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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9: 우문태‧우문옹의 업적을 탕진한 북주(北周)의 우문빈 <W>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2월1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1일 15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45> 북주 선제 우문옹의 갑작스런 죽음과 우문빈의 등극(AD578)

 

남쪽의 진나라가 북정에서 실패하여 더 이상 침략할 우려가 없어지자 우문옹은 북주의 북방에 있는 돌궐을 정벌하러 나섰다. 쉬지 않고 유주지역을 침범하는 돌궐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군사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 북진했는데 중군을 거느리고 경양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우문옹이 크게 아팠다. 사신을 급히 장안으로 보내 우문효백을 불러서 말했다.

 

   ” 내 병이 필히 낫지 않을 것 같으니

     후사를 경에게 부탁하오.“

 

우문효백은 우문호를 제거하는데 최고 공신이었고 그 위에 과묵하고 침착하며 정직하고 충성심이 많은 종실이었다. 우문효백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병든 군대를 서둘러 돌려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우문옹은 장안에서 곧 죽었다. 31살의 나이였다. 태자인 우문빈을 황제로 옹립하고 황후 아사나씨를 황태후로 올려 책봉했다. 새로 황제가 된 20살의 선제 우문빈은 용렬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무제가 출병 중에 죽었지만 전혀 슬픈 기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왜 이렇게 늦게 죽었느냐고 한탄할 정도였으며 예전처럼 향락과 사치에만 몰두했다. 아버지의 궁녀들을 탐내어 범했으며 상례가 끝나기도 전에 상복을 벗겠다고 졸랐다. 정역이라는 사람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조정의 전권을 맡겼다.

 

 

<146> 종친 우문헌 살해(AD578) 

 

우문헌은 우문태의 다섯째 아들로 황제 우문옹의 바로 아래 동생이어서 황족 중에서 항렬도 높았고 또 명망도 깊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태자로써는 황위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우문헌인 셈이었다. 우문빈은 삼촌 우문헌을 죽여 줄 것을 우문효백에게 부탁했다. 우문효백은 우문빈의 감언이설에 속을 사람이 아니었다.

 

   ” 그렇게 되면 신은 불충한 사람이 되옵고

     폐하는 불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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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후로 우문빈은 우문효백을 미워하며 둘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우문빈은 우지와 정역을 시켜 우문헌을 반란혐의로 무고하게 했다. 우문헌은 태사직을 사양하고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날 저녁 우문빈은 모든 황족 친왕들을 궁궐로 소환했다. 우문헌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불려가 목을 메어 죽었다. 우문헌 나이 35세 였다. 그의 측근 왕흥, 독고웅, 두로소 등도 모두 같이 제거되었다.

 


<147> 우문빈의 4輔官 조정 구축과 충신 낙운의 여친팔계輿櫬八戒(AD578) 

 

북주 황제 우문빈은 곧바로 측근들로 조정을 새로 꾸렸다. 전후좌우 네 명의 최측근 직인 사보관을 설치했는데 월왕 우문성이 대전의, 촉공 울지형은 대우필, 신공 이목은 대좌보, 수공 양견은 대후승이 되었다. 

 

이 때 경조군승 낙운樂運은 황제의 정치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했다. 형벌을 적용함에 있어서 사면이 너무 무분별하고 빈번하여 악인들을 무더기로 양산한다고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관을 가지고 와서 황제의 여덟 가지 정치잘못(여친팔계輿櫬八戒)을 지적하였다.   

 

첫째, 최근 중대사를 독단으로 처리하면서 여러 재상을 참여시켜 같이 의논하지 않은 잘못,

둘째, 미녀를 색출하여 후궁에 들여놓으면서 재상집 여자를 결혼하지 못하게 한 것,

셋째, 후궁이 들어오면 며칠을 궁궐에서 나오지 않고 환관에게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한 것,

넷째, 벌을 내리면서 터무니없이 관대했다가 반년도 안 돼 다시 갑자기 엄격하게 바뀐 것,

다섯째, 고조(우문옹)께서 검소하라고 부탁했는데 돌아가신지 일 년도 안돼 다시 사치한 것,

여섯째, 백성을 부려서 배우와 씨름꾼에게 봉사하게 한 것,

일곱째, 상서한 사람이 글자를 잘못 썼다고 죄를 물어서 상서를 아예 막으려 한 것,

여덟째, 하늘이 내리는 경계를 바탕으로 조심하고 반성하여 좋은 길로 가지 못한 것.      

 

황제는 격노하여 죽일 생각을 품었다. 신하들도 모두 내용의 대담함에 하나같이 경악했다. 낙운을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내사중대부 원암만이 나서서 이렇게 낙운을 두둔했다.

 

   ” 장홍臧洪과 함께 죽는 것도 사람들이 원하는 바 일 텐데 

     하물며 비간과 같은 훌륭한 사람과 같이 죽는 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만약 낙운이 사형을 못 면한다면 

     나 또한 같이 죽을 것이다.“

 

장홍이란 사람은 후한 헌제 AD195년 원소에 반항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인데 그 죽음이 의롭다고 생각한 같은 마을 진용이 함께 죽었던 고사를 말한다. 그리고는 황제를 알현하기를 청하면서 말했다.

 

   ” 낙운이 죽음을 무릎 쓴 것은 깨끗한 이름을 남기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폐하의 성스러운 도를 넓히는 일입니다.“  

     

우문빈은 그의 말에 공감하고 다음 날 낙운을 소환했다.

 

   ” 짐이 어제 밤 그대가 말한 내용을 깊이 생각해 봤는데  

     과연 충신이라고 할 만 했소.“ 

 

식사를 대접한 뒤 낙운을 돌려 보냈다.

 

 

<148> 북주 우문빈의 어두운 정치 : 충신 왕궤의 죽음(AD579)

 

 하루는 황제 우문빈이 조용히 정역을 불러 물었다.

 

  ” 내 다리에 있는 상처는 누구 때문에 생긴 것인가요?“

 

정역이 답했다.

  

  ” 오환 왕궤와 우문효백 때문에 생겼습니다.“ 

 

이일 이후 왕궤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우문옹과 함께 우문호를 몰아 낸 공신 왕궤는  황제 우문빈이 자격 없음을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왕궤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은 서주로 남쪽 진나라 조정과 국경이 맞닿아 있어서 언제라도 그쪽으로 붙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궤는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 충의지절이란 쉽게 더럽히거나 거역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선제(우문옹을 말함)의큰 후덕과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어떻게 경거망동하여 죽은 주군에게 죄를 짓겠는가. 

    오로지 기다렸다가 죽음으로써 

    천년이 지난 다음이라도 나의 진정한 마음을 알리고 싶을 따름이다. “ 

 

우문빈은 내사 두경신을 보내 왕궤를 죽일 참이었다. 원암은 조서의 서명에 끝까지 반대하고 나섰으며 중대부 안지의도 간절하게 죽이지 말 것을 요청했지만 황제는 듣지 않았다. 원암은 머리 두건을 벗고 머리를 숙여 삼배를 한 뒤 한 걸음씩 전진하며 항의의 뜻을 표했다.

우문빈은 이렇게 꾸짖었다.

 

  ” 너는 오환(왕궤가 오환족이었다)같은 무리가 되려는가?“

 

원암이 이렇게 대꾸했다.

 

  ” 저는 왕궤의 무리가 아닙니다.

    다만 멋대로 사람을 죽여서 천하의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침내 왕궤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원암의 가족들도 모두 폐족되었다.

 

 

<149> 북주 우문빈의 어두운 정치 : 충신 울지운과 우문효백의 죽음(AD579)

 

울지운은 우문빈이 태자로 있을 때부터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기를 간청하였다. 당시 황제 우문옹은 태자를 잘 교육시키는 울지운이 고맙기 그지없었지만 우문옹이 죽고 우문빈이 황제가 된 다음에는 상황이 달랐다. 황제 본인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었던 여러 선생들이 자신을 헐뜯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울지운, 우문효백, 우문신거 등을 적대세력을 보고 잇었다. 울지운이 그런 상황을 우문효백에게 토로했다 

 

  ” 닥쳐올 재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요? “

 

우문효백이 이렇게 말했다.

 

   ” 지금 노모가 살아계시고 지하에는 무제(우문태)거 계십니다.

     신하가 되고 아들이 되어서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또 인사를 담당하는 사람이면 의당 대의명분과 의리를 따라야 할 것,

     간언을 올려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죽어도 좋은 것이지 어찌 도망가겠습니까

     족하가 만약 몸을 생각하신다면 마땅히 멀리 도망가십시오.“

 

다른 날 황제가 우문헌의 일로 우문효백을 꾸짖었다.

 

   ” 공은 우문헌이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것을 알고서도 어찌 말이 없었소?“

 

우문효백이 말했다.

 

    ” 신은 제왕 우문헌이 사직에 충신이라는 것을 알았지

      자질구레한 여러 참소의 말을 믿지 않았으므로 말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또 선제께서 부족한 신에게 부탁하실 때 

      오로지 폐하를 보필하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금 간언을 올려도 가납하시지 않으셨는데 

      선제의 부탁을 받은 몸으로 심히 송구스럽습니다.“

      그것이 죄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황제는 참울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말없이 머리만 올렸다 내렸다 했다. 우문효백에게 나가라고 한 뒤 사약을 내렸다. 병주자사로 있던 우문신거에게도 사신을 보내 짐독을 내려 죽였다. 진주총관으로 부임하게 되는 울지운 또한 우울한 마음이 병이 되어 죽었다.      

 

 

<150> 북주 우문빈의 황위 양위소동(AD579) 

 

AD579년 초 황제 우문빈은 돌연 제위를 어린 아들 우문천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문천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스스로 천원황제라고 칭하고 머무는 곳을 천대라고 불렀다.면류관의 줄은 통상 12줄에서 24줄로 늘였으며 모든 수레, 의복, 거처, 집기들의 크기를 두 배로 했다. 천원, 즉 우문빈은 더욱 사치하고 방탕하며 교만해졌다. 두렵고 무서워하는 것이 없었고 국가 의식은 마음가는대로 고치고 바꾸었다. 자신을 알현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사흘간 목욕재계해야 했고 직전 하루는 모든 것을 금하고 몸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가다듬도록 했다. 다른 사람의 칭호에 天, 高, 上 및 大 라는 말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했고 관직 중에서도 이 글자가 들어가는 것은 모두 고쳤다. 따라서 성씨 중에 高씨는 姜씨로 바꾸었고 구족 중에서 高祖는 長祖로 불렀다.  

 

신하를 불러 의논할 때에도 오직 만들고 고치고 바꾸는 것만 하려했고 정사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잘못을 저지르는 신하나 궁녀들에게는 항상 매를 때렸는데 하늘이 내린 매, 즉 천장天仗이라고 해서 한 번에 꼭 120대를 내리쳤다. 겁에 질린 신하와 궁녀들은 종일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발을 포개어 걷기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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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2월1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1일 15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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