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57>국가위기와 행정개혁 V. 수령육기법(守令六期法)을 도입하자.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2월0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4일 10시1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2

본문

V.1 수령육기법의 채택 (세종 5년 6월 5일)

 

[수령(守令)의 역할]

 

수령(守令)은 지방 행정기관인 부(府), 대도호부(혹은 목), 도호부, 군, 현 각각의 최고 책임자인 부윤(府尹), 대도호부사(혹은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또는 현감)을 통칭하여 말한다. 이들 지방행정기관의 최고 책임자는 백성들을 가까이에서 직접 대하는 관리라고해서 근민지관(近民之官)이라고 불린다. 감사(都觀察事)는 이들 수령을 감독하는 직책이므로 수령이 아니다. 다만 감사도 감사의 영이 소재해 있는 군현의 장을 겸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수령이라고 볼 수는 있다.

 

수령의 역할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라의 통치에 매우 중요하다. 하나는 중앙통치를 지방에 효과적으로 파급하는 것이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방 토착 세력의 영향력을 통제하는 것이 수령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건국 초기 각 지방에는 지방 토호들(이를 향원이라고 함)이 유향소(留鄕所)를 만들어 수령들을 비방하거나 혹은 견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왕조가 효과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느냐 못하느냐는 수령과 같은 지방행정조직의 책임자의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수령의 선발과 임용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은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는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수령의 임기는 6년이다]

 

수령의 활동과 역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임기문제다. 임기가 너무 짧으면 수령이 제대로 행정을 펼 시간이 없고 또 너무 자주 교체되는 데에 따른 번거로움의 단점이 있고 반대로 너무 길면 나태해 진다든가 토착비리에 연루된다든가 하는 폐단이 있게 될 가능성이 높다. 태조 이후 수령의 임기는 3기(3년), 중앙관리 임기는 그 반으로 정해져 있었다. 과거 중국 우(禹)나라 때의 수령 임기 9년과 위, 진나라 때의 임기 6년, 그리고 당나라 때 3년을 감안하면 적당히 6년(60개월) 정도가 좋을 것이라고 이조가 제안했다. 태종도 관리의 임기가 너무 짧은 것은 부당하다고 여러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세종은 수령의 임기를 6년으로 정했다(세종 5년 6월 5일).

aa9924ae30640c0abc97e1ed632e8399_1674285

V.2 수령육기법 반대 여론 

 

수령육기법이 채택되자 곳곳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맨 먼저 반대하고 나선 사람은 사헌부 집의 김타였다. 김타는 일단 육기법과 삼기법이 모두 폐단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주 바뀌면 직무가 제대로 되지 못할 것이고 오래 맡기면 나태해질 것이므로 둘 다 같은 폐단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육기법의 큰 폐단 세 가지를 나열했다(세종 7년 6월 2일).

 

   (i) 오래 가족과 떨어져 체임함에 따라 가정생활이 안정되지 못해 

      한심해지고 또 간악한 아전에 속기 쉬워진다. 

   (ii) 아래를 긁어 위에 바치고 뇌물로 축재하는 것만 생각하여 백성의 고    

    혈을 빠는 부정한 수령이 되기 쉽다.

 

   (iii) 오래 됨에 따라 나태해지고 방탕해지기 쉬우며 백성들도 쉽게 지겨    

     워 한다.

 

김타는 육기법은 그대로 두고 그 보완책으로 고과제도를 개편하자고 제언하였다. 수령은 매년 두 번 고과(직무평가)를 실시하는데 첫 다섯 고과의 평가를 가지고 연임 여부를 결정하였다. 허조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다섯 번 고과 중에서 세 번 상(三上) 혹은 그 이상이면 자급을 올려주고 하(下)가 한 번 나오면(一下) 파면되었는데 이 제도가 너무 느슨하므로 3중 이하를 모두 파면하자는 것이 김타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유임조건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과도한 유임도 줄이고 고위 자급이 많아지는 것도 줄이며 동시에 수령들의 의욕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종은 김타의 의견을 경청했다. 마음의 품은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기개를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다만 삼중(三中)은 너무 엄격하므로 사중(四中)으로 결정했다(세종 7년 6월 2일).  

 

육기법의 실질적인 반대운동의 맨 앞에는 집현전 부제학 신장(신숙주의 부)이 있었다. 가뭄 대책을 묻는 세종의 요청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신장 등 13명이 열거한 육기법의 부당성은,

 

    (i) 여론(10명 중 8, 9명)이 반대한다.

 

    (ii) 순리(循吏), 즉 현명한 지방관리가 매우 드물다. 따라서 그런 무능한     

     수령이 오래 부임(체임,遞任)하게 되면 안 된다 

 

    (iii) 재임기간이 길어지면 자동적으로 자급을 올려주게 되어있는데 

      이렇게 되면 자급이 높은 관리가 너무 많아진다.

 

    (iv) 법도 당연히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므로 중국의 옛날 법에 따라

        육기법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신장 등의 반대에 대해 세종은 단단히 화가 났다.

 

   “너희들이 육기법을 파하고 삼기법으로 복귀하자고 하는데 관리들의 

    삭체와 잦은 번고의 폐단을 생각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것을 하는 

    이유는 폐해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다 역사책을 읽었을 

    것인데 구임이 불가하고 삭체가 유익하다는 것이 어디에 실려 있더냐. 

    (爾等欲罷六期之斷 而復行三年之法 官吏之數遞反庫之有弊 

    曾不計也 予之所爲 其甚非歟 爾等皆讀史籍 久任之不可 

    數遞之有益 載在何典乎 : 세종 7년 6월 27일)” 

 

여기서 삭체(數遞)란 자주 교체되는 것을 말하고 번고(反庫)란 관리가 교체될 때마다 창고를 다시 조사함을 뜻한다. 신장 등 반대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당나라도 육기법을 오래 시행하지 못했고 또 삼기법은 태조와 태종이 이루어 놓은 법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세종은 당돌한 반대파의 반론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 반대였다. 특히 여론을 업고 있었다. 따라서 반대한다고 그것을 가지고 책망을 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임금에게 대드는 모습이 대견하게도 생각되었다. 세종이 금방 화를 풀면서 말했다. 나중에 차근히 설명해 주겠다는 말이다.

 

   “너희들이 아니면 누가 저번에 했던 말을 나중에 다시 하겠느냐.

    내가 너희들을 보는 날이 많으니 나중에 대면하여 설명할 것이다.

    (若非爾等 孰敢旣陳於前 復言於後乎 予與爾等接見之日多 

    予當面諭 : 세종 7년 6월 27일)”

 

육기법에 대한 세종의 생각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이들을 만나 직접 설득할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한 10개월 쯤 지나 우사간 박안신 등 여러 명이 올린 개혁요구 상소문 중에도 육기법에 대한 철폐요구가 들어있었다. 재주 없는 사람이 수령직에 오래 머무르면서 나태해지고 국가의 녹을 축내며 또 간악한 아전의 꾐에 빠져 백성의 고혈을 빨게 되므로 백성과 국가가 병들게 될 것이니 옛날 삼기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때 세종은 육기법 반대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수령육기법이 다들 나쁘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폐단을 제대로 보고나서

    나쁘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대저 육기법은 선현들이 의논했던

    법이고 또 중국서 행했던 법이다. 만약 오래 재직하여 국민이 궁핍하고 

    국가가 병들며 사람들 마음이 태만해진다는데 어찌 수령이 다스려서 

    그런 것이냐. 일반 사람을 앉혀도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임명   

   하며 어떤 일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만약 육기법을 파하고 삼기의    

    법을 시행한다면 수령들이 다 순리가 된다는 말인가. 삼년임기의 법을    

   행하더라도 모두 일반인이고 현자가 없어서 삭체와 영송의 폐단이 계속   

   있을 것이라면 그 직에 오래 체임하는 것도 못할 것 없지 않은가.  

    (守令六期之法 皆惡之 洞見其弊而惡之歟 予則未知其意 夫六期之法 

    先賢所議 而中國亦行之 若以久於其職 瘠民病國 反生怠心 則豈徒守令而  

    己在常人亦皆然矣 如此則何人可任 何事可成歟 若罷六期而行三載之法 

    則其守令 果皆循吏歟 雖行三代之法 皆一般人 而無賢智者 則與其數遞

    迎送之有弊 寧久於其職 無乃可乎 : 세종 8년 4월 12일)” 

 

삼기법을 택한다고 수령이 현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수령의 무능력으로 인한 폐단은 둘 다 같다. 그러나 육기법을 택한다면 최소한 빈번하게 수령이 갈림에 따라 발생하는(삭체와 번고) 폐단은 삼기법보다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세종의 논리였다. 세종의 결심은 확고했다.

 

   “대저 육기법을 세운 까닭은 경외 삭체로 인해 기강이 몹시 무너졌기 

    때문이다. (夫所以建六期之法者 因京外數遞 以紀綱陵夷之故也 :

    세종 8년 4월 12일)”  

 

 

V.3 수령육기법 2차 반대여론

 

한참 지난 세종 13년 4월 성균관 생원 오흠로가 매우 긴 장문의 상소를 다시 올려 육기법을 철폐하자고 건의했다(세종 13년 4월 6일). 그의 폐지론은 지난 번 그가 제기했던 폐지론과 약간 다른 부분이 있었다. 첫째로 수령육기제도는 구조적으로 현인은 피하고 천한 사람이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똑같은 재능이라도 수령직에 있게 되면 경직에 있는 사람보다 승진이 그만큼 늦어지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는 풍조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힘 있고 세력 있는 자의 권속들은 수령직을 피할 것이고 비천하고 세력이 없는 자들만 수령직에 부임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두 번째로는 감사의 인사행정상의 무책임함을 꼬집었다. 원래 군자는 대범하고 중후하여 벼슬이나 명예를 낚는 것을 즐기지 않으므로 감사가 부임해 오더라도 구차히 아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감사의 눈에는 거만하게 보일 것이고 따라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여 결국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간사한 소인배들은 감사가 부임하면 갖은 아부와 뇌물로 잘 보이려 할  것이며 결국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유임 승진하는 나쁜 결과의 책임은 분명 불공정한 감사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오흠로는 십삼 년이 지난 세종 26년 윤7월에 육기법 폐지를 또 요구하였다. 세종은 읽은 뒤 그냥 내버려 두었다. 

 

6개월 뒤 좌사간 김중곤 등도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육기법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들의 여섯 가지 폐지 이유가 다음과 같았다.

 

   (i) 수령직 육 년을 마치고 잠깐 경직에 온 뒤 다시 수령직으로 가는 자    

    가 허다 한데 그러면 수령직을 10년 이상 하는 셈인데 그렇다면 경직   

    과 외직을 고루 경험하게 한다는 본래 방침에 위배되고,

   

   (ii) 십여 년 수령직에 머무르게 되면 태만해 짐을 피할 수 없으며,   

 

   (iii) 명문벌족의 자제는 모두 다 수령직을 헌신짝 같이 보고 피하므로

       부패한 고려시대의 안집사(안찰사) 같이 될 것이 우려되고,

 

   (iv) 감사의 인사 평가상의 무능을 볼 때 무능한 수령의 교체는 기대하기    

     어렵고 따라서 백성들은 숨죽이고 학정에 시달리게 될 것이며,

 

   (v) 수령인 남편이 부인과 오래 떨어져 사는 데 따른 원성이 크고,

 

   (vi) 육기법을 찬성하는 대신의 자제로 수령이 된 자가 없는 것을 보면 

       찬성론자의 이론이 겉과 속이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종은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육기법이 도입된 지 벌써 9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반대하는 자들이 많으니 이것이 정말 잘 된 법인지 의심이 가기도 했다. 집현전에게 명하여 중국의 지방수령 임명 역사를 다시 정리해 오도록 했다. 중국은 경관이 되려는 자를 반드시 일정기간 지방관을 역임하도록 하는 ‘수입<須入>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의 설명을 다 듣고 나자 정연, 정초, 조계생, 권진, 맹사성 등이 입을 열었다. 육기를 삼기로 고치고 3품 이상의 고관자제나 사위 중에서 지방직 경험이 없는 자를 의무적으로 외직에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세종에게 물었다. 

 

황희와 허조가 반대하고 나섰다. 백성들이 수령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것은 외직에 있는 자들이 부역과 세금이나 거둘 뿐 백성의 고통과 불편함을 생각하지 않음에 있는 것이지 수령의 임기가 길고 짧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법을 또 삼기법으로 바꾸어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외직의 중요성을 고양하기 위하여 2품 이상 고관의 자제와 사위는 고질병이 있거나 부모가 늙고 병든 경우 외에는 반드시 외임직에 임명하도록 건의하였다. 세종은 황희와 허조의 옹호를 듣고 육기법에 대한 확신을 다시 가질 수 있었다. 

 


V.4 고약해 파직 사건

 

육기법이 도입되고 17년이나 지나 그에 대한 논란이 가라앉았을 법도 한 세종 22년에 뜻하지 않게 이 문제를 거론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호조참판 고약해였다. 고약해는 세종이 아끼는 신하로써 한성부윤과 대사헌을 지낸 고관이었다. 이날 상참에서 고약해는 자기가 수령을 지내봐서 잘 아는데 육기법으로 인하여 뇌물죄가 성행하고 있으니 육기법을 폐지하자고 주청했다. 더 이상 반대가 없는 육기법에 대한 새삼스런 고약해의 문제 제기도 거슬렸지만 그 오만하고 망령된 말투가 특히 세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세종이 큰 소리로 고약해를 꾸짖으며 말했다.

 

   “신하는 임금에게 감히 망언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뇌물죄를

    범했다는 말이냐.

    (臣子之言於君父 不敢妄言 守令犯贓者 誰歟 : 세종 22년 3월 18일)”

 

임금의 진노한 질타에도 불구하고 고약해는 들은 척도 않고 자기주장을 늘어놓았다. 자기 말만 계속 늘어놓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세종은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질책하며 말을 이었다.

 

   “경은 내 말을 자세히 듣지도 않고 감히 말하는구나. 끝까지 똑똑히 

    들으라. 열 고을 이상 경력이나 수령을 지낸 사람도 있다. 옛날에는 

    신하가 외직에 임명되면 험하고 힘든 것은 물론 죽는다 하더라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게 어찌 충신이 아니거나 임금을 잊어서   

    그런 것이겠느냐. 다만 권한의 가볍고 무거움이 있을 뿐이다. 경은 단지   

    한 고을만 경험하고서 외직을 그렇게도 혐오하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卿不細聽予言 敢言之歟 卿其諦聽 經歷守令至於十數邑者 或有之矣  

    古者人臣受命于外 不避艱險 有死無貳者 豈皆非忠臣而忘君上乎 

    但權其輕重耳 卿纔經一州 其厭惡如此 何如 : 세종 22년 3월 18일)”

 

이쯤 되면 입을 다물고 가만있어야 할 판인데 고약해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미 뇌물을 받은 것으로 판명된 수령이 2,3명 있으며 또 자기가 직접 폐해를 눈으로 봤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육기법 폐지를 간언했는데도 채택되지 않아 임금에게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다. 이 무슨 망발인가. 더 책망하고 싶었지만 세종은 “그냥 알았다.”고만 말하고 참았다. 

 

모두 다 나가고 난 뒤 세종은 도승지를 불렀다. 그리고 화를 낸 이유를 설명했다. 고약해(1376-1443)는 17세에 문과초시 성균관시를 합격하고는 부친의 상을 당하여 초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모친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다고하여 사간원 추천으로 공안부 주부로 관직에 출사하였던 사람이다. 효행이 높으므로 세종이 특별히 추천하여 승진이 빨랐던 사람이었다. 타고난 성품이 바르고 도량이 넓으며 언사가 바르고 강직하여 곧장 직언을 잘 했다. 세종이 좋아하는 꼭 그런 형의 사람이라 부왕께 적극 추천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작은 형님 효령대군을 통하여 그에 관한 이상한 말을 듣게 되었다. 고약해가 효령대군 집에 와서 말하기를 “유계문은 경주부윤 임명을 기피했지만 자기라면 기피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떠벌렸다는 것이다. 고약해도 경주부윤 자리에 추천이 되었지만 외직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으므로 외직으로 발령이 날 가능성은 희박했던 상황임을 본인은 알고 있었다. 세종이 고약해에 대해 괘씸하게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외직으로 발령 나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발령 나면 가겠다.”는 말이 가증스러운 것의 하나이고, 이곳에 와서는 외직을 기피하는 속마음을 가졌으면서도 겉으로는 올바른 외직풍토 개선 운운하며 임기를 육년에서 삼년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식이 그 가증스러움의 둘이었다. 고약해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세종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약해에 대한 분노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혐의가 다 세종의 ‘추측’에 근거하고 있을 뿐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점이다. 고약해가 경주부윤에 임명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가정일 뿐이다. 또 외직을 기피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도 가정일 뿐이다. 세종은 가정에 근거한 추측을 가장 싫어하였다. 특히 추측에 근거하여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세종은 지극히 혐오하였다. 따라서 고약해를 추측에 근거하여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결국 임금의 면전에서 불공한 말을 올린 죄만 묻기로 하였다.

 

사헌부 송취가 고약해 탄핵에 관한 임금의 지시를 다 듣고 나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고약해 진술을 들어보니 자기가 너무 긴장하고 진지하게 말하다보니 임금에게 불공스런 줄도 모르고 그랬다는 것이었다. 이제 고약해에게 불공경의 죄를 주면 앞으로 언로가 막히지 않을까 염려되니 용서하자는 것이었다. 세종이 수긍하며 말했다. 

 

   “이제 이걸 보니 그의 뜻 또한 바르지 못하므로 징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들이 이미 그 죄를 벗겨 주기를 바라므로 어찌 사실

    대로 추핵할 수가 있겠는가. (今乃若是 其志不直也 不可不懲 汝等旣欲脫   

   其罪 何能從實推劾乎 : 세종 22년 3월 19일)”

   

그 날 우승지 조서강을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신개의 집에 보내 의논하게 한 뒤 고약해의 관직만 파면하도록 하였다. 집현전 부수찬 하위지는 고약해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세종 22년 9월 17일). 그의 죄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죄를 줌으로써 언로가 막힐 것이 참으로 우려된다는 뜻이었다. 특히 임금의 신뢰를 얻어 수시로 임금께 뜻하는 바를 말씀 드릴 위치에 있는 자가 말을 제대로 하면 그 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고 말을 한번 잘못하면 죄를 받는다고 한다면 아무도 바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고약해는 확실히 신하로서 지켜야 할 절제를 잃었었다. 임금의 말을 도중에 끊고 자기주장만을 내세웠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겉 다르고 속 다른 말을 떠벌리고 다닌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추측으로 사람을 벌을 줄 수는 없다.

그리고 신하가 임금에게 한 말을 가지고 죄를 주는 것은 정말로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신하들의 바른 말을 막는 폐단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위지의 글을 다 읽고 나서 임금은 하위지의 직언에 감탄하여 술과 음식을 내렸다. 고약해는 파면되었다가 1년 3개월 만에 경창부 부윤으로 관직에 복귀했다(세종 23년 5월). 일 년 뒤에는 승진하여 자헌대부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가(세종 24년 8월) 그 다음해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aa9924ae30640c0abc97e1ed632e8399_1674285
aa9924ae30640c0abc97e1ed632e8399_1674285
aa9924ae30640c0abc97e1ed632e8399_1674285
aa9924ae30640c0abc97e1ed632e8399_1674285
<ifsPOST>

 

 

 

2
  • 기사입력 2023년02월0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4일 10시15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