉전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Warsaw Pact) 양 진영을 모두 포괄하는 OSCE(Organization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가 긴장 완화, 신뢰 구축과 협력유지를 통해 냉전의 안정적 관리와 종식에 크게 기여했던 것처럼, APEC역시 역내 모든 행위자가 참가하여 갈등을 관리하고 글로벌 공공재 공급을 위해 협력하는 제도적 틀로 발전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도적 전환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임자이며 가장 큰 수혜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한국과 같은 중견국가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될 때 비로소 ‘글로벌중추국가’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인정을 대내외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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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3년 5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APEC 통상장관회의 의장성명(Statement of the Chair)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와 러시아의 침략행위에 대한 비난(4항)이 포함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성명 마지막 문장에 명시적으로 “APEC은 안보문제를 다루는 장은 아니지만, 우리는 안보이슈가 세계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식한다“고 적시함으로써, APEC의 논의 주제와 영역이 확장될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ifsPOST> 

 ※이 글은 세종연구소가 발간한 [정세와 정책 2023년 11월호 제57호(통권 368호)]에 실린 것으로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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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11월03일 11시19분
  • 최종수정 2023년11월03일 10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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