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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9: 우문태‧우문옹의 업적을 탕진한 북주(北周)의 우문빈 <Z>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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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3월10일 17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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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62> 황패의 몰락(AD580)​

 

정역과 유방은 양견에게 정권을 잡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양견이 이들에게 내린 상과 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황공 유방과 패공 정역은 그 공로를 의지하여 교만하고 사치하며 재물을 탐을 내고 직무를 소홀히 하였다. 그러나 지난 번 울지형 정벌 때 감군이 되기를 거부한 일로 말미암아 크게 실망한 양견은 점점 이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반면 감군으로 자원한 고경이 돌아오자 양견은 큰 상을 내리고 총애와예우가 날로 깊어졌다.

 

당시 남쪽 안륙지장의 사마소난과 익주의 왕겸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양견은 걱정이 많았는데 황공 유방은 술과 향락을 그치지 않았다. 양견은 사마 유방을 고경으로 교체하고 정역은 차마 파직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두되 속관들에게 정역에게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여일을 처리하지 않도록 했다. 그 사실을 안 정역은 불안을 느끼고 면직해주도록 강하게 요청했지만 양견은 직책을 그대로 두었다.  

 

<163> 안륙지방 사마소난과 왕겸의 익주 평정(AD580)

 

북주의 장군 왕의가 네 명의 총관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운주, 즉 지금의 안륙지방으로 내려왔다. 대항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사마소난은 왕의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또 양예는 보기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익주의 왕겸을 토벌했다. 오아겸은 장군 달해기, 고아나굉 을불건 등을 10만 군사와 함께 파견하여 맞서 싸웠다. 그러나 힘이 달린 달해기와 을불건이 양예에게 투항하면서 왕겸의 익주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왕겸은 30여 명의 측근을 이끌고 사천성 신도로 도망갔다가 신도 현령 왕보에게 붙잡혔다. 양예는 왕겸과 고아나굉의 목을 잘라 장안으로 보내고 익주방면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위효관은 죽었다. 자치통감에서는 위효관을 이렇게 평가했다.

 

  오랫동안 병경에 있으면서 여러 번 강적을 막아 싸웠다. 

  전략을 세우고 군사를 배치하는 것을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나놓고 보면 두루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신묘했다.

  비록 군대 생활을 오래 했지만 

  문장과 역사에 매우 통달하고 친족들에게 화목하고 돈독했으며

  봉록을 받으면 개인적으로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으로 칭송했다.

  


<164> 양견이 수나라 건국(AD581)

 

대체로 강북 전국을 장악한 양견은 상국으로 취임하고서 백관을 총괄했다. 20개 군을 수국으로 편입했는데 양견은 그 중 10개 군만 수령했다. 조정에서는 양견에게 구석의 예를 갖추어 대접하게 했다. 그리고 5대 친왕 중 남은 대왕 우문달과 등왕 우문유 및 그 아들을 모두 살해했다. (AD580) 다음해 2월 대장군 유계재의 강력한 제안으로 양견은 하늘의 천명을 받고 북주의 황제자리를 양위를 받도록 했다. 수나라가 건국된 것이다. 북주의 군주 우문천은 제위를 선양한 다음 별궁으로 옮겨졌다가 몰래 살해되었다. 이로써 AD557년 우문각이 세운 북주는 2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우경칙이 양견에게 모든 우문씨를 다 없애자고 권고했다. 고경과 양혜 또한 좋다고 했다. 이덕림은 반대했다. 양견이 이덕림에게 말했다. 

 

  ”그대는 서생이니 이 문제를 더불어 의논하기 부족하오.“

 

수 십 명의 우문씨가 이때 도륙되었다. 우문씨가 북제의 고씨를 모두 죽인 것이 4년 전의일이었다. 38년 뒤 양씨 또한 당의 이씨에게 도멸당하고 만다.  

 

<165> 북주(AD557-AD581)의 멸망원인

 

길지 않은 북주의 건국 24년 동안 가장 강력한 시절이었다면 우문옹에 의해 북제를 멸망시켰던 AD577년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만에 북주가 멸망한 원인을 돌이켜 보면 몇 가지 분명한 이유가 드러난다.

 

첫째로 북주 최고의 명군 우문옹의 돌연 사망이다. 북제를 멸망시킨 그 바로 다음해 AD578 우문옹은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치통감이 드물게 칭찬했던 명군 우문옹이 몇 년 만 더 살았더라도 남조의 진을 통합하여 전 중국을 통일하면서 수나라를 대신하는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문옹의 아들 우문빈이 형편없는 군주였다는 점이다. 사치하고 향락을 즐겼으며 끝없이 제도를 바꾸고 고쳐서 백성들을 불안하게 했다. 

 

셋째로 정역과 유방 같은 수준이하의 간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국정을 농단했다는 점이다. 물론 우문빈이 혼군이었으니까 당연히 간신배들을 가까이 했겠지만 이들은 우문빈에게 붙어서 권세를 부리다가 결정적으로 양견에게 붙어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들이다. 

 

넷째로 북주 최고의 충신이며 종친이었던 우문헌과 우문효백, 그리고 울지운과 같은 훌륭한 신하를 무참히 죽여 버렸다는 점이다. 이들만 살아 있었어도, 정역과유방 같은 간신만 없었어도 북주는 훨씬 튼튼하고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을 것이다. 북주가 이룰 수 있었던 모든 업적은 양견이 역성혁명으로 세운 수나라가 다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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