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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9: 우문태‧우문옹의 업적을 탕진한 북주(北周)의 우문빈 <V>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2월10일 14시35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1일 15시0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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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41> 북제의 마지막 항거와 북제 멸망(AD577년)

 

북제 광녕왕 고효형은 창주(하북성 염산)에 도착하여 5천의 병사를 모았다. 임성왕 고개를 신도(하북성 기현)에서 만나 도합 4만 군사를 다시 규합할 수 있었다.북주에서는 양견과 우문헌을 보내 공격하게 하는 한편 고위에게 편지를 써서 소환했으나 올 리가 없었다. 우문헌은 고개의 첩자 두 명을 생포했는데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면서 말했다.

 

   ” 내가 다투는 것은 너희들이 아니다.

     지금 풀어 줄 터이니 내 사자가 되어라“ 

 

고개에게 보내는 편지를 두 첩자에게 쥐어 보냈다. 상황을 깨닫고 진작에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개가 버티는 동안 고개의 장수 울상원은 북주와 대항하는 척 하다가 북주에 투항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 벌어진 전투에서 고개의 군사는 우문헌에게 크게 패했다. 전사자와 포로의 숫자만 3만 명이었다. 고개와 광녕왕 고효형도 사로잡혔다. 우문헌이 고개에게 말했다  

  ” 어쩌다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소.“

 

고개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신무황제(고환)의 아들이고 형제가 열다섯 명이지만

   용케 혼자 살아남았소.

   종묘와 사직이 전복될 지경이지만 부끄러운 점이 하나도 없소.“

 

우문헌은 그 듯을 높이 사서 처자를 돌려보내주었다. 또 고효형의 상처를 직접 약을 발라주었고 후하게 예우해 주었다. 고효형이 탄식하며 말했다.

 

  ” 신무황제를 제외하고 숙부 형제들 중에서 나이 40에 이른 사람이 없다.

    이것은 운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군은 총명함이 없고

    재상은 기둥과 주춧돌이 될 재목이 아니었으니

    병부를 쥐고 부월을 받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 통한스러울 뿐이오.,“

 

북삭주에서 옛 장사였던 조목이 고소의(고양의 3자)를 추대하여 반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역부족을 느끼고 돌궐로 도망가고 말았다. 동옹주의 부복과 영주(요녕성 조양)의 고보녕도 북주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50주 162군 380현이 북주에 귀속되면서 북제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북제의 뺏긴 가호는 303만 2500호라고 기록되었다. 북제의 도읍 업에 잇던 동산, 남원, 삼대는 다 부수었고 달린 땅은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문옹은 이덕림을 내사로 삼고 북제의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는 작업을 모두 맡겼다. 

  

<142> 우문옹의 북주 인사와 내정 개혁(AD577)

 

AD550년 고양이 세웠던 북제를 27년 만에 완전히 멸망시켜 북중국을 다시 통일한 북주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우문검이 대총재가 되었고 우문량은 대사도, 달해진은 대종백으로 임명되었다. 후막진예는 대사마, 독고영업은 대사구, 위효관은 대사공 자리에 앉았다. 쿠테타 주역이었던 동생 우문직은 아무 자리도 얻지 못했다.

 

황제 우문옹은 나아가 이전 실권자 우문호가 세운 여러 전각들을 모두 부수라고 명령했다. 

 

  ” 여러 전각들은 우문호가 정치를 멋대로 하면서 만든 것들이다.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으로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모두 철거한 다음 그 부속물들은 모두 서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

    앞으로 건물을 세울 때에는 반드시 소박하고 저렴한 것을 쓰도록 하라.“ 

 

이런 조치를 사마광은 매우 크게 평가했다.

 

  ” 북주 고조 우문옹은 승리를 현명하게 처리했다(善處勝)고 할 만하다.   

    다른 사람들은 승리로 더 더욱 사치했지만 

    우문옹은 승리할수록 더욱 검소하게 처신했다.“  

 

북쪽을 통일한 북주는 권형도량權衡度量을 통일하고 죄는 대를 넘기내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도입하여 포로로 편입된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143> 북주 우문옹에 대한 평가(AD577)

 

자치통감에는 우문옹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격은 절약 검소하여 항상 평범한 옷을 입고 다녔으며 

잠자리 이불 또한 매우 소박했다.  

후궁은 불과 10여명에 그쳤고 

군대를 부릴 때마다 항상 스스로 진열에 들어가 같이 행군했고

산과 골짜기를 직접 걸어서 함께 건넜으니 

군사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군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여 다독거렸고

명철하고 과단성 있게 결정을 내렸으며 

법을 적용함에도 엄격했기 때문에 

모든 장수와 병사들이 두렵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서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44> 남조 진나라의 북벌 실패(AD577)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자 남쪽의 진나라에서는 옛 땅이었던 서주지역(지금의 강소성 북부)과 연주지역(산동성 남동)을 빼앗을 생각을 했다. 북조 조정으로서 그 지역은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있었으므로 힘들여 반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나라 명장 오명철을 앞세워 쳐들어온 진나라 군사는 일단 양사언이 지키고 있던 서주를 포위했다. 진나라 선종 진욱은 서주연주 침략은 마치 손가락 가르치기처럼 쉽다고 가볍게 여겼다.(指麾可定)   

 

채경력이 북주 공략을 너무 경솔하게 생각하는 황제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 지휘장군이 그렇게 교만하시니

    지나치게 멀리 침략하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황제가 국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분노하며 채경력을 예장내사로 내쳤다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뇌물죄로 연계하여 파면하고 말았다. 

 

진나라 장수 오명철은 팽성(강소성 서주)를 포위하면서 쉽게 함락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주의 장수 왕궤가 사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사구를 점령했다. 진의 장수 사마가는 오명철에게 먼저 왕궤를 격파하자고 제안했지만 오명철은 거만하게 거부하며 말했다.

 

  ”  적의 깃발을 뽑고 진지를 함락시키는 일은 장군이 할 일이요 搴旗陷陈,将军事也

     깊이 생각하고 먼 계략을 세우는 것은 늙은 노인네 일입니다.长算远略,老夫事也“

 

경악한 사마가가 물러났는데 순식간에 북주나라에서 수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진나라 병사들은 물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방둑을 터서 물을 대고는 배를 타고 퇴각하자고 의견이 나왔다. 마주 배열은 그렇게 되면 배들이 전부 쓰러져서 사용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말을 타고 빠져나가는 것 만 못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당시 오명철은 등에 난 종창이 악화되어 크게 힘들었는데 소마가가 다시 이렇게 청했다.

 

   ” 지금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하며 진퇴가 모두 어렵습니다.

     만약 군대를 은밀하게 보내 갑자기 적군을 포위하면  

     치욕은 면할 수가 있습니다.

     원하건대 공께서 보졸을 데리고 말을 타고 서서히 나가시는 동안

     저 소마가가 철기 수천을 대동하고 앞뒤로 치고 같이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공계서는 안전하게 경읍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명철이 이렇게 답했다.

 

    ” 동생의 계책은 좋다. 

      그러나 보졸군사가 너무 많고 또 총독이 된 몸으로 

      필히 후미에 있어야 여러 장수들이 같이 나아갈 수가 있다.

      동생의 기병은 반드시 앞에 있어야 하니 지체할 수가 없지 않은가“  

 

초주자사 소마가는 즉시 기병을 이끌고 야밤에 나섰다. 오명철은 방둑을 허물고 물을 따라 철수했다. 기주지방을 지나 회하지방으로 들어가 청구에 도달하자 물길이 얕아지며 배가 더 이상 나아기질 못했다. 이 때 북주의 왕궤 군사가 들이닥쳐 오명철이 사로잡히고 군사 3만 여명이 북주군사에게 죽었다. 67세의 고령인 오명철은 패배의 치욕에서 벋어나지 못하고 화병으로 죽었다. 소마가는 정예기병 80명이 전면을 돌파하고 그 뒤를 따라 기병이 이어주는 바람에 새벽녘에 회남에 도달하여 장수 임충과 주라와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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